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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거하시는 자 (히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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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거하시는 자 (히 3:6)


몇 년 전 베트남을 여행하면서 베트남의 민족 영웅인 호치민의 생가를 돌아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이란 두 가지 업적을 이룬 민족의 영웅으로 칭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0년이 지났음에도 그의 시신이 안치된 곳에는 그를 추모하려는 사람들이 긴 줄을 이루고 이었습니다. 그가 생전에 집무했던 집은 작고 볼품없는 건물이었습니다. 그 안에는 좁은 집무실의 작은 책상 한개, 그의 침실에는 나무침대, 다른 방에는 손님을 접대하기 위한 책상과 주전자, 찻잔 몇 개, 라디오, 그가 즐겨 쓰던 모자 등등이 전부였습니다. 
그의 집무실에는 그가 한 나라를 지배한 지도자로서 누렸을 부귀나 영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고, 권력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했을 권위를 상징하는 그 어떤 상징물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나는 조국 베트남과 결혼했다.”며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독신으로 살면서 1식 3찬에 폐타이어로 만든 고무신을 신고 살았다고 합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칼맑스와 레린 사상으로 무장된 공산주의자였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호치민이 거했던 그 곳은 베트남의 관광명소가 되어있었습니다. 볼품없는 그의 집이 왜 그토록 많은 국민들의 추앙의 대상이 되며, 국보가 되었겠습니까? 베트남의 민족지도자 호치민이 주인으로 살았던 집이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이 주인으로 좌정해 계시는 사람이겠습니까? 본문은 하나님이 내재(內在)해 계시는 심령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기록한 말씀입니다. 본문 끝 부분에“그의 집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집이란,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그의 집이라”는 말씀을“그 집은 곧 우리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이러한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만일 어떤 사람이 내 마음 문을 두드리면서‘누가 여기 사는가?’한다면, 나는 대답하기를‘여기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고 계신다. 전에는 말틴 루터가 살았으나 지금은 죽었다.’고 대답하노라.”고 했습니다. 종교개혁을 이룩한 마틴 루터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시골교회 무명신부였습니다. 루터 안에 루터는 없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므로 그의 삶은 위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루터를 통해 종교 개혁이 일어났고 이로 인해 세계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삶의 핸들을 주님께 내어드린 결과였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인간의 역사를 살펴볼 때 하나님이 들어 쓰신 사람들의 공통점 한 가지가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신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삶의 핸들을 주님께 내어드린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시는 위대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그렇습니다. 마태복음 16:16, 18말씀을 보면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그 안에 주인으로 계신 베드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학문이 높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잡이로 살아가던 무식한 어부였습니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주님께서 좌정해 계시기에 합당한 심령의 소유자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위대한 인물이 되어 후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 덤으로 얻은 수확이었습니다. 

구약성경 사무엘하 5:10에“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은 양치기 목동출신 다윗 왕입니다. 그는 가난한 목동으로 자랐지만 항상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삶을 인도하셨습니다. 그 결과 점점 강성하여 이스라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2:20에 고백하기를“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했습니다. 바울 사도 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실 뿐 자기 안에 자기는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은 복음을 유럽에 전했고, 복음을 받아들인 유럽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찬란한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유럽의 문화와 문명은 전 인류에게 미쳤습니다. 이처럼 누가 내안에서 나의 주인이 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누가 주인으로 자리하고 있습니까?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6:19-20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가리켜“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하셨습니다. 우리 몸은 단순한 내 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계시는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좌정해 계시는 집 즉 성도의 심령은 어떠한 것일까요?

一.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본문에“소망의 담대함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소망이 없으면 그는 성도가 아닙니다. 소망의 반대는 낙망인데 이 낙심의 밑바탕엔 항상 사탄이 도사리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여도 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설명을 드린다면 교만한 마음과 낙심하는 마음은 그 뿌리가 같습니다. 교만과 낙심 이 두 가지는 자기 자신을 의지하고 믿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믿었기에 계획하는 일들이 잘되면 자기의 힘으로 이뤄진 것으로 알고 교만하게 됩니다. 반면 계획하는 일들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그는 낙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항상 내 마음에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언제나 소망이 넘칩니다. 사탄은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과 낙심을 심어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마태복음 13:22에 예수님께서 네 가지 마음 밭으로 비유하신 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가시떨기 밭입니다. 땅도 좋고 씨앗도 좋은데 가시떨기 까닭에 결실을 하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염려가 쌓이면 낙심을 낳습니다. 낙심이 쌓이면 포기를 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는 사람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시편 42:5,62:5에 다윗은 사탄으로부터 오는 낙심을 이기기 위해 스스로 다짐하기를“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대저 나의 소망이 저로 좇아 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소망을 품고 살아가면 자신의 능력과 성품이 개발되고 꿈을 수행할 능력을 갖추게 됩니다. 소망이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일제시대 말기에 전라북도 청웅에서 머슴살이로 살아가는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온갖 고생 끝에 18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무작정 상경하여 신문팔이, 구두닦이를 하면서도 열심히 공부하며 고향에서처럼 교회를 열심히 나갔습니다. 예배드리는 중에, 가난한 한국을 농업혁명으로 살리겠다는 꿈을 품었습니다. 청년은 농업으로 발달한 덴마크에서 공부하고 싶어 덴마크 국왕에게 무작정 펀지를 보냈습니다. 무모한 도전이었으나 놀랍게도 덴마크 국왕으로부터 모든 유학비용을 대겠다는 답장을 받았습니다. 그는 홀로 덴마크로 건너가 유학을 마쳤고 그 뒤 농업으로 유명한 이스라엘로 건너가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결국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한국 학계의 거두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모교인 건국대학교 총장이었던 유태영 박사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3:13에서 신앙생활의 세 가지 핵심 요소를 말씀하시기를“믿음, 소망, 사랑 이세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하셨습니다. 절대 소망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二. 담대한 심령의 소유자입니다. 

꿈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동반되어야할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꿈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 말씀하시기를“소망의 담대함과”라고 하셨습니다. 꿈은 있는데 그 꿈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이 없다면 공상으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경우에서 그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블레셋의 침략을 받은 이스라엘의 소망이 무엇이겠습니까? 블레셋의 침략을 막고 나라의 평안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그들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믿음의 확신이 없는 그들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어린 손년이었지만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다윗을 담대케 했습니다. 사무엘상 17:45-47말씀에“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소망에 대한 확신과 담대함이 있었던 다윗과 함께 하셔서 그의 소망대로 되게 하셨습니다. 다윗은 그의 믿음의 말대로 골리앗을 물매로 죽이고 나라를 지켰습니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위해 남북전쟁을 진두지휘할 때의 일화입니다. 링컨이 지휘하는 북군의 전세가 점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참모들은 불안해하며 이 전쟁에서 승산이 없는 것으로 알고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링컨이 말하기를“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도우시는 것일까? 아니면 불의한 사람을 도우실까?”“하나님은 의로운 사람을 도우시지요.”“그러면 우리가 싸우는 이 전쟁이 의로운 전쟁인가? 아니면 불의한 전쟁인가?” “그야 의를 위한 전쟁이지요.”“그러면 왜 불안해하는가? 염려하지 말고 기도하라. 반드시 하나님이 도우셔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결과 남북전쟁은 링컨이 이끄는 북군의 승리로 끝이 나고 노예 해방을 이루었습니다. 이처럼 꿈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확신과 담대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소망을 갖되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사람과 함께 하셨습니다. 

三. 예수님을 자랑하는 마음입니다.

본문에 말씀하시기를“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잡으면”하셨습니다. 무엇을 자랑한다는 것입니까? 자기자랑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시편 12:3에 말씀하시기를“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14에 기록하기를“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라고 했습니다. 

또 말씀하시기를 빌립보서 1:20-21에 기록하기를“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깊이 깨달은 사람의 특징은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고, 예수님에 대한 자랑밖에 없습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영 죽을 내대신 돌아가신 그 놀라운 사랑 잊지 못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명예와 바꿀 수 없네 
이전에 즐기던 세상일도 주 사랑하는 맘 뺏지 못해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행복과 바꿀 수 없네 
유혹과 핍박이 몰려와도 주 섬기는 내 맘 변치 못해 

세상 즐거운 다 버리고 세상자랑 다 버렸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예수밖에는 없네”(102장)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의 자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축복의 근원입니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행복의 뿌리입니다. 우리들이 소원하는 성공의 나침반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합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나타내어 좋게 말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사도는 고린도후서 1:14에 이렇게 말했습니다.“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또 그는 데살로니가전서 2:19-20에 말하기를“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사도의 자랑은 세상 끝날 그리스도를 자랑하여 그로 인해 구원받은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고귀하고 차원 높은 생각입니까? 세상은 다 사라지고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남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성삼위 하나님과 구원받은 사람들뿐입니다. 그때 하나님께 인정받는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을 전해 듣고 구원받은 영혼의 열매들입니다. 이것이 내가 남긴 영원한 업적인 것입니다. 이때의 영광에 대해 다니엘 12:3에 말씀하시기를“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예수그리스도를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베드로전서 2:9에“오직 너희는...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구원받은 우리들의 사명은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四. 끝까지 견고히 잡는 마음입니다. 

본문에“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하셨습니다. 무엇을 끝까지 견고히 잡아야할까요?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 끝 날까지 나와 함께 하신다는 소망과 담대함입니다. 구약성경 이사야 41:10에 말씀하시기를“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는 믿음입니다.

옛날 다윗 왕이 유명한 보석세공사에게 아주 좋은 보석반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왕은 그 보석 반지 만들 때에 좋은 글도 새겨달라고 했습니다. 세공사가 물었습니다.“어떤 글을 세길까요?”“내가 전쟁을 이기고 큰 기쁨에 도취되어서 나도 모르게 교만하게 될 때에 그 기쁨을 억제하고 교만하지 않게 하는 그런 글과, 동시에 때때로 왕으로서 일이 잘못되어 절망에 빠져 마음이 괴롭고 고통이 될 때에 위로를 받고 힘을 얻을 수 있는 그런 글이면 된다.”고 했습니다. 세공사는 반지라면 어떤 반지든지 다 만들 수 있겠는데 그 글은 어떻게 써야 할지 몰랐습니다. 기쁨에 도취되어 교만을 억제하는 것이나, 절망할 때에 위로가 되는 것은 서로 상반이 되는 것인데 한 글귀에 그런 두 가지 뜻을 담는다는 것은 불가능하게 생각이 되었습니다. 몇날 며칠 아무리 생각해보다도 좋은 글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세공사는 지혜가 좋다고 소문난 솔로몬 왕자를 찾아가 물었습니다.“왕자님! 왕자님은 교만하지 않도록 교훈이 되고 실망하지 않도록 위로가 되는 글귀를 알고 계십니까?”그러자 솔로몬은 금방“그것은 아주 쉽고 간단한 말인데”라고 합니다.“그것이 무엇입니까?”솔로몬은“이 또한 지나가리라”고 가르쳐 주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세상 것은 다 지나갑니다. 영광도 지나갑니다. 신약성경 베드로전서 1:24~25에 말씀하시기를“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영광의 날 교만하지 말고, 그 영광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려야 합니다.

반면 어렵고 힘든 고통도 지나갑니다.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0:13에 말씀하시기를“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피할 길을 예비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의 날 낙심할 것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키시며 그 시험을 지나가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거처로 삼고 계시는 성도의 심령은 어떠한 심령일까요?

소망이 있는 사람입니다.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을 자랑하는 마음입니다.
끝까지 견고히 잡는 마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처소로 삼고 계시는 심령에 행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소로 삼고 계시는 심령에 성공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소로 삼고 계시는 심령에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언제나 주님이 내 안에 계시기에 합당한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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