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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현실을 정확히 압시다 (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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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정확히 압시다 (룻 1:1~5) 

 
사사가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던 시대입니다. 이스라엘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베들레헴에 사는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땅으로 갑니다. 흉년을 모면하려고 모압 땅으로 간 것입니다. 거기서 엘리멜렉이 죽습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모압 여자들을 아내로 취합니다. 그런데 이 두 아들마저도 모압에서 죽고 맙니다. 이제 엘리멜렉의 부인 나오미와 두 며느리만 남습니다. 남자 셋은 다 죽고 과부만 셋이 남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정말로 기구한 인생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질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진찰이 필요합니다. 이 질병이 전염이 된 것인지, 유전적인 요인인지, 식생활 문젠인지, 환경적인 요인으로 온 것인지, 다양한 면에서 그 질병의 원인을 분석해 보는 접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문제 해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문제를 바로 해결하기 위해서 왜 그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는가 하는 정확한 진단이 필요합니다. 즉 정확한 원인 분석이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보면서 한 유대인 가족이 모압에 들어갔다가 참 어려운 일을 당했구나 하면서 하나의 역사적인 사실로,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만다면 오늘의 메시지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는가, 우리가 정확하게 진단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할 때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게 될 뿐만 아니라 나에게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면, 이것을 벗어나고 해결할 수 있는 해법을 제공하게 됩니다.

엘리멜렉 가족이 이렇게 어렵게 된 이유는 선택의 잘못에 있었다는 사실을 진단할 수가 있습니다.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이라는 땅으로 간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 선택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1. 현실적인 상황만을 고려한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베들레헴에는 흉년이 있었습니다. 이 흉년을 벗어나서 좀 더 풍요로운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들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곡식이 풍성한 모압으로 가자고 결정을 했던 것입니다. 모압으로 이주하는 문제는 단지 지리적, 문화적 혹은 경제적인 문제만 걸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들은 잘 알았을 것입니다. 바로 신앙적인 문제가 걸려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보호하시려고 이방 나라와 섞이는 것을 엄격하게 금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모압은 사실상 이스라엘에게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였을 때 집요하게 방해를 하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모압 사람들입니다. 더군다나 모압 사람들은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섬기던 족속이고 도덕적으로도 상당히 부패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분명히 눈앞에 보이는 것은, 베들레헴에는 굶주림과 고통이 있고 모압 땅에는 풍성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살 길을 찾아 나섰습니다. 사람들은 “사람은 우선 살고 봐야 한다.” 고 말합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올바른 것인가 하는 이 부분에 대해서 깊이 있게 고려를 하지 않는다면 복구할 수 없는 엄청난 더 큰 어려움에 처할 수가 있습니다.

인간의 눈앞에 보이는 당장 살 것같이 보이는 길이 진정 사는 길이 아닐 수가 있습니다. 성경의 끝없는 외침은 그 세상의 신기루에 속지 말라는 것입니다. 삶의 진정한 기회는 하나님의 품 안에 있는 것이지 하나님의 품을 떠나는 것에서는 살길이 없다는 것을 성경이 끝없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살려고 나간 가족에게 찾아 온 것은 죽음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도 죽고 기둥 같은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잠시 살길 찾아 나선 길이, 이방 땅에 머물면서 죽음의 아픔과 고통 속에서 지낸 십여 년의 세월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인생의 기로에서 살 길을 찾으십니까? 그러면 육신적인, 눈에 보이는 계산으로 길을 선택하지 말고 신앙 안에서 믿음의 계산으로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계산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뜻을 순종하면 가장 좋은 길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 섬기는 것을 팽개치고 물질적인 것, 육신적인 것 먼저 택하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사는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사는 길을 선택해는 기준이 무엇이어야 합니까? 당장의 물질의 풍부나 육신의 편리나 삶의 안일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만약 내가 이렇게 결정을 내린다면 내 신앙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는 진지한 고려 속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합니다.

또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선택보다는 나의 삶, 생애 전체를 내다보는 안목 속에서 선택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당장 배가 고픈데 어떻게 합니까? 당장 사업이 위태위태한데 어떻게 합니까?” 물론 절박한 물음이지만 “이것이 내 삶의 전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내 삶이 끝나는 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이 선택을 잘했다고 할 수 있는가?” 하고 물어보고 선택하는 것이 살 길입니다. 

예수님이 40일을 굶으셨을 때 마귀는 당장의 해결책으로 유혹하였습니다.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님은 그 굶주림 가운데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사람에게 떡이 필요한 줄 아셨습니다. 그러나 떡만 생각하는 길이 당장 살 길인 듯 보여도 진정으로는 살 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 따라 사는 것이 삶 전체, 아니 영원한 운명에서 볼 때 더 살 길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 하시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우리의 진정한 살 길임을 명심합시다..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더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2. 진정한 기준이 상실되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눈앞에 벌어진 상황으로만 판단하려는 삶은 곧 삶의 기준을 상실한 것으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법을 잘 알고 있을 엘리멜렉의 가족이 왜 그 법을 어기고 이방나라인 모압으로 갔을까요? 그 답은 이 본문의 첫 마디의 단어에 있었습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지금의 배경은 사사 시대입니다. 사사 시대는 기드온이나 삼손 같은 이스라엘의 영웅들이 나오는 시대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이스라엘의 가장 극심한 타락이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그 시대를 기록한 사사기는 이런 타락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이렇게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각 그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삿21:25). 

여기서 말하는 왕이 없었다는 말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아직 왕정시대가 아니었다는 말이 아니라 궁극적인 왕이신 하나님조차 저버렸다는 것입니다. 일체의 권위를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의 대리자인 지도자도 거절하였습니다. 왜입니까? 자기 마음대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찾아온 것은 기근과 굶주림입니다. 아니면 이웃나라의 침략으로 모든 것을 다 빼앗겨 버렸습니다. 사사기의 내용은 영웅들의 통쾌한 승리를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불순종과 그 징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베들레헴의 기근도 그 징벌 중 하나일 것입니다. 원래 이 땅은 기름진 곳이고 농사가 잘되는 곳입니다. 성경은 종종 사람이나 도시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고 거기에 상징적인 뜻을 담도록 하였습니다. 유다라는 지명의 뜻은 '찬양'이란 말이요,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말이요, 에브랏은 (에브라다) '수확이 많다.' 라는 말입니다. 찬양이 가득한 수확이 많은 떡집입니다. 이들이 살고 있던 시대 곧 사사시대의 패역과 죄악 때문에 기근과 배고픔이 있고 찬양대신에 불평의 소리가 가득해 져 버렸습니다. 

엘리멜렉과 나오미가 택하는 방식도 사사시대의 어두운 영의 상태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왕도 없고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선택하는 것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다. 삶의 기준이 없습니다. 기준이 있다면 오직 자기 생각입니다. 삶의 기준이 없고 자기 계산만이 있는 삶, 이것이 죽음의 길을 살길로 착각한 원인입니다. 사람에게 삶의 기준이 없으면 막상 급한 일이 오면 누구나 자기 생각에 눈앞에 보이는 살 길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대부분 살 길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여러분에게 삶의 기준이 있습니까? 내 소견에 좋은 대로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순종해야 할 기준이 있습니까? 그것이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의 원래 이름은 캐논입니다. '캐논'의 의미는 '잣대'라는 것입니다. 삶의 잣대 기준입니다. 내 소견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견을 밝혀 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면 살 길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서도 막상 문제 앞에서 하나님 말씀 보다는 내 소견에 살 길로 보이는 것을 붙들면 살 길이 아니라 죽을 길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명을 주신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살 길을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리의 삶을 제한하는 딱딱한 감옥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기쁨과 평안을 유지하도록 하는 안내서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인 시편 119편의 첫 절이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행위 완전하여 여호와의 법에 행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그리고는 그 하나님의 법이 자기 인생에 큰 즐거움이 된다고 계속 고백하고 있습니다. (24)"주의 증거는 나의 즐거움이요”, (35)“나로 주의 계명의 첩경으로 행케 하소고 내가 이를 즐거워함이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서 그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으로 우리는 원수보다 모든 스승보다 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98-100). 그 말씀은 내 발의 등이 되어주고 내 길에 빛이 되어 줍니다 (105). 하나님의 말씀만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부족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움이 찾아 왔을 때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을 감당하고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때에 엘리멜엑의 가족은 그 믿음을 갖지 못했습니다. 먼저 알 것은 신앙인에게 고난이 없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흉년이 없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흉년은 찾아 왔습니다. 이삭에게도 야곱에게도 흉년은 있었습니다. 흉년은 베들레헴에도 찾아오는 것입니다. 

신앙인에게 흉년과 같은 고난-경제적 흉년이든, 인간관계의 흉년이든, 건강의 흉년이든-은 여러 이유로 찾아옵니다. 우리의 계속되는 범죄로 인한 하나님의 징계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이 계속 어두움 속에서 살아갈 때 사랑의 매를 드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의 진실을 확인하는 시험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런 시험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신앙이 확인될 뿐만 아니라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의 갈등을 멈추고 확실히 하나님 편으로 돌아서기도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한 차원 깊은 헌신으로 이끄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세상 소망의 헛됨을 체험하게 됩니다. 

엘리멜렉 가족에게 찾아온 흉년의 이유는 잘 모릅니다. 사사시대의 만연한 죄에 대한 징계일 수도 있고, 엘리멜렉 가족의 순종하는 삶에 대한 시험일 수 있고, 혹은 불신앙과 부도덕의 환경 속에서 그 가족의 삶의 연단하고 정화시키고자 하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그 고난을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증거가 무엇입니까? 후에 우리가 살펴볼 보아스 같은 사람입니다. 동일하게 흉년은 찾아왔건만 보아스 같은 사람은 흔들리지 않고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하고 있는 흉년들이 무엇입니까? 경제, 자녀, 부모 형제 등 가족, 건강, 인간 관계, 직장 혹은 사업? 그리고 그 원인은 무엇입니까? 징계입니까? 시험입니까? 아니면 훈련입니까? 각자의 형편에 따라 가지각색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적인 것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있기에 하나님이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고전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너희로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우리가 그 고난을 잘 감당하고 견디어 내면 이전보다 더 온전한 신앙과 삶의 자리에 들어갑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이여 내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그 고통과 환란 속에서 그것을 감당하게 하실 분으로 주님을 믿습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능하신 하나님을 여러분의 구체적인 고난과 시험 앞에서 믿으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겨질 결과는 어두운 것들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을 보면서 엘리멜렉 가정의 엄청난 결과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진단해 보았습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어려움이 없습니까? 그렇다면 우리 자신을 이 말씀에 비추어서 진단을 해 보아야 합니다. 자존심이 상하고, 부끄럽다 할찌라도 냉철하게 우리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합시다.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만 치유가 있게 됩니다. 회복이 있게 됩니다. 마라의 쓴물이 단물로 바뀌어진 거와 같은 회복 말입니다. 나는 저주를 받았다고 한숨을 지었던 나오미가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을 가슴에 안고 양육하는 복된 여인으로 회복되는 은총이 저와 여러분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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