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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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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가 더 있는줄 아느냐? (눅 13:1~5) 
 
 
오늘 말씀에 보면 두가지 슬픈 소식이 예수님의 귀에 들렸습니다. 첫째는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었다"(1절)소식이었고, 둘째는 "실로암 망대가 무너저 열어덟 사람이 치어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첫번째 사건은 빌라도에 진면목이 나타나는 것으로써 빌라도의 인간됨이 예수님을 잘못 재판한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잔혹함도 알게하는 사건입니다. 빌라도는 갈릴리 사람들에게 남다른 분노가 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갈릴리는 다른 곳과 달리 저항정신이 강한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야성이 강한 곳입니다. 그래서 사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때도 갈릴리 사람들이 뭔가 일을 저즈르자 뽄때를 보여주기 위해서 사건 열루되어 잡혀온 사람들을 죽여 그 피를 제물에 섞어서 제사를 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리고 두번째 소식은 실로암 연못가에서 치료를 받기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실로암 망대가 넘어지는 바람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런 일이 생기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의문을 갖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재앙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재앙으로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칩니다. 악인의 손에 정말 순진무구한 생명이 희생당하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희생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목회자로써 대답하기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쉽게 그런 결과를 죄의 경중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는 안됩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불행은 곧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사고와 불행으로 죽은 사람들이 자신들보다 더 죄가 많기 때문에 죽었다는 교만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생각이 뼈속 깊이 자리잡고 있지는 않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주실 말씀을 통해서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단순히 고난만으로 사람의 죄를 판단해서는 안되고 그럴 수도 없습니다. 요 9:1-2에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라고 물었을 때, 주님은 즉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요 9:3에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다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조상의 죄로 인하여 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이 당하는 고난에 죄를 함부로 연관시켜서 안 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사건의 소식을 예수님께 전하면서 그들이 죄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죄인의 낙인을 찍으려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런 저런 이유를 대서 고난 당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남의 일을 함부로 해석하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유혹을 우리는 많이 받고 삽니다. 그러나 설혹 그것이 죄로 인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분명하게 가지고 있을 지라도 이런 유혹을 사정없이 떨처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곧 좋은 성품으로 사는 것이고 존경받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비결이며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가 온유하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교회는 낙인을 찍는 곳이 아니라 오히려 찍힌 낙인도 희미하게 하고 없어지게 하는 곳이어야 하는 줄로 믿습니다. 낙인을 지워주고 낙인를 벗겨주는 곳이 교회어야 하는 줄 믿습니다. 아멘입니까?    
아멘 하십시오. 다른 때는 내가 여러분들에게 아멘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강요라도 해야하겠습니다. 

교회는 옳고 그름을 다투기 보다는 서로의 허물을 덮어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당연히 세상 어떤 곳보다 교회는 옳은 길로 가야 하고 그름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걸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옳고 그름만을 다투다보면 성도들의 마음이 황폐해지고 맙니다. 교회 안에 쪽집게 처럼 잘못만 찝어내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면 그 교회는 자연히 황폐한 교회가 되고 맙니다. 주님은 그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쪽집게 처럼 남의 허물과 아품을 찝어내고 싶어하는 유혹을 떨처버릴 수 있는 사랑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니 간절히 부탁합니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시고 하나님만이 찝어내시고 하나님만이 정죄하시도록 해드리는 하나님 중심의 성도들이 되십시다. 혀가 간지러우면 혀에 피가 나도록 깨물어서라도 그렇게 하십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성령님께 일하십니다. 성령님께 알아서 하실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회개해야할 대상이지 남을 정죄해야할 심판자는 아닙니다. 만약 타인의 고통에 정죄를 한다면 타인의 슬픔에 슬픔을 더하는 경우가 됩니다. 심판과 정죄는 나에게만 적용시켜야 합니다. 나에게는 회개할 능력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 8:11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주님도 정죄하지 않으셨는데 우리가 정죄한다면 큰 교만의 죄를 짓는 것입니다. 

진실한 성도는 항상 자신의 죄를 대들보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를 티끌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종교적인 사람, 율법적인 사람들은 항상 자신의 죄를 티끌처럼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죄를 대들보처럼 생각합니다. 그래서 종교적인 사람이나 율법적인 사람을 대하거나 만나면 기분 나빠지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런 종교적인 사람이 아닌 그리스도인을 양성하는데 있습니다. 

골 3:12~14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종교적인 사람은 자꾸 남을 정죄부터 하려고 합니다. 그러 기독교인은 사랑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다른 것입니다. 
교회는 풍성한 사랑과 은혜를 나누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성도들은 교회 밖 세상에서 온갖 역경과 어려움과 좌절을 경험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필요한 도움과 격려를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실천한다면 아마도 상상할 수 도 없는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교회 안에 기적이 일어날 것은 물론이요 교회 밖의 사람들도 교회로 들어오려고 아우성칠 것이 분명합니다. 
처음교회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잘 보이지 않고 표가 나지는 않지만 "내가 이 교회로부터 배려를 받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고통받는 자들은 당연히 그들이 고통을 받아야 할 큰죄를 지었다"고 하여 질책하지 말 것을 주의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심판하는 일에 적극적이고 무자비했던 자들이 회개하지 않음으로 받게 될 멸망의 벌은 어떤 것보다 준엄할 것임을 또한 경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18명이 죽었다.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을 성전에서 죽여 그들의 피를 제물에 섞었다. 이런 일을 보면서 우리는 기회로 만들어야 한다. 특히 선한 일에 힘쓰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갑작스러운 이런 일 앞에 "내일 일을 자랑하지 말고(잠 27:1), 오늘밤에 내 영혼을 부르시더라도(눅 12:20) 괜찮을 정도로 "회개"를 이루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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