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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무엇을 기도할까? (마 6: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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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기도할까?  (마 6:9~15)   
 

우리 교회는 봄, 가을로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를 개최합니다. 
이 다니엘 새벽기도회 전통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3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우리교회의 신앙운동입니다. 
다니엘 새벽기도회는 연부년 부흥하는 우리교회 성장의 밑거름입니다. 
올해 봄철 다니엘 새벽기도회는 다음 주일 새벽부터(3월 22일) 4월 11일까지 21일 간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라는 주제로 진행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생활스케줄에 참고하셔서 꼭 참석하길 바랍니다. 
올해 유난히 가물어서 농작물에 피해가 심합니다. 
강수량이 적은 것도 문제였지만, 저수지 관리를 잘못한 것이 더 문제라는 지적이 있습니다. 
물을 충분히 저수해놓아야 하는데 그 관리를 잘못했다는 것이지요. 
영적 저수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 저수지에 물을 넉넉히 담아놓으면 살아가면서 이런 일 저런 일을 당할 때 당황하지 않고 적절하게 대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 저수지의 바닥이 드러나면 인생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한 바가지 물이 필요한데 바닥은 갈라져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기도는 영적 저수지에 물을 담아놓는 신앙행위입니다. 
이런 기회에 여러분의 영적 저수지에 물을 넉넉히 담아놓으십시오. 
그렇게 되면 누구나 다 당하는 크고 작은 인생의 곤란을 수월하게 넘길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의 권면을 귓등으로 넘기지 말고 마음에 새기십시오. 

‘후안 까를로스 오르띠즈’목사님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우리 기도의 대부분은 하늘나라에서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취급당합니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 글을 읽으면서 ‘그러면 무엇을 기도해야만 등기우편물처럼 소중하게 취급받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기도를 원하시는가?’ 
‘무슨 내용으로 기도해야만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가 될까?’ 
‘무슨 기도를 드려야 “옳다, 그것 참 좋은 기도구나.”라고 하면서 귀를 기울이실까?’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도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눅11:1절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 제자들의 요청으로 주신 내용이 오늘 본문인 ‘주의 가르친 기도’ 즉 ‘주기도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이 가르친 기도를 잘 이해하면, 하나님이 진정으로 받으시길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물론 갓난아기가 배고플 때, ‘어떻게 울면 엄마가 좋아할까?’ ‘어떻게 울면 엄마가 빨리 젖을 줄까?’ 따져가면서 울지 않지요? 
그냥 울어 젖힙니다. 
그러면 엄마가 알았다고 젖을 물립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무슨 내용으로 하던 우리에겐 먼저 기도하는 게 중요하지요!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나이가 40이 되어 밥 달라고 울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이번 ‘다니엘세이레 기도회’를 준비하면서 ‘주기도문’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이 주기도문을 잘 이해하셔서, 여러분의 기도가 ‘갓난아기의 막무가내는 울음’에서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기도’로 성숙되길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잡동사니 우편물처럼 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읽고 또 읽고, 보고 또 보는 등기우편물이 되길 바랍니다. 
그래야 되지 않겠어요? 

주기도문 중 하나님을 위한 기도 3가지는, 

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② ‘나라이 임하옵시며’, 
③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 3가지는, 
①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②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③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입니다. 
주기도문과 우리의 기도를 비교할 때, 우리 기도의 부족한 점은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위한 자리를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뜻에만 관심이 집중되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요구에 급급한 나머지,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앞세웁니다! 
하나님의 뜻을 우선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를 먼저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드린 다음,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오늘은 먼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기도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도록’ 간구하는 것입니다. 
‘거룩’이란 그리이스어로 하기오스 ‘hagios’인데, 이 말의 뜻은 ‘구별된다’(difference)는 것입니다. 
‘성도’는 ‘거룩한 무리’라는 말인데, 그것은 ‘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이란 뜻입니다. 
‘성일’은 ‘거룩한 날’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다른 날들과 구별된 날’이라는 뜻입니다. 
‘성전’은 ‘거룩한 집’이라는 말인데, 그것은 ‘다른 집들과 구별된 집’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나 질에 있어서 인간을 포함한 피조세계와는 전혀 다른 구별된 존재이십니다. 
잘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삶은 한시적이지만 하나님은 영원을 삽니다. 
인간은 가까운 것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멀리 봅니다. 
인간은 부분밖에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전체를 봅니다. 
다릅니다!  
전혀 다릅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 55:8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가 다른 말씀들은 제쳐두더라도 이 말씀 한마디만 확실히 믿는다면, 놀라운 삶의 변화를 경험할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 내 길과 다른 하나님의 길, 이 사실을 “아멘!” 하기만 한다면, 우리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그렇게 억울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고, 초조하지 않고, 낙담되지 않고, 속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게 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는, 이렇게 구별된 존재이신 하나님께 그것에 합당한 영광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시지만 (심지어 그 외아들까지 주셨지만) 그의 영광만큼은 주시지 않습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구약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데스 바네아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합니다. 뭐라고 불평하는가 하면, “이곳에는 파종할 땅도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민 20:5절)” 
이 ‘없도다!’하는 빈곤의식이 문제입니다! 
방송에서 한 정신과 의사가 이런 얘기를 합디다. 
“우울증 환자는 주변의 부정적인 상황을 확대하는 습관이 있고, 성공하는 사람은 주변의 긍정적인 상황을 확대하는 습관이 있다.” 
우리의 사고습관, 사고방향을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와 아론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 (민20:8절)” 
여기서 모세가 실수를 합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라 하고 그 손을 들어 그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매…(10-11절)” 
여러분 물은 누가 냅니까? 
모세가 냅니까? 하나님이 내십니까? 
하나님이시지요!  
그런데 모세는 마치 자기 자신이 물을 내는 것처럼 백성들 앞에서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이 모세의 행동을 민20:12절에서 하나님이 평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희가.......이스라엘 자손의 목전에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 너희는 이 총회를 내가 그들에게 준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Smith Goodspeed 라는 학자는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아니한 고로”를 “너희는 나에게 마땅한 영광을 주지 않고”라고 번역했습니다. 
즉 모세와 아론은 하나님께 마땅히 돌아가야 할 영광을 가로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서운 징계를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영광을 나누지 않습니다! 

신약에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행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헤롯이 왜 죽었습니까?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 앞에서 연설을 한 적이 있습니다. 
헤롯의 연설을 들은 백성들이 헤롯에게 아부하기 위하여 이렇게 너스레를 떱니다.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아부도 너무 지나쳤지! 
그런 얘기를 들었을 때 된 사람 같으면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합니까? 감히 인간을 하나님께 비교하다니…”라고 말을 하거나,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좋은 연설을 한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지요.” 이렇게 말을 했어야지요. 
그런데 행 12:23절에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은 영광을 나누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영광을 받을 만한 때에 조심해야 됩니다. 
즉 무명할 때 보다는 유명할 때에, 일이 잘 안될 때보다는 잘될 때에, 가난할 때보다는 돈이 있을 때에, 인기가 없을 때보다는 인기가 올라갈 때에 조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영광을 마치 자기 것인 양 생각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좋은 일이 있을 때 언제든지 “하나님의 은혜지요.”,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았다면 어림도 없지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면, 참으로 대단한 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복음성가-하나님 아버지의 마음 

2.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로마제국’이라고 하면, 로마의 황제가 다스리고, 로마의 법이 다스려지는 세계를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다스려지는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 마음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내 마음을 다스린다면 내 마음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가정을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가정을 다스린다면 우리 가정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사회를 다스리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사회를 다스린다면 우리 사회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완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다스림이 온전해진 세계를 우리는 천국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계를 사모합니다. 
그러면 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회개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회개해야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마 4: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리라” 
그러니까 회개는 천국의 전제조건입니다! 
‘회개’를 그리스어로 “metanoia”라고 하는데 한국말로 바꾸면 ‘방향전환’입니다. 
‘회개했다’하면 ‘방향전환’했다는 것이지요! 
삶의 방향전환을 하려면 3가지 차원에서 방향전환이 이루어져야 하는데, 

①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는 것(지적인 방향전환), 
②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으로 살아온 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정적인 방향전환), 
③ 이제 지금까지의 삶의 방향으로 사는 것이 싫어 새 방향으로 살겠다고 각오하는 것(의지적인 방향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내 뜻, 내 소원, 내 욕망대로 살아왔던 사람이 (그것이 삶의 유일한 목표이고 가치였습니다.) 방향을 바꾸고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소원대로 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이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고 울고 웃던 사람이 방향을 바꿔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그분 때문에 울고 웃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대만족이지요.”, “하나님 사랑이면 최고지.” 
지금까지 좋아하던 취미, 기호는 시들해지고 완전히 방향이 바뀌어 하나님의 말씀이 좋고, 교회가 좋고, 성도의 교제가 좋고, 찬송이 좋은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우리교회는 이런 메타노이아를 경험한 교우들이 많아 행복합니다. 

성도는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존재입니다. 
신 11장 10절 “네가 들어가 얻으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급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애급 땅에서는 농사를 지을 때, 씨를 뿌린 다음 나일 강만 바라보면 되었습니다. 
나일강변에서 물레방아 같은 것을 설치해놓고, 발로 돌려서 물만 퍼 올리면 농사를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11절에 보면, “너희가 건너가서 얻을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야 할 가나안 땅에는 강이 없습니다.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면 하늘을 쳐다봐야 합니다. 
하나님이 비를 내려주시면 사는 것이고, 비를 내려 주지 않으시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 성도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합리적인 사람들이 들으면, 얼토당토치도 않는 얘기지만 진실입니다. 
여기에 사는 길이 있습니다. 
회개란 땅을 바라보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으로 방향이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삶의 방향전환이 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다음 주일부터 다니엘 세이레 새벽기도회가 시작됩니다. 
‘새벽기도회’라는 거룩한 습관을 통해 영적인 성장을 이루길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라고 기도하듯이,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기 위하여 늘 “하나님의 은혜지요!” “하나님이 도우시지 않았으면 어림도 없지요!” 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새벽기도회’라는 거룩한 습관을 통해 영적인 성숙을 이루길 부탁드립니다. 
‘나라이 임하옵시고’라고 기도하듯이, 여러분의 삶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뤄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매사에 그분을 앞세우고, 매사에 그분을 인정하고, 매사에 그분께 감사드리고, 매사에 그분과 의논하십시오. 
땅만 바라보고 일희일비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며 참 평안을 누리는 인생대전환을 이루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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