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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찌르는 채찍과 잘 박힌 못 (전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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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르는 채찍과 잘 박힌 못 (전 12:11)

(전12: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1. 흑인 인권 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14살 때, ‘흑인과 헌법’이라는 주제로 웅변대회에 참가해 입상(入賞)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버스운전사의 욕설을 들었습니다. 어린 마틴 루터 킹은 이날의 모욕을 평생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킹 목사의 어린 시절인 미국의 1940년대는 인종차별이 여전했습니다. 흑인들은 흑인전용극장에서 철지난 영화나 겨우 볼 수 있었습니다. 흑인들은 수영장을 이용할 수도 없었고 공원에서 놀 수도 없었고 백인학생들과 다른 고등학교를 다녀야 했습니다. 흑인들은 인간 이하의 냉대를 받는 흑인 조상을 원망하며, 자학하며, 자포자기의 삶을 살았습니다. 

교회 주일학교에 인도를 받은 흑인 어린이 하나가 행동이 무척 난폭하고 불량해서 선생님이 사랑하며 관심을 가지고 접근했더니, 그는 거짓말 말라는 듯이 쳐다보며 하는 말이, ‘I am nobody’, 나는 선생님이 말하는 그런 사랑을 받을 만한 아이가 아니라 아무데도 쓸모없는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유를 알아보았더니 빈민가에서 가난에 찌들고 백인들에게 확대 받고 꿈도 없이 살아가는 부모가 화풀이 섞인 말로 자식들에게 내뱉듯이 ‘You are nobody’, 너는 아무쓸데 없는 쓰레기 같은 놈이야, 아무도 알아 줄이 없는 놈이라고 입버릇처럼 했기 때문임을 알았습니다.

선생님은 ‘아니야! You are somebody, 너의 부모가 혹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상을 만드시고 흑인도 백인도 지으신 하나님이 너를 알아주고 사랑해주신단다. 그러니 너는 somebody, 쓸모 있는 사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사랑에 굶주린 그 어린이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 선생님의 감격스런 말에 자신을 얻고, 그때부터 ‘I am somebody’, 나는 쓸모 있는 사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외치며 자신에 찬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가 바로 비폭력 무저항주의자로 인권운동을 전개하며 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꿈과 소망을 준 위대한 흑인지도자 마르틴 루터 킹 목사입니다. 

스승의 말 한마디로 ‘nobody’, 보잘 것 없고 꿈도 없는 인생이 ‘somebody’, 위대한 꿈을 가지고 그것을 성취해가는 쓸모 있는 인생, 자신과 사회를 변화시키는 대단한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You are somebody’라는 주일학교 선생님의 한 마디 말씀이 어린 마틴 루터 킹에게는 ‘잘 박힌 못과 같이’ 되어 그의 평생의 삶을 이끌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꿈’은 40년 후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된 오바마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킹 목사는 1968년 4월 4일 테네시주 멤피스 로레인 모텔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수가 쏜 총탄에 맞고 사망했다.)

2. 오늘 본문에서 “지혜자의 말씀”과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다 한 목자(one Shepherd)의 주신 말씀”입니다. “한 목자”는 시편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80:1, “요셉을 양떼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귀를 기울이소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자여 빛을 비취소서.”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님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그 양을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 선한 목자이십니다.(요10:11) 그리고 “찌르는 채찍 같은” ‘지혜의 말씀’과, “잘 박힌 못 같은” ‘스승의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항상 상석(上席)과 높은 자리를 좋아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두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23:6-10)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선생(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 또한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

모든 인생의 ‘선생’(랍비)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고, 모든 인생의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지도자’ 역시 인생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시는 한 분 그리스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지혜의 말씀”은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스승의 말씀” 역시 모든 인생의 선생이 되시는 한 분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goads) 같이” 인생을 생명과 축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찌르는 채찍(goads)”은 가축을 몰아갈 때 자극하기 위해 사용되는 날카로운 쇳조각이 박힌 막대기를 말합니다. 따라서 “찌르는 채찍(goads)”은 잘못된 길로 가는 인생을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 채찍처럼 사용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이를 히브리서 4:12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를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딤후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는 이유로 사도 바울이 체포되어 심문을 받기 위해 아그립바 왕 앞에 섰습니다. 바울의 이전 이름은 사울이었습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나기 이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그리스도를 만난 후엔 자신이 어떻게,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를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고소 고발한 유대 군중들과 왕 앞에 먼저 자신이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밝혔습니다. 자신이야말로 진정한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며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다고 말합니다. 

학문으로 말하면, 당시 가장 뛰어난 신학 교수였던 가말리엘 문하생으로 율법 박사이고, 그 배운 바 율법을 실천하는 데는 가장 엄격한 바리새인 중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렇게 혈통으로나 학문적으로나, 생활면에서 누구 하나 나무랄 데 없는 정통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회심하여 바울로 변화되기 전에는 다른 유대인과 여느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이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로 단정하여 기독교인들을 핍박하고 투옥하고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했고 교회를 궤멸하는데 열성분자로 앞장섰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 군중들 속에 있는 대제사장들이 바로 증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행22:3-5) 나는 유대인으로 길리기아 다소에서 났고 이 성에서 자라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하는 자라.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이에 대제사장과 모든 장로들이 내 증인이라. 또 내가 저희에게서 다메섹 형제들에게 가는 공문을 받아 가지고 거기 있는 자들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끌어다가 형벌 받게 하려고 가더니

그는 철저히 유대 종교 옹호자로, 그리고 바리새파의 사람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여서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고 생각하고 기독교인들을 가차없이 박해했던 자신의 과거의 부끄러운 모습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6:10-11)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사도 바울은 예수 믿기 전, 변화받기 전에 저질렀던 자신의 부끄러운 행동을 이렇게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딤전1: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러한 바울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회심 경험을 간증합니다. 기독교를 그렇게도 핍박하던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 세상을 구원하실 구세주로 믿게 된 것은 바울 자신의 의지나 타인의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와의 초자연적인 만남을 통해서였습니다. 그는 사도행전 26:6-15에서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행26:12-15) 그 일로 대제사장들의 권세와 위임을 받고 다메섹으로 갔나이다. 정오쯤 되었을 때 내가 길에서 보니 해보다 더 밝은 빛이 나와 내 일행을 비추었습니다. 우리가 모두 땅에 엎드리자 히브리말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왜 나를 괴롭히느냐? 가시 채찍(the goads)을 뒷발질해 봐야 너만 다칠 것이다.’ 라는 음성이 내게 들려왔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고 묻자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이니라.’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던 바울이 빛 가운데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 거꾸러졌습니다. 회개한 것입니다. 철저하게 거꾸러뜨려진 것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낮아지는 회개의 자세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또한 사도행전 26:12-29에서 이같은 회심의 체험은 꿈이 아니라 역사적인 사실로 온전히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役事)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이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이런 경험을 했기 때문에 그렇듯 극악무도했던 내가 이렇게 변화된 것입니다. 당신도 이런 경험을 했더라면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누구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내가 경험한 이 사건은 나 하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인 것입니다. 내가 이런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도 바로 당신을 위해서입니다. 당신을 지금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게 이런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도 바울 하나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비록 하나의 사건이지만 모든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과 목적이 있기에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이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갈1:15-17)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하나님께서는 바울이 태어나기 전부터 벌써 모태로부터 이방인의 사도로 예정하시고 확정하셔서 다메섹 사건을 통해 은혜로 바울을 부르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은 “(행26:14)......가시 채찍을 뒷발질하는 고생...”만 실컷 했다는 고백입니다. 여기 ‘가시채찍(the goads)’는 오늘 본문에서 사용된 ‘찌르는 채찍’과 같은 단어로 소나 말 등이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길들이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소나 말은 멍에를 매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고자 하면 그것을 매지 않으려고 자꾸 뒷발질을 합니다. 그러면 주인은 그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뒷발질해서 닿는 부분에 송곳같은 것을 박아두어서 뒷발질할 때마다 찔리게 만듭니다. 몇 번 뒷발질하다가 찔리고 나서야 정신이 나서 비로소 고분고분하게 밭을 갈거나 달구지를 끌고 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 채찍을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울아, 이제 내가 네게 멍에를 씌워 놓았으니 버둥대지 말고 고분고분 따라 오너라. 딴 생각 먹고 뒷발질하다가는 너만 고생당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으신 여러분은 딴 생각가지고 벗어나려고 쓸데없이 뒷발질하지 마시고 순순히 직분과 사명에 순종하시므로 고생을 덜 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영원히 멸망받을 사울을 회심시켜 그를 바울로 변화시킨 것은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죄인 괴수, 복음의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던 사울을, 분명 잘못된 길로 치닫고 있는 사울을 “찌르는 채찍 같은” 말씀으로 그를 생명과 복음을 증거하는 축복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다윗 왕이 성전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성전을 짓고자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믿음과 사랑을 보시고 다윗 왕을 이렇게 축복하십니다. “네가 어디로 가든지 항상 함께 하여 네 모든 대적을 멸하고, 네 이름을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게 만들어 줄 것이며, 네 가문과 네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그리고 성전은 네 아들을 왕으로 세워 건축하게 할 것이며 나는 그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니 저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 내가 내 앞에서 폐한 사울에게서 내 은총을 빼앗은 것같이 그에게서는 빼앗지 아니하리라.”(삼하7:1-15)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인생인지라 혹시 죄를 범할지라도 사울 왕처럼 죽음에는 붙이지 아니하고 “사람 막대기와 인생 채찍으로 징계”하여 바른 길로, 생명과 약속된 축복의 길로 인도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성도 여러분은 모두가 아브라함의 자손, 다윗 가문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같이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지혜서 잠언은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미련함을 바로 잡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잠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

또한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그 죽음에서 구원하리라고 했습니다.

(잠23:14)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죽음에서 구원하리라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를 범하고 자신의 범죄를 은폐하기 위해 그의 남편을 전쟁 최일선에 내보내 함정에 빠뜨려 죽였습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통해 엄히 책망하셨습니다.

(삼하12:9-10) 어찌하여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 보기에 악을 행하였느뇨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되 암몬 자손의 칼로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이제 네가 나를 업신여기고 헷 사람 우리아의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은즉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러한 하나님의 책망 앞에 다윗은 솔직하게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시인합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왕일지라도 즉시 자신의 잘못과 죄악을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죄를 용서하시고 죽음에 붙이지 아니하셨습니다.

(삼하12:13)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 나단이 다윗에게 대답하되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 당신이 죽지 아니하려니와

“찌르는 채찍”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어서 생명에 이르는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여 바로 잡게 하고 의로 훈련시키기에 유익한 책입니다.(딤후3:16)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의 책망”,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듣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그 책망,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 말씀이 귀에는, 금귀고리요, 순금 목걸이라고 했습니다.(잠25:12)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 말씀으로 책망을 받을 때, 다윗처럼 겸손하고 솔직하게 받아 들여 그 생명을 구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원한을 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심사가 뒤틀어지는 사람도 있고 지나치게 민감하게 받아들여 쉽게 상처를 입고 낙심하여 우울해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금귀고리, 순금 목걸이가 될 수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 말씀이 때로 “찌르는 채찍 같이” 주어질지라도 다윗처럼 솔직하고 겸허히 받아들여 생명과 금귀고리와 순금 목걸이가 되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4. 다음으로, “찌르는 채찍 같은” 하나님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잘 박힌 못 같이” 되시기 바랍니다. 유다의 멸망이 임박한 B.C. 730년경 이사야 선지자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을 예언합니다. 특히 유다 최고위직인 궁내 대신으로 나라의 국고(國庫)를 담당한 셉나에 대한 심판을 선고합니다. 셉나는 국고를 맡은 자로서 재난에 처한 백성들을 돌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의 지위를 남용하여 사리사욕을 채우며 왕들의 묘역에 자신의 묘를 호화롭게 장식하는데 엄청난 국비를 탕진했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셉나에게 심판을 선고하시며, 하나님께서 택하신 엘리야김에게는 모든 권한을 부여하고 다윗의 열쇠를 주어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같이 그를 견고하게 하고 가문의 최대 자랑거리가 되는 축복을 선포하십니다.

(사22:15-23)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네가 무슨 권리로 이 왕의 묘역이 네 무덤을 팠느냐? 나 여호와가 너를 단단히 붙들어 공처럼 말아 싸서 광막한 땅에 던질 것이니라. 네가 거기서 죽고 너의 화려한 마차도 거기 있을 것이며 너는 네 주인에게 수치가 될 것이니라. 내가 너를 관직에서 쫓아내고 네 지위를 낮출 것이니라. 그런 다음 내가 힐기야의 아들인 내 종 엘리야김을 불러 그에게 네 관복을 입히고 네 띠를 매어 주고 네가 가졌던 모든 권한을 그에게 주겠노라. 그는 예루살렘과 유다 사람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자가 될 것이니라. 또 내가 그에게 다윗 집안의 열쇠를 줄 것이니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을 것이니라.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그를 견고케 하리니 그는 자기 집안 사람들에게 최대의 자랑거리가 될 것이니라.

엘리야김은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관리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은 자였습니다. 엘리야김이 다윗 집의 열쇠를 받았다는 것은 다윗 왕가의 통치권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다윗 가문에 약속하신 통치권의 축복을 ‘못이 단단한 곳에 박힘 같이’ 견고케 하리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김이란 이름은 ‘하나님이 임명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세우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은 바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세워진 교회를 말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교회를 두고 이렇게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16:18-19)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엘리야김에게 주신 다윗 집안의 열쇠가 바로 교회에 주어진 것입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고 그 몸된 ‘교회가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해 어디서나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워 주시는 분이 계신 곳입니다.

(엡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몸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잘 박힌 못과 같이’ 견고하고 영원한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습니다.”(골2:3)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희생으로 세우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잘 박힌 못과 같이’ 뿌리 깊은 신앙생활로 모든 것을 넘치도록 채워주시는 축복이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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