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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자세 (히 1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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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자세 (히 12:28~29)

 
지난주에 이어 오늘은 창조주이시며 구속주이신 하나님께 어떤 자세로 예배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귀여움을 받는 아이가 버릇없이 부모를 대하는 수가 있습니다.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성도의 마음도 자칫 방자해 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경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가져야 할 기본자세를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히 12:28-29). 하나님 나라는 당신님을 한 없이 낮추시며 길이 용납하시는 겸손과 자비의 왕이 통치하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백성으로서는 왕을 왕으로 섬겨야지 낮게 취급하거나 방자한 마음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김에 있어서 기본자세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려는 태도입니다. 경외심 없이 하나님을 섬기다가 소멸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론의 아들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첫 제사장 직무를 행할 때, “여호와의 명하시지 않은 다른 불”로 분향했습니다. 그러자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즉시 그들을 죽였습니다(레 10:1-2). 언약궤를 궁으로 옮기는 첫 시도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대상 13:6-11). 고핫 자손의 어깨로 메는 대신에 새 수레를 사용했지요(민 4:15). 옮기는 중에 소들이 뛰었고, 만지지 말라고 명하셨던 언약궤를 웃사가 손으로 붙들었습니다. 그 일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므로 웃사는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인간의 생명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천하를 얻고도 생명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도 생명의 고귀함이 함의되어 있습니다(마 16: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제사장들을 즉사시키신 후에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 내가 거룩하다함을 얻겠고 온 백성 앞에 내가 영광을 얻으리라”하셨습니다(레 10:3). 이 말씀은 하나님의 거룩함과 영광이 생명보다 더 중요함을 가르쳐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님의 거룩함이 손상되어 영광이 드러나지 못할 일에서는 그 귀한 생명조차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두 사건의 공통점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방식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손상시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일임을 말해주지요. 웃사의 사건으로 다윗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대상 13:12). 그 후에 그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규례대로 언약궤를 옮깁니다(대상 15:1-2, 13). 이처럼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단순히 마음에 품는 어떤 ‘감정의 문제’가 아닙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마치 황제의 명령을 받들듯이 그 분의 말씀대로 순종합니다.

궤를 옮기려는 첫 시도가 있었을 때 그곳은 축제분위기였습니다. 다윗을 비롯하여 온 백성이 춤추고 노래하며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새 수레도 동원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만큼 다윗은 하나님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그 일들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을 기쁘게 했던 그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에 근거를 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는 명령하신 말씀에 근거한 예배입니다. 즉, ‘진리 안에서’ 예배해야 합니다(요 4:24). 우리 주님께서는 사람의 생각대로 “헛되이 경배하는” 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마 15:9).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려는 사람은, 자기 마음에 좋게 생각되는 대로 예배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규정된 말씀이나 그 말씀에서 명확하게 도출될 수 있는 원리에 따라서만 예배해야 합니다. 이것을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라 합니다.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않은 불이라면 열납되지 않습니다. 새 수레와 그것을 준비한 다윗의 마음 자체는 좋은 것일지라도,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방식을 따른 예배가 아니면 그분께서는 진노하십니다. 예배자는 내가 보기에 어떠냐를 따라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하나님 말씀에 비추어서 명령된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는 축제다’라는 말은 사람을 기쁘게 하기 위해 축제처럼 기획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지 않아야합니다. 다윗이 다시 언약궤를 옮길 때도 축제 분위기는 변함없었습니다. 이번에는 말씀을 따랐으므로 하나님께서 언약궤를 맨 레위 사람을 도우셨습니다. 무리는 감사함으로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일곱을 하나님께 헌상했습니다(대상 15:26).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 감지되는 예배 현장에서 기쁨이 없을 수가 없지요. 그분을 향한 찬양과 자원하는 헌상이 자연스럽게 따라 나옵니다. 더욱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열정도 있습니다. 이처럼 바른 예배는 진정한 의미에서 축제입니다. 하지만 축제를 벌인다고 바른 예배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레위기 10장 3절 말씀에 따르면, 백성을 대신하여 제사하며 분향하는 일을 맡은 제사장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만인이 제사장이기 때문에 모든 예배자는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입니다. 공예배는 그 가까이 함이 좀 더 특별한 의미로 나타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 교회가 규정된 예식을 통해 좀 더 의미 있게 하나님을 가까이 합니다. 그래서 예배자가 되는 것은 대통령의 만찬에 초청되어 그에게 가까이 하며 함께 먹고 마시는 것보다 더 굉장한 특권입니다. 특권이 큰 만큼 규정대로 행하는 일도 더더욱 중요합니다.

규정대로란 단지 정확하게 형식에 맞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입술로는 존경해도 마음이 하나님께 멀다면 ‘헛된 경배’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1장 10-17절에는 하나님을 괴롭히며 지치게 하는 헛된 예배가 언급됩니다. 일상생활에서는 전혀 하나님 백성답게 살지 않으면서 안식일의 예배 규정만 지키는 형식적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태도를 단지 보이러 오는 것, 마당만 밟는 것, 헛된 제물이라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인 예배를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저주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 곧 기이하고 가장 기이한 일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13-14).

예배의 관점에서 아담의 타락은 하나님을 바르게 예배하지 못한데서 출발했습니다. 그 후로 인류는 바르게 예배하는 부류와 바르게 예배하지 않는 부류로 나뉩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서부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와 받지 않으시는 예배로 나뉘지요(창 4:3-5). 바른 예배자는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모습으로 성경에 등장합니다. 그들은 말씀에 순종합니다. 반면에 타락한 예배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농담으로 여기는 모습으로 성경에 비춰집니다. 그들은 말씀을 따르는 대신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대하길 좋아합니다. 그러다가 요한계시록의 천상예배에서 온전히 회복된 예배자와 예배의 모습을 보여주지요.

예배는 구속사의 진전과 함께 계시된 만큼의 말씀에 따라 드려집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제물을 드렸습니다.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는 성막을 만들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왕국 시대에는 성전을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했습니다. 각 시대마다 계시된 분량이 달랐지만 자기 시대에 계시된 만큼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시행방식은 달랐지만 ‘계시된 말씀에 따라’ 예배했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이제 신약의 성도들은 계시가 완성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구약의 제사제도나 예배 모습을 문자 그대로 따르지 않고 그리스도를 통해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그 의미를 생각하며 예배합니다.

신약 성도의 예배는 각종 제물대신에 온전한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 의지합니다. 인간 제사장이 아니라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아니라 성전의 성취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요. 우리의 예배는 그 자체의 거룩함 때문에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하신 은혜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됩니다. 우리 중에도 보이러 오는 예배자, 마당만 밟는 예배자, 마음은 멀리 있는 예배자가 없진 않겠지요. 그들 모두 죽어야 마땅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 때문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예배자를 겸손하게 합니다. 그리고 진노와 저주 받아 마땅한 예배자를 바른 예배자로 간주해주시는 은혜를 성도라면, 늘 회개하면서 부단히 천상예배가 보여준 온전한 예배를 지향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그림자라 하는 다윗도 처음부터 바른 예배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웃사가 죽을 때 함께 죽었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예배를 왜곡한 책임이 더 무거웠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살려두셨습니다. 다윗의 행위가 웃사보다 더 훌륭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야말로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은혜의 기간에 다윗은 회개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배웠습니다. 그 후에 규정된 말씀대로 다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옮기는 바른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말씀을 따르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반면에 거역하는 것은 점을 봐주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죄와 같다고 했습니다(삼상 15:22-23). 바른 예배자도 온전하지는 않지만 그는 항상 말씀 앞에서 회개하며 말씀이 가르치는 바를 향하여 나아갑니다.

예배라고 다 예배가 아니라 예배다워야 예배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가 임하는 이상한 예배가 있음을 경고합니다. 우리의 예배드림에 있어서 그 내용이 바른지, 그리고 경건함과 두려워함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자세가 바른지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입니다. 제사하려는 열정보다 항상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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