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빌 2:12~18)

  • 잡초 잡초
  • 946
  • 0

첨부 1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 (빌 2:12~18)


빌립보서 2:12-18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1. 너희 구원을 이루라

오늘 말씀은 우리 구원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것을 마치 천국행 티켓을 얻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미 티켓을 소유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당연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중요성, 그리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사는 삶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미를 지나 이제 나는 예수 믿었기 때문에 아무렇게 살아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구원을 잘못 이해한 것입니다. 

구원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아직 완성에 이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그들에게 천국 구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약혼과 같습니다. 예수를 믿겠다고 고백하는 순간 우리는 예수님과 약혼 관계에 들어섭니다. 그러나 영화로운 결혼의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습니다. 일단 약혼했기 때문에 배우자가 오래 참기는 하겠지만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실정에 이르면 파혼에 이를 수도 있습니다. 약혼한 이후에도 서로의 관계를 성실히 유지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합니다. 12절입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은 이미 얻은 것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것임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것도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라고 말씀합니다. ‘두렵고 떨림으로’라는 말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선 자의 경외감을 말합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려고 나아가는 제사장들이나 하나님을 만났던 선지자들은 두려움과 긴장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정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빌립보 교인들에게 권면을 합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구원을 이미 얻은 현실로서 묘사하기도 합니다. 그 대표적인 단어가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표현입니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 바울은 오늘 말씀처럼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3장에서 분명히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바울은 자신을 달려가는 인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얻은 것이면서도 동시에 완성시켜 가는 것입니다. 구원의 시작 단계에서는 믿음이 중요하지만 구원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순종, 곧 하나님 말씀에 대한 순종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구약에서 출애굽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것 사이에 시간차가 있는 것과 같습니다. 출애굽에는 참여 했지만 그들 모두가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얻은 구원을 이미 잡은 것으로 여기고 방심했던 자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다 많은 수가 광야에서 죽음을 맞고 말았습니다. 이 교훈을 언급하며 히브리서는 교회를 향하여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2장 1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라.” 3장 7절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이르신 바와 같이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노하심을 격동하여 광야에서 시험하던 때와 같이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 4장 1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내가 교회에 다니고 있고 내가 직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우리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내가 과거에 충성스럽게 봉사했다는 것이 우리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가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부지런히 순종해야 하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성화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섬김과 봉사의 사역을 하며 하나 됨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일들을 하는 것이 바로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이미 이루었다고 생각하니 방심하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우리는 자주 듣습니다. 처음 사랑할 때의 마음, 처음 일을 시작할 때의 마음을 끝까지 붙잡고 있으면 우리는 성공적으로 그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2.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그렇지만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 때문에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연약하고 죄인 된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을까 하고 부담스럽지만 이는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13절 말씀 때문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구원을 성취해 가는 과정이 전적으로 우리 노력으로 해야 할 것이라면 우리는 좌절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심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을 성취해 가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13절 말씀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우리 능력의 근원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하나 될 수 없는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만드시고, 인격적으로 많이 부족한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순종할 수 있도록 하며, 도무지 사랑할 수 없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공급해주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합니다. 내 안에, 또 우리 공동체 안에 무한한 능력이 숨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4장 13절에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고 고백합니다. 염려와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감사함으로 기도하라고 바울은 권면합니다. 그러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4:7)고 말씀합니다. 나 혼자 의지로 싸우는 싸움이 아닙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너희가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면 내가 돕겠다고 약속합니다.

또한 우리 안에서 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어떤 일을 억지로 하려고 하면 힘이 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주셔서 교회를 위해서 봉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도록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일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함으로 할 수 있도록 합니다. 남들이 다 쉬는 날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푹 잠을 자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추운 날에는 밖에 나가기도 싫습니다. 그러나 추운 겨울 새벽에도 성전에 와서 기도합니다.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그러합니까? 아니면 무슨 건강이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부어넣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마음에 기쁨이 없으면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 봉사하면서도 또한 헌금까지 드립니다. 이 또한 세상적인 마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둘 다 자유에 제한을 받으며 정해진 일과에 따라서 생활해야 합니다. 그러나 감옥은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오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는 곳이고, 수도원은 평생 있어도 즐거운 곳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 자발적으로 원해서 들어갔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차이입니다. 사도 바울이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여러 번 맞으며, 감옥에 투옥되기를 수차례 하며,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고, 심지어 죽음마저도 달게 받으려는 마음이 되어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고자 하는 소원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즐겁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마음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주일에 교회에 오는 것이 즐겁습니까? 교회에 봉사하고 헌신하는 일이 전혀 아깝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즐거운 소원을 주시길 축복합니다. 

3.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사도 바울이 오늘 말씀에서 빌립보 교회가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는 데 필요한 두 가지를 권면합니다. 내적으로는 원망과 시비가 없는 것이고, 외적으로는 생명의 말씀을 세상에 밝히는 일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것은 내적인 분란입니다. 그것은 원망과 시비로 나타납니다. 원망과 시비는 일찍이 출애굽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던 것들입니다. 그들은 애굽의 고기 가마와 신선한 야채를 그리워하며 불평하고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모세와 아론의 지도력을 인정하지 않고 끊임없이 다투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있으면 공동체가 서지를 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원망과 시비만 잠재우면 되는가? 교회는 이럴 경우 불평하는 세력을 믿음이 없고 부정적인 사람들로 낙인찍고 잠잠하게 만들려고 합니다. 불평과 다툼에는 정당한 것이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에서 노예적인 삶을 살면 터뜨렸던 불만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옳은 것으로 여기고 받아주셨습니다. 그것은 타당한 불만이었기 때문입니다. 불의한 구조에서 발생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당하게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광야에서의 불평은 온당치 못하다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지어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민수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 이 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이스라엘 백성 중에 죽은 자가 많은지라”(민21:5-6) 이 불평은 왜 심판하셨습니까? 그것은 참아야 될 불평거리였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이라는 더 큰 목표를 향하여 가는 데 지금의 고통은 참아야 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편하게 해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형편이기에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가 원망과 시비가 없기 위해서는 그 불평의 소리가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참아야 할 것인지 잘 판단을 해야 합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국민들의 소리가 정당한 불평을 제기하는 것인지 아니면 참아야 될 불평인지 잘 판단해야 합니다. 정당한 불평을 억압만 하면 언제가는 더 크게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참아야 될 불평이라면 진실 됨으로 호소하면 국민들도 이해하고 참을 수 있습니다. 

원망과 시비가 없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이는 특히 우리 한국민이 조심해야 될 일입니다. 저는 요즘 한국사회나 남북간의 대결을 보며 그런 우려를 금할 수 없습니다. 우리 국민이 잘 쓰는 말 중에 “너 죽고 나 죽자”는 말입니다. 싸움이 붙으면 대개 한 쪽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적절한 선에서 타협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조금도 손해 보지 않겠다, 조금도 양보하지 않겠다고 싸우면 결국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국회의 여당과 야당의 싸움이 그렇게 보입니다. 남북관계 또한 그렇습니다. 북한은 서해상의 NNL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자 한국의 국방장관은 NLL을 사수 하겠다고 합니다. 만약 북이 침범하거나 미사일 공격을 하면 그 공격 지점을 타격하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북한은 우리는 국지전뿐만 아니라 전면전도 각오하고 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아슬아슬합니다. 그것이 작은 규모의 국지전일지라도 서로에게 이롭지 않습니다. 남한은 경제 위기에 안보위기까지 더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북한은 세계적으로 더욱 고립되며 그만큼 통일의 길은 더 멀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한쪽 양보 없이 끝까지 가보자는 태세입니다. 너 죽고 나 죽자 식의 다툼은 어리석습니다. 적절한 선에서 타협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의 태도입니다.

원망과 시비는 더 커지기 전에 사전에 차단하거나 원망과 시비거리가 생기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국에서 가장 탁월한 의원으로서 편작을 듭니다. 편작은 당시 기술로 뇌수술까지 했던 대단한 의원입니다. 그런데 편작의 두 형도 의사였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위나라 왕이 어느 날 편작에게 물었습니다. “당신들 삼 형제 중에 누가가 가장 뛰어난 의원입니까?” 편작은 “큰 형님이 가장 훌륭하고 다음은 둘째 형님이고 저는 가장 뒤쳐집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의아하게 생각한 위 왕이 편작에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당신의 이름이 가장 널리 알려졌습니까?” 그러자 편작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큰 형님은 그 사람의 얼굴 빛만 보고도 어디가 아플 것을 예상하고 미리 치료해주기 때문에 고침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중병에서 미리 예방된 줄을 모릅니다. 둘째 형님은 미미한 병세를 보고 큰 병으로 번지지 않도록 고치기 때문에 사람이 작은 병을 고친 줄 압니다. 저는 환자에게 병이 도진 연후에야 그 병을 알아보고 고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제가 큰 병을 고친 명의로 생각합니다.” 일단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면 잠잠케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예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고 그 소지를 주지 않는 것이 더 현명합니다. 작은 단계에서 처리할 수 있는 것을 더 키워서 화근을 만드는 경우가 우리에게는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성도들도 좀 부족한 것을 참는 것이 필요합니다. 세상에 자기 맘에 완전히 마음에 드는 교회는 없습니다. 불평거리가 생겨도 참고 이에 맞추어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떤 청년 하나가 찾아왔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 교회 저 교회를 다녀 봤는데 문제가 없는 교회가 없습니다. 저는 완전한 교회를 찾고 있는데 찾으면 그 교회에서 평생을 봉사하며 살기를 원합니다.” 이 말을 들은 스펄전 목사님이 껄껄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참 좋은 생각입니다. 완전한 교회를 찾거든 나한테 말해 주시오. 나도 그런 교회에 다니고 싶으니까. 그러나 부탁이 하나 있는데 당신은 그 교회 나가지 마십시오. 당신이 나가는 날부터 그 교회는 나쁜 교회가 될 테니까......” 완전한 교회는 없습니다. 완전한 것을 구하는 그 마음이 오히려 우리 안에서 불평이 생기게 하고 그것이 교회를 어렵게 합니다. 좀 불편해도 참고 서로 도울 때 완전한 교회가 되어 가는 것입니다. 부부도 상대방에게 완전한 것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서로 참고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내적으로 원망과 시비가 없는 공동체가 되고 나서야 밖으로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에서 빛의 자녀로 드러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세상의 빛으로서 생명의 말씀을 힘 있게 전하는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한 기쁨이 없다고 합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의 자랑거리입니다. 그리스도의 날에 예수님이 세상에서 뭐하고 왔냐고 물으면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가리키며 자랑할 것입니다. 저 흠 없는 사람들 보시지요. 세상에서 빛의 역할을 감당했던 저들이 보이시지요. 온갖 핍박을 무릎 쓰고 생명의 말씀을 전했던 저들이 보이지요. 저들이 제 자랑이요 제 면류관입니다. 여러분들이 대단한 믿음의 사람들이 되면 저도 주님 앞에서 할 말이 있을 것입니다. 아무개 집사 아시지요. 그 집사가 저희 교회 집사였습니다. 

우리 인생에서 자랑거리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인생이 허무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 우리에게는 일의 열매와 사람의 열매가 눈에 보여야 허무하지 않습니다. ‘이 게 제가 한 일입니다.’ ‘이 사람이 제가 길러낸 사람입니다.’ 먼저는 우리 자녀들이 우리 자랑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더 나아가서는 좋은 후학들과 제자들을 많이 두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명절이면 여러분을 기억하고 고마워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기를 축복합니다. 
  
4. 기뻐하고 기뻐하라

빌립보 교회가 바울에게는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목숨마저도 내놓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말씀합니다. 17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관제로 드린다는 것은 제사 행위에서 마지막에 그 제물 위에 술이나 포도주를 쏟아 붓는 것을 말합니다. 피를 상징하는 것과 같은 그 붉은색과 마지막 처리로 다 쏟는다는 이미지 때문에 이것은 죽음을 상징하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그들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해서라면 자기는 죽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본성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위대한 것은 보람된 일이라 생각되면 기꺼이 목숨까지도 버리고 그 일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돕기 위해 목숨의 위협을 마다않고 기꺼이 뛰어 드는 것은 사람을 구하는 일이 가장 숭고하고 보람 있기 때문입니다. 보람된 일이라면 고생과 수고를 마다할 뿐만 아니라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지금 마음 자세가 그렇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기쁨에 빌립보 교인들도 동참하기를 원합니다. 사람의 기쁨은 좋은 일만 있을 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스러울지라도 보람된 일을 할 때, 자기가 원하던 일을 할 때 기쁨이 솟습니다. 우리 가운데 기쁨이 없는 까닭은 내가 이 일을 하다가 죽어도 좋아 할 정도의 일이나 그런 만남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감옥에 있지만 바울은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그의 자랑거리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에도 우리에게 사도 바울이 소유한 것과 같은 기쁨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