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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지가 바로 저긴데 (수 5: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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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가 바로 저긴데 (수 5:1~12) 


옥스퍼드 대학의 맥그래스 교수가 쓴 ‘내 평생에 가는 길’이란 책에 보면 인생을 묘사한 한 구절이 참으로 제 마음에 와 닿습니다. 인생에 대해서 그는 ?짧고 상쾌한 산책일 줄 알았던 것이 미처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마라톤으로 바뀐다.? 어린 시절, 철이 없을 때는 인생이 부모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걷는 산책처럼 느껴지지 않습니까? 그러나 좀 더 걷다 보면 미처 준비가 안 된 채 달려야 하는 마라톤이 되어 버립니다. 이 마라톤을 달리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쳐 쓰러지고 탈락하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절망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는 인생길입니다.

요즘도 리더십을 위해 쓰여 진 책 가운데 꾸준히 읽히는 책 가운데 밥 포드의 「하프타임」이란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가운데 “성공추구에서 의미 찾기로 바꾸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공만을 찾아서 몸부림치는 인생의 신기루 같은 성공은 인생의 모든 가치를 파괴시키고 우리를 허무 속에서 떨게 합니다. 사람이 마지막이 가까울수록, 결산이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은 내가 얼마나 의미 있는 일에 내 삶을 바치며 살아 왔느냐 입니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느냐, 내 이름이 남느냐, 그런 것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 가까워질수록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서, 의미와 보람과 기회를 발견하고 “하나님, 정말 하나님이 주신 일 대문에 내 인생은 보람 있었고, 신바람 나고, 놀라운 인생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내 평생의 보람 있는 가치를 발견하여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그토록 원하였던 가나안 땅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들의 가는 길을 잠시 멈추게 만듭니다. 하프타임의 휫슬을 분 것입니다. 여러분, 가나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삶이 시작 되는 현장입니다. 과거의 삶을 떨쳐버리지 않고는 갈 수없는 곳이고 무엇보다 새로운 방식의 삶이 요구되는 시점에서 하나님은 세 가지 변화를 요구 하십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할례입니다. “그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너는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다시 할례를 행하라 하시며 여호수아가 부싯돌로 칼을 만들어 할례산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할례를 행하니라.”

생각해 보세요. 오늘 본문을 보면 천신만고 끝에 요단을 건넜습니다. 그것도 범람하는 강을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건넜을 때, 이스라엘의 사기는 하늘을 찌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추세라면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파죽지세로 밀고 들어갈 참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요단을 건넜다는 소식이 가나안 사람들에게 전해졌을 때, 가나안 백성의 반응은 ‘마음이 녹았고’ “정신을 잃었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뭐, 엄청난 충격과 공포에 쌓인 것입니다. 지난날 광야에서 행했던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두려움을 갖던 그들이 급기야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요단강을 건넜다는 소식에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야말로 가나안 땅의 첫 성인 여리고성을 공격할 최고의 기회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여호수아가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거나 아니면 요단강을 건넌 여세를 몰아 곧바로 진격 명령을 내리는 일이 아닙니까? 왜 하필이면 이 중요한 시기에 할례입니까?

1). 지금 하나님은 할례를 통해 이들이 구별된 백성으로의 자의식을 갖게 하십니다. 여러분, 할례가 무엇입니까?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할례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구별되었으며 이 표시를 통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생후 8 일만에 남자들은 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할례를 받았습니다. 물론 그 표시가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할례를 통해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나는 바르게 살아야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이를 통해 주님에 대한 온전한 신뢰의식을 갖게 하십니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그들이 있는 길갈에서 여리고 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비록 그들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두려움과 공포가 있는 것 사실이지만, 그들 앞에서 이스라엘의 장정들이 다 들판에 누워 외과 수술을 받고 있습니다. 그 광경을 왜 적군이 안보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만약에 전쟁터에서 여러분이 적군의 입장에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제 여러분이 싸워야 할 상대방이 모두 다 수술을 받고 드러누웠습니다. 얼마나 공격하기 좋은 기회입니까? 그렇다면 여리고 성의 공략을 앞둔 이 중요한 역사적인 시점에서 자기 백성들에게 외과 의술을 시행하는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할례를 받고 여리고 성 앞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태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파 누워서 적군을 쳐다 볼 때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이 때 적군들이 처들어오면 어떻게 됩니까? 꼼짝없이 죽는 것입니다. 별 수없이 이 상황에서 그들이 의지 할 곳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중요한 역사적 시점에서 백성들로 하여금 “이제부터는 전적으로 하나님만 의지해야한다”는 교훈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내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어 하는 자기중심적인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들입니다. 얼마나 자신의 잔꾀를 의지하고 내 수작을 의지하고 내 생각을 의지합니다. 결국 엎어지고 넘어져서, 좌절과 갈등과 혼란 속에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보십시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여 새로운 백성의 모습으로 새로운 땅을 살아야할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바쁜 걸음을 멈추게 하시고 자기 백성을 다 들판에 뉘여 놓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 죽은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황에서 그들이 의지할 것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희가 온전히 하나님을 의지하나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세상의 흉한 소식에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으로 들려오는 실직의 소리, 자살의 소리, 노동자들의 데모 소리, 정치가들의 서로 비난하는 소리, 이런 저런 소식에 조석으로 우리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세상의 흉흉한 소식에 그 마음이 쉽게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속에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의 약속의 말씀을 굳건히 믿고 의지하는 사람은 아무리 세상이 요동을 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젖 뗀 아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사람이 자기를 엄마의 품속에서 떼어가려고 할 때에, 엄마가 "응, 엄마 여기 있어. 엄마가 지켜줄게" 하면, 그 아이들은 두려움에 울다가도 엄마의 음성을 듣고 곧 울음을 그칩니다. 엄마를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엄마의 그 말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젖 뗀 어린아이와 같은 순전한 믿음, "주께서 말씀 하시오니, 믿고 감사하오며, 두려움 가운데서 오히려 찬양을 드립니다"라고 하는 고백이 있습니까?

둘째로. 할례를 행한 다음 그들은 무엇을 했습니까?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길갈에 진쳤고 그 달 십사 일 저녁에는 여리고 평지에서 유월절을 지켰고" 여기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이들 속에 하나님의 인도하심 앞에 견딜 수 없는 감격과 감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지난 40년 동안 자신들이 도대체 무엇을 했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의 그 사랑과 보호하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거지 근성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서운하고 마음에 안 맞으면 불평하고 원망했던 생활이 광야 생활입니다. 그래도 자기들이 잘난 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깨달은 것입니다.

그래서 유월절을 지키는 것입니다. 유월절을 지켰다는 것은 애굽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뻐하는 일이요, 죄로부터의 용서를 축하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일입니다. 이는 구원받은 성도의 감사가 묻어 있습니다. 유월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어린양의 고기와 누룩이 들어 있지 않은 떡을 먹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무서운 노예의 쇠사슬에서 건져 주셨는지를 나누면서, 그 은혜를 다시 한번 기억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그만큼 유월절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고 감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뭐, 우리 역시 예배시간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사실을 확인하는 것! 이것이 또 하나의 승리의 비결입니다. 이 감격 속에 살 때, 불평과 불만이 있을 수 없고 시기와 질투와 분쟁이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감사와 찬송과 넘치는 사랑이 있을 따름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임을 믿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합니까? 가장 기본적으로, 우선적으로 감사해야 될 것은 나 같은 죄인을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구원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그 생명이 코의 호흡에 붙어 있는 하루살이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없는 원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우리의 죄를 그에게 담당시키사 십자가에서 돌아가게 하시고, 그 위에서 방울방울 흘리신 보혈의 피로 우리의 모든 죄를 말끔히 씻어 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무조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름 지으시고, 언제든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하나님,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하나님 나라와 영생을 우리에게 값없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간 나와서 예배하는 영광스러운 백성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은혜가 아닙니까? 생각할 때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이 나 같은 것을 아신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아무것도 하나님 마음에 드는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값없이 영생을 주셨다니 기가 막히는구나.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해주시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구원의 감사가 기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12절에 보면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 여기 만나가 그쳤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할례와 유월절 의식을 거행함과 동시에 하나님은 만나를 그치게 하셨습니다. 만나가 무엇인가? 풀 한 포기 없는 광야를 40년 동안 헤맬 때, 2백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굶어 죽지 않도록 하나님이 매일 하늘에서 내려 주시던 양식이 아닙니까? 만나는 히브리어 ?만-후?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만-후는 출16:15절에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내려주신 떡을 보고 신기해하면서 서로 물었습니다. ?이게 뭐지?? “이게 뭐지?? 그러다가 그 이름이 ?만나?가 된 겁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농산물을 먹을 때까지 무려 40여 년간 아침마다 하늘에서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여러분, 한번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그때 하루에 내려주신 양식의 분량이 얼마나 될까? 제가 엉뚱한 생각이 나서 우리의 식습관을 비교해 보았는데, 여러분도 실감이 날 겁니다. 보건복지부 통계를 보니까 한국인이 하루 평균 1,048 그램(약 1 킬로그램)의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그들이 배불리 먹었으니까 대충 그 정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인구가 장정만 60만이니까 전체 인구를 추산하면 대충 200만 명 정도가 됩니다. 1인당 하루 식량을 1kg로 환산하면 하루 200만 kg 즉 2,000 t이 됩니다. 10t 대형 트럭 200대 분입니다. 이렇게 많은 분량을 매일 쏟아 부은 겁니다. ?40년×365일?로 환산하면 천문학적인 숫자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을 하루도 굶기지 않으셨습니다. 한 마디로 기적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들어선 다음에는 매일 아침 내리던 만나가 보이지 않습니다. 늦잠을 자서 해가 뜨겁게 쬐므로 녹아버린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아침 일찍 일어나도 더 이상 만나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제 이들이 굶어 죽어야 합니까? 결코 아닙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지금까지 계속 만나를 내리셨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으리라고 예상하십니까?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밤낮 하늘만 바라보면서 만나가 내리기를 기다렸을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하늘을 향해 입만 벌리는 일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이제는 땀을 흘리고 수고하면서 자기가 먹을 양식을 거둘 때입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는 기적을 끝내시고 “네 손으로 일하라 땀흘려 일하라. 노력하라. 벌어라, 네가 나의 은혜를 의지하여 지금까지 만나를 통해 나의 주권과 나의 전능함을 알았으니 이제는 네 삶에 있어서 네가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내가 보기를 원하노라” 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들은 눈을 들어 멀리 들녘을 바라봅니다. 아침 햇빛에 황금물결 춤추며 무르익은 곡식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곳에 살던 가나안 사람들이 간담이 서늘하여 버리고 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늘 본문 12절에서 보는 것처럼 그 땅 곡식을 추수하여 먹게 됩니다.

여러분 만나가 그쳤다고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적이 안 일어난다고 신앙을 하나님을, 말씀을 의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나가 그쳤다고 혹시 하나님이 버리시지는 않았는지... 불안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직장이라고 다니면서 매달 먹고 살 만큼의 만나를 공급받아서 살아왔는데 어느 날 그 직장을 그만 두어야 하는 일이 생기고,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오손 도손 기쁘게 살아왔는데 어느 날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사업이 빚더미위에 깔려 모든 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평생을 먹고 살아오던 만나가 그쳤을 때에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그 땅에 “소산물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만나가 그칠 때에 이제는 어떻게 하나? 하면서 근심스럽지만 바로 그 때에 우리는 준비해 두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새롭게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그 동안 다니던 직장을 잃었습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까? 사업이 잘 되지 않아서 나에게 만나가 그친 것 같은 아픔과 불안이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만나가 그치던 날 하나님은 그 땅에 소산물을 이미 준비해 두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는 막 추수철이 시작되었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가나안 땅 어디에서나 풍성한 곡식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가나안 사람들이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워했기 때문에 곡식 구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인도하시는 타이밍은 기가 막히게 정확합니다. 추수철이 아닌 때에 가나안에 들어왔다면 이스라엘은 계속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필요로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확하게 추수철에 들어오게 하심으로 양식 문제를 깨끗하게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 그리고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간에 전혀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나가 그칠 때에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 인줄로 믿고 믿음으로 승리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의 방법을 거두어 가실 때는 반드시 또 다른 방법으로 준비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변함없이 돌보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변하고 온 천지가 다 변한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다가 우리의 뜨겁게 뛰는 심장이 그 고동을 멈추어도 변치 않으시는 분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의 사랑이 있기에 우리는 든든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롬8:37절에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 그분이 계시기에 우리는 넉넉히 이깁니다. 이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염려하거나 실망하거나 낙심하지 아니하고 감사하면서 살아가시는 여러분의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만나가 그쳐도 , 기적적인 방법이 없어도, 때로는 일반적인 방법 가나안 땅에서 농사지은 열매를, 우리의 소산들을 통하여 먹여 주시고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눈앞에 큰 일 안 뵈어도 약속의 땅 가나안에 서 있는 우리들을, 광야에서 기적만이 아닌 변함없는 그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아 주실 줄 확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모두 축복에 익숙해지면 축복을 축복으로 바라보는 마음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족하고 불편한 가운데서도 이미 주신 축복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들은 고난을 넘어서는 새 역사를 창조할 수 있습니다. 동화작가 안델센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본래 구두고치는 가난한 아버지와 남의 집에서 빨래하는 어머니슬하에서 자랐습니다. 얼마나 가난했느냐 하면 그가 태어났을때 아기침대가 없어서 어느 부자가 장례식장에 갔다버린 평상을 개조해서 아기 침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안델센의 아버지는 알콜 중독자이어서 매일밤 술에 취해 돌아와 아들의 뺨을 때리곤 했습니다. 그는 단 한 시간의 문학수업도 받지 못한 초등학교 중퇴생 이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자라나며 어떻게 그리도 아름다운 동화를 쓸 수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후일 이런 대답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나는 나의 불편한 환경속에서도 베풀어진 축복을 붙들기로 했습니다. 나는 비록 아버지가 무서운때도 많았지만 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기를 즐거워했고, 나의 가난한 다락방에 누워 상상하기를 즐거워 했습니다. 나는 나의 아버지가 여전히 좋은 분이라고 믿었고 나의 가난한 집을 나의 축복이라고 믿었습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역경은 나의 축복이었지요. 나는 가난했기에 '성냥팔이 소녀'를 쓸수 있었고, 내가 못생겼다고 놀림 받았기에 '미운 오리새끼'를 쓸수가 있었지요." 그렇습니다. 광야 길에서도 여전하신 주의 축복을 기억한다면 우리도 원망의 이야기를 사랑의 이야기로 바꾸어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하여 여호수아의 신앙의 자세를 배워야만 합니다. 첫째 마음의 할례를 행하고, 둘째 주님과 교제하는 영적인 유월절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에 만나가 그칠찌라도 또 다른 하나님의 손길이 있음을 알고 그 하나님을 신뢰하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애송하는 복음송 중에 「오 신실하신 주」라는 노래가 있죠. 그 노랫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시킨 적 없으시고 /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 오 신실하신 주 오 신실하신 주 /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이 노랫말이 우리의 신앙 고백이 되기 바랍니다. 입술만의 고백이 아니라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서 나오는 진심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광야 같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늘 평안한 마음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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