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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문제를 넘어 기대를 갖게 하는 교회 (고전 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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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넘어 기대를 갖게 하는 교회 (고전 1:1~9)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제일 처음에 주시는 복은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닙니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만났을 때 제일 처음에 주시는 일차적인 복은 삶의 기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그와 같은 삶의 기회를 주시기를 원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은 언제나 기회로 환산됩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삶의 또 다른 기회로 주시기를 원한다는 마음, 그런 은혜의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누구도 맑은 날과 비오는 날을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의 다가오는 평안의 날과 슬픔의 날을 어느 누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비록 세상의 권세와 권력을 다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 밀려오는 슬픔의 날과 기쁨의 날을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날씨는 내가 마음대로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없다고 할 지라도, 놀라운 것은 내 마음의 날씨는 내가 결정할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벼락이 쏟아져도 내 마음은 청청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바깥 날씨가 그렇게 청청 해도 내 마음에 벼락이 쏟아지고 우박이 터지면 형편없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극한의 슬픔이 파도처럼 엄습해 올 때에 무서운 삶의 수레바퀴에 짓밟히고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바퀴에 엉켜서 같이 돌아갈 때도 있습니다.  패배하고 파멸 당하는 때가 있습니다.  대개 이런 슬픔의 무서운 바퀴에 찍혀서 밑으로 한없이 말려 들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퀴를 타고 위에 올라가서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신앙의 사람들이라는 것이 누구입니까?  바퀴에 짓밟혀서 패배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퀴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더 높은 비전을 향하여 올라가는 사람입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영으로 독수리처럼 내 영혼들이 올라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심령들이 더 높은 꿈과 비전을 향하여 올라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 이곳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나오면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희망이 있습니다.  주님 품에 오면 무엇이 있는지 아십니까?  희망이 있습니다.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인생의 슬픔들을 어떻게 이겨나갈 것인가?  슬픔이 파도처럼 엄습해 올 때에도 우리가 먼저 기억나는 것은 하나님의 품에 오면, 하나님의 의로움을 믿는 자에게는 희망이 있다고 하는 믿음이 와야 합니다.  생명을 다해 힘차게 믿을 수 있는 믿음이 와야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누구에게나 환난도, 곤고함도 찾아옵니다.  핍박도, 기근도, 불신도, 위협도 성난 파도처럼 우리를 찌르고 달려듭니다.  그러나 우리가 힘차게 외칠 수 있는 말은, 사망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내게 나타나고 있는 예수의 사랑을 끊을 수 없다!  이 위대한 믿음, 이것을 우리가 탐내야 됩니다.  이 위대한 믿음을 선택해야 됩니다.  오늘 우리가 성난 파도와 맞설 때 우리가 갖출 수 있는 최고의 무기는 바로 이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주여, 나에게도 이 믿음을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의 형편이 어떻든, 우리의 건강이 어떻든, 어디를 가서도 희망을 얻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것 하나만은 기억하십시오.  우리 주님은 희망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인류의 희망이십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슬픈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슬픈 일을 절대로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은 사람도 이 땅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슬픈 일을 당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는 사자처럼 사탄이 우리를 괴롭게 합니다.  크고 작은 문제들이 겨울 파도처럼 우리를 떨치려고 난리를 칩니다.
 
한 파도가 지나가면 또 다른 파도가 옵니다.  한 고민이 지나가고 나면 또 다른 고난이 다가올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라도 하나님의 품에서 새 길을 얻을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우리의 소망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는 없습니다.  인류의 소망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나라의 소망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집안의 소망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내 자녀들의 소망도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이 모인 이곳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디를 가도 희망이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삶의 진정한 희망을 찾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삶의 용기를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심령들이 이곳 하나님의 교회에 와서 진정한 삶의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 하나님의 교회는 분노와 원한이 사랑과 용서로 거듭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이곳 하나님의 교회는 슬픔과 절망이 기쁨과 희망으로 거듭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영혼들에게 진정한 안식처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에게서 최소한 이런 소리를 들을 수는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는지, 또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나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이 교회에 가니까 희망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세상 어디를 가도 희망이 없었는데, 그 교회에 나가서 보니까 희망이 생겼더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땅의 하나님의 교회는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하나님의 교회는 그러한 모든 문제를 넘어서 세상 사람들에게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해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땅에서 문제가 없는 완벽한 교회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교회도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가 있어야 교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교회는 문제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문제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면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교회는 그 문제를 넘어서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기록된 고린도전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거의 마무리 할 무렵에 고린도 교회와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쓴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2차 전도 여행 도중에 고린도에서 약 1년 6개월 동안 있으면서 복음을 전하고 세워진 교회였습니다.  많은 방해를 받았지만, 많은 핍박을 받았지만 동시에 많은 열매가 있었습니다.
 
이 문명의 도시, 이 죄악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에서 바울은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열매를 주셔서 고린도 교회가 탄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에게는 참으로 많은 애착이 가는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에 있을 때에 그 고린도 교회로부터 어떤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본문 11절의 말씀입니다.  다같이 11절을 같이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그러니까 지금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겁니다.  지금 바울은 멀리 에베소에서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분쟁에 관한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굉장히 가슴 아픈 소식을 듣고 있습니다.  바울은 지금 고린도 교인들간에 다툼과 싸움이 있다는 소식을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으로 듣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목회자는 우리 교인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킨다, 싸운다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괴롭습니다.  가슴이 미어 터지는 것 같습니다.  성도는 싸우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 교회 교인들이 서로 싸우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제가 보았을 때 지금 우리 교회는 화목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저마다의 성품과 살아온 삶의 배경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 일을 하다보면 의견 대립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소한 의견으로 싸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교회가 싸우고 갈등을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우리 모두를 위해서도 화목하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부모의 심정과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자식들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서로 싸울 때, 그 모습을 바라보는 부모의 가슴은 찢어지는 아픔일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비단 이 문제 뿐만은 아니지만 이 분쟁의 문제를 포함한 그 밖의 여러 가지 문제들의 소식을 듣고 바울은 그들에게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구체적으로 고린도전서 안에는 더 자세하게 나누면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만 크게 10가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 문제는, 1장에서 4장에 기록된 분쟁에 관한 문제입니다.  두 번째는, 5장에 나오는 음행의 문제이고, 세 번째는 6장에 나오는 법정 송사의 문제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문제를 가지고 그리스도인들끼리 세상 법정에 가서 호소하는 은혜롭지 못한 문제가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습니다.  네 번째로는 6장에 나오는데 그 밖의 여러 가지 성적인 범죄들에 대한 문제입니다.  다섯 번째로 7장에 가면 결혼 문제가 나옵니다.
 
그리고 여섯 번째로 8장에 가면 제사음식의 문제가 나오고, 일곱 번째로는 11장에 예배를 둘러싼 질서의 문제가 나옵니다.  여덟 번째는 12장부터 14장까지에서 우리가 어떻게 은혜를 받을 것이며, 어떻게 은사를 사용할 것이냐에 대한 영적인 은사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15장에 가면 부활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6장에서는 선교를 둘러싼 연보의 문제, 헌금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열 가지 문제들을 다루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기 위해서 쓰여진 편지가 바로 고린도전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다면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고자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3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무엇보다도 이천년 전에 존재했던 고린도 교회가 오늘의 현대교회와 그 상황이 너무 닮았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한마디로 말하면 세속화의 위기 속에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이것은 세속화의 위기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오늘 현대 교회와 너무나도 비슷한 상황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입니다.
 
1세기 이후에 어떤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 '고린도인과 같다'라고 말을 하면 그것은 아주 저주스러운 말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아주 부도덕하다, 행동이 선하지 못하다, 악하다고 했을 때에 고린도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세속화된 도시였습니다.  이 세속화된 도시 안에 있었던 고린도 교회도 그 세속화의 위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죄 많은 도시 속에 있었던 죄 많은 교회, 그것이 바로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오늘의 교회의 모습, 오늘의 교인들의 상태를 좀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두 번째는,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문제없는 교회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스펄전 목사님께 어떤 젊은이가 찾아 와서 이런 요청을 합니다.
"목사님, 저는 교회 생활에 늘 시험을 받고 지쳐 있는데, 좀 문제없는 완전한 교회를 하나 소개해 주세요."
그때 스펄전 목사님이 이 청년을 향해 빙그레 웃으면서 이런 유명한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자네가 혹시 그런 교회를 찾으면 나에게 꼭 알려주게.  나도 그 교회에 가서 그 교회 교인이 되고 싶네.  그러나 자네는 말이야, 그런 교회를 찾거든 자네만은 절대로 그 교회에 속하지 말게"
"왜요?"  그러니까 스펄전 목사님이 대답을 합니다.
"자네가 끼면 그 날부터 그 교회의 완전은 깨질 테니까 말이야.  바로 자네 때문에 말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서 형성하는 공동체는 언제나 문제들이 있습니다.  문제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허구적 이상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있을 수 있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느냐?  이런 교훈을 받기 위해서 우리가 본문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고, 지역 사회로부터 기대를 이루는 은혜로운 교회가 되기 위해서 본문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단순히 문제를 극복한다, 이것은 소극적인 것입니다.  문제를 극복하는 것은 중요한 과제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러나 문제만 극복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적극적으로 그 문제를 넘어서서 어떻게 교회가 교회다운 구실을 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교회가 지역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느냐?  그래서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가 되느냐? 이것이 우리의 관심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기대를 이루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고린도라는 교회를 함께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가 이런 문제들을 극복하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있을 수 있는 교회 안 밖의 문제들을 넘어서서 정말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 지역 사회로부터 기대를 갖게 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하나님이 쓰시는 참된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놀라운 은혜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은혜를 받은 사람다워야 합니다.  은혜 받은 자다워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거룩한 삶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받은 은혜를 망각하면 배은망덕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은혜를 빌고 있습니다.  그리고 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서 우리가 어떤 자들인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2절에 보면, 고린도인은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흔히 쓰는 도덕적인 의미에서의 거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깨끗하여진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성도'란 다른 말로 하면 구별된 존재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그 순간 우리는 구별된 존재가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다른 구별된 존재,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하는 구별된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성도라는 표현은 어떤 도덕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성도라는 것은 우리의 새로운 신분과 위치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묻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성도입니까?  확실하게 대답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진정 성도입니까?  정말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성도입니까?

어떤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어느 날 시찰을 하는 가운데 다리 밑에 있던 똑똑하게 생긴 거지 소년을 만나게 됩니다.  그 거지 소년이 어쩐지 마음에 들어서 그를 데리고 군중 안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만조 백관들 앞에서 선포를 했습니다.
"이 소년을 오늘부터 나의 양자로 삼겠노라"
그러면 그 날부터 이 소년은 거지입니까?  왕자입니까?  왕자입니다.  밤에 잘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년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시녀들이 쫓아갑니다.
"왕자님, 왕자님, 어디에 가십니까?"
"아, 저는 본래 거지라 제가 자는 데는 저 다리 밑에 있습니다"
시녀들이 말립니다.
"아니예요, 왕자님, 왕자님이 주무시는 곳은 이 궁궐에 따로 있어요"
그 이튿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또 이 소년이 바깥으로 나가려고 합니다.  시녀들이 쫓아갑니다.
"왕자님, 왕자님, 어디에 가십니까?"
"아, 저는 본래 거지라 제가 세수하는 곳은 저기 개울가에 있습니다"
시녀들이 또 말립니다.
"아니예요, 왕자님, 왕자님이 세수하는 곳은 여기에 있어요"

여기에서 제가 질문 하나를 하겠습니다.  하루아침에 왕자가 된 과거에 거지였던 이 소년이 왕자다운 행동을 하려면 나는 거지다라는 의식이 필요합니까, 아니면 나는 왕자다라는 새로운 의식이 필요합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왕자다.  나는 왕자니까 왕자는 어디서 세수해야 하지? 왕자는 어디서 자야 하지? 왕자는 어떻게 걸어야 하지? 이런 생각을 할 때 왕자다운 행동이 나올 수가 있는 겁니다.  그런데 자꾸만 나는 본래 거지였으니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습니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믿는 순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의인이 된 겁니다.  여러분은 의인입니까, 아닙니까?  자신이 없습니까?  의인입니까, 아닙니까?  이것에 대해서 제대로 대답을 못하면 큰일납니다.
 
의인이라는 개념이나 성도라는 개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 내가 과거에 무슨 행동을 했느냐와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된 것입니다.  성도가 된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신분이고 새로운 위치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나는 의인이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의인다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저는 이것이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교회에서 집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집사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로가 되었으면 장로다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장로가 평신도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 교회는 바람 잘 날이 없습니다.
 
이것을 역으로 말씀드리면, 내가 장차 교회의 장로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스스로 장로의 자격을 갖추어가야 합니다.  권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권사의 자격을 갖추어가야 합니다.  집사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이름에 걸 맞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직분을 사모하시기를 원합니다.  직분만큼이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직분을 사모한다면 그 직분에 걸 맞는 삶을 사십시오.  집사가 되어서도 평신도 같은 생활을 하면 잡사가 됩니다.  권사가 평신도 같은 생활을 하면 권투사범이 됩니다.  기억하십시오.  직분에 걸 맞는 삶을 살지 못하는 평신도는 병신도입니다.  이것은 저의 말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오늘 고린도 교회와 교인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의인이 되고, 성도가 된 것은 우리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삶을 사는 성도가 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그리스도의 증거를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본문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리스도의 증거가 너희 중에 견고하게 되어"

복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받아들임으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받은 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책임이 된 것입니다.  저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셨다고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는 순간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내가 믿는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본문 5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는 너희가 그 안에서 모든 일 곧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언변을 주시고 지식을 주셔서 그리스도를 잘 증거하게 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우리의 삶이 온전한 삶이 되려면 그리스도의 증거를 더 견고하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저 단순히 교회에 왔다갔다하는 것으로 우리의 믿음이 견고해 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증거해야 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증거할 때에 우리의 믿음은 견고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견고하게 한다, 어떤 의미에서 견고하게 합니까?  저는 그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5절에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잘 증거할 수 있도록 언변도 주시고 지식도 주셨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말의 능력과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견고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좋은 언변을 가지고 열심히 복음을 풀어서 잘 설명해주지만 내 삶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그 증거는 무력해집니다.  힘이 없습니다.  삶이 따라가지 않는 전도, 그것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욕되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하게 되는 많은 내용들은 너희들의 삶이 거룩해져야 이 증거가 더 견고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으로 복음의 증거가 더욱 견고하게 되어지기를 축복합니다.

본래 고린도 사람들, 특별히 그리스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언변과 지식이 뛰어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유명한 철학자를 낳은 철학의 후예들입니다.  지금도 그리스 사람들이 말을 아주 잘한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를 믿었고, 성령의 은혜를 받았을 때 얼마나 복음을 더 잘 말했겠습니까?  그런데 풍부한 언변과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에게 결정적으로 취약했던 것은 그들에게 그것을 뒷받침해 줄만한 삶이 없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없이는 결코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 복음에 대한 증거는 견고해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문제를 넘어서서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려면, 그래서 이 지역 사회로부터 기대를 받는 교회가 되려면 우리의 삶으로 복음의 증거가 뒷받침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성령의 은사를 헛되이 말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6장 1절에 보면 그 말이 문자 그대로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라.  이미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은사를 받았습니다.  죄 많은 도시에 있었던 죄 많은 교회였지만, 또 이상하게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성령의 많은 은사를 체험하고 있었던 교회였습니다.  우리는 7절에서도 그런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본문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그렇습니다.  그들은 부족함이 없는 여러 가지 풍족한 은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성령의 은사들을 가지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감당하므로 주님이 오실 때 부끄럼 없이 주님 앞에 설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의 말씀입니다.  8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이유는 그 은사를 가지고 요술을 부리라고 준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드러내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은사를 가지고 이웃들을 돕고, 내 삶도 더 견고하게 하고 그래서 주님 다시 오실 때 부끄럼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성도로 주님 앞에 세워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은사를 헛되이 하지 말라는 겁니다.
 
정말 성령의 은사를 받은 사람답게 주님 앞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견고하게 서 있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이 고린도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기대임을 전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도이면서도 많은 죄들을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이 희망적인 메시지를 잊지 않았습니다.  9절을 한번 더 읽겠습니다.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미쁘시도다, 신실하시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너희를 불러 예수님과 더불어 교제하게 하신 이상 주님의 은혜로 그리고 주님의 권고하심과 주님의 다루심을 따라 마침내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수많은 문제들을 넘어서서 견고한 성도, 온전한 성도로 세워질 것을 바울은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그들은 문제를 넘어 섰을까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과연 문제를 넘어섰겠습니까, 안 넘어섰겠습니까?

다행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은 문제를 극복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8절을 보면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두 번째로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쓴 편지로 인해서 자신에게 많이 책망을 합니다.  이것 때문에 고린도 성도들에게 좀 미안했는지 내가 너희들을 근심하게 해서 내가 좀 후회하는 면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너희를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 내가 안다고 말하면서 계속해서 9절에서 이렇게 그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회개를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7장 11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다"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마침내 문제를 극복했습니다.  문제를 넘어섰습니다.  이들은 바울의 충고를 잘 받았습니다.  바울이 설교할 때, 편지로 충고의 메시지를 전달할 때에 그들은 반발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회개합니다.  고쳤습니다.  그들은 그래서 문제를 넘어섰습니다.  바울이 너무너무 감사해서 쓴 편지가 고린도후서입니다.  그들이 바울의 충고를 받아들였습니다.  성령의 지적을 받아들였습니다.  고치고 회개했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문제를 넘어설 수 있었던 교회.  그래서 우리가 이 편지를 살펴보는 것은 문제가 많은 성도들이었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이토록 많은 문제를 넘어설 수 있었다면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우리들 가운데 있을 수 있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성도가 될 수가 있습니다.
이 믿음과 이 기대를 가지고 모두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우리 교회와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오주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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