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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배의 내용 (계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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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내용 (계 4~5) 

 
올해 우리 교회는 바른 예배자로 성숙해가려는 소원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신년 첫 주에 ‘참으로 예배하는 자’에 대해 말씀을 나누었는데, 이제 몇 주간에 걸쳐 예배에 관하여 좀 더 세부적으로 성경의 가르침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오늘은 예배의 내용과 관련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에 의하면 ‘예배’는 인간의 고안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삼위일체의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명령되고 있는데, 그 중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두 구절만 보겠습니다. 먼저 마태복음 4장 10절에서 사단의 유혹에 기록된 말씀으로 대항하시길,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셨습니다.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도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고 하셨고,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도록 명하셨습니다. 성경은 예배에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전혀 수동적이지 않으시며 적극적으로 명령하심을 보여줍니다. 예배란 하면 좋고 하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닙니다. 예배는 반드시 순종해야만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근거로 오직 당신님만을 예배하도록 명령 하십니까? 첫째로 그분은 ‘창조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계 4:11). 둘째로 그분은 ‘구속주’시기 때문입니다. “큰 음성으로 가로되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이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창조주만이 피조물로부터, 구속주만이 구속받은 백성들로부터 예배 받으시기 합당합니다. 왕께 표해야 할 예를 행하지 않거나 다른 사람에게 행한다면 반역으로 간주 될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만 돌려야할 영광을 돌리지 않거나 다른 존재에게 돌리는 것 역시 하나님께 대한 반역입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천사 숭배, 성모 숭배, 성인 숭배 일체를 거부합니다.

요한계시록 4-5장은 천상에서 드려지고 있는 예배의 정황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는 이십사 장로들은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4:10)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면류관을 던지는 행위는 승리한 왕께 굴복하는 상징적인 행동입니다. 이제 자기는 그분의 권위 아래 있으며 자기 권위도 위임된 권위일 뿐임을 인정하는 행위이지요. 예배자들은 예배를 통해 무엇을 얻고자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은혜받기 위해서 예배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 홀로 높여지시고 그분만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려는 목적으로 자원하여 가장 낮은 자리로 엎드립니다. 예배의 진수를 보여주는 천상예배의 핵심적 내용은 오직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와 구속의 일을 선포하고 감사하며 찬양하는데 있습니다.

지상의 모든 예배는 이 천상예배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진정한 예배는 단지 개인의 경건을 위한 활동이 아닙니다. 천상에 있는 천사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찬양하는 일에 주님의 몸 된 교회의 한 지체로서 다른 지체들과 함께 동참하는 일입니다. 사적인 예배나 모든 비공식 예배도 이 의식이 분명해야 하지만, 주일의 공예배라면 보편적이고 우주적인 예배에 동참하는 교회적 행위임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이나 청중을 위한 예배는 이미 예배의 핵심과 목적이 왜곡된 것이며, 하나님을 예배한 것이 아닙니다. 지상예배 역시 청중의 은혜 받음이 예배의 핵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을 찬양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핵심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예배와 타종교 예배의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천상예배처럼 우리의 예배도 만물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대로 있음과 그분의 뜻을 위해 지음 받았음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높여드리는 의식이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흔히들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이 그냥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살아갑니다. 공기와 물도 아무 생각 없이 호흡하고 마십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창조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배우자와 자녀 그리고 부모님도 창조주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다양한 재능도 우리에게 있는 모든 소유도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우리의 생명과 생활의 모든 활동이 창조주의 붙들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채워주는 손길에 의해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 주 하나님께서는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합니다. 영혼의 무릎을 꿇어 그분의 뜻에 온전히 복종함이 합당하고 그분만을 높이며 감사와 찬양을 드림이 참으로 합당합니다.

또한 우리의 예배는 천상예배처럼 우리의 구속을 위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심이 합당하심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높여드리는 일도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구속함을 망각한다면 구속주께 영광 돌릴 것도 높여드릴 것도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구속함을 찬양함에 있어서는 먼저 자신의 죄인됨에 대한 깊은 인식이 선행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는 삶을 살고 있음을, 도무지 바르게 예배하고 있지 않음을, 무지 가운데서 그분을 향한 역심을 품었음을, 나의 의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누더기와 같아서 도무지 받으실 만하지 않음을 인정할 때, 구속하심의 영광이 분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지극히 정성스럽게 준비한 예배가 아닙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의 예배는 전혀 성경이 말하는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의 은혜에 기초한 예배입니다. 물론 예배를 지극히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아무리 지성으로 준비했을지라도 부패한 인간의 마음은 순수하게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지 않습니다. 지상에서 드려지는 어떤 예배도 천상예배처럼 온전하게 순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그리스도의 구속하심의 공로에 의존해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됩니다.

예배는 우리의 온전치 못함과 부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이 찬연히 드러나는 천상의 현장에 참여하는 가장 귀하고 복된 시간입니다. 어린양의 피를 통해 구속함을 받은 하나님 백성의 특권이지요.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향한 참 예배에 동참하기가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구속주로 믿지 않는 사람이라면 예배라고 부르는 어떤 의식에 참여했을지라도 참된 의미에서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은 예배자라기보다 구도자이지요.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구속주 되심을 전존재로 인정하고 감사와 찬양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구원 받은 자입니다. 참된 예배자라면 참으로 구원 받은 자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당신님의 영광을 반영하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어리석게도 창조주보다 자기 영광을 위해 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로인해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여 타락했고, 어리석게 되어 각종 피조물들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아 영광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우상 숭배의 현상에 대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 1:23)고 진단합니다. 모두 역심을 품은 반역자로 심판받아 마땅하지요. 하지만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당신님께서 예정하신 자들을 타락한 자들 중에서 구속하셨습니다. 예배의 관점에서 본다면 구속은 도무지 예배할 수 없는 자로 하여금 참된 예배자가 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구속 받은 백성은 이중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할 이유를 가진 셈이지요.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구속하심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예배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삶의 모든 순간에 감사와 찬양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또한 겸손한 자 일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앞에서는 아무런 자랑할 것도 내세울 의도 없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의 일에 수고하고 참으로 잘 예배했을 지라도,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뿐이라는 무익한 종의 자세를 가질 것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며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삶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습니다. 주일 공예배로 예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에서 그분의 창조주 되심과 구속주 되심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예배로 이어지지요.

오늘날 기독교인이 삶의 현장에서 지탄받고 있는 것은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높이고 찬양해야할 예배마저 자신의 행복이나 청중의 유익을 위한 수단으로 삼아버리기 때문입니다. 교회사를 돌아 볼 때, 예배의 타락은 언제나 윤리적인 타락을 동반했습니다. 예배가 왜곡되면 그 시대의 신비적이고 미신적인 이교적 관념들이 성도의 신앙을 오염시켜버렸습니다. 대표적으로 중세 교회가 그러한 암흑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자들은 예배의 개혁을 개혁의 중심에 두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 대신 청중의 소원을 만족시키는데 관심을 두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보좌에 청중이 앉은 마냥, 청중들의 뜻을 헤아리고 청중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민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세속의 종교와 사상에서도 성경에 비추어 적절하게 걸러내면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습니다만, 한국교회는 반성경적인 요소들의 영향을 걸러내지 못했습니다. 유교로부터는 지나친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를, 불교로부터는 이 땅의 삶을 무시하거나 도피해버리는 지나친 염세주의를, 샤머니즘으로부터는 지나친 기복주의를 받아들였지요. 학계로부터는 심리학을, 기업으로부터는 마케팅 전략을, 연예계로부터는 쇼적인 요소를 지나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예배의 중심을 하나님으로부터 예배자에게로 옮겨놓았지요.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예배를 현대 교회의 예배와 비교해 보면, 핵심에서부터 심각한 변질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예배의 대상과 예배의 내용이 성경의 가르침으로부터 한참 떠나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되지요. 교회가 만신전처럼 되었으며, 사회의 축소판이요 더 악하다고 비판해도 전혀 근거가 없지는 않습니다. 함께 회개하면서 무엇보다 예배의 회복이 우리로 부터 있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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