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상을 향해 문을 여는 교회 (요 3:16)

  • 잡초 잡초
  • 292
  • 0

첨부 1


세상을 향해 문을 여는 교회 (요 3:16) 
 

지난 주 내내 우리는 참 기이한 현상을 목도했습니다. 한 종파의 지도자가 세상을 떠났는데 나라 전체가 애도의 물결로 뒤덮였습니다. 가톨릭의 김수환 추기경이 그들 말대로 선종(善終)했을 때 조문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습니다.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줄잡아 40만 명 이상이 조문을 했다고 합니다. 놀라운 것은 가톨릭 신자만 명동 대성당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불교의 스님들과 무신론자들까지 추모 행렬에 동참했습니다. 
그야말로 종교와 성별과 나이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TV를 비롯한 언론 매체들은 지난 주 5일 동안 추기경의 장례 과정 모두를 톱기사로 다루었습니다. 이 나라의 국교가 가톨릭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국민장 못지않은 범국가적인 추모 열기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명동의 기적'이라고 했고, '김수환 추기경 신드롬'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이와 같이 대대적인 애도를 받게 된 이유가 많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그 분의 뛰어난 신심과 인품, 그리고 사회적인 영향력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항상 온유하고 겸손하고 낮은 자리로 내려가 이 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편이 되려고 애썼던 삶의 모습이 국민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 같습니다. 유신 체제와 신군부의 독재 정권과 맞서 싸운 용기와 정의감 역시 높이 산 것 같습니다. 종교계가 대부분 권력에 아부하거나 야합하기 십상인데 김 추기경은 남달랐습니다. 광주 민중 항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민중 편에 서서 권력의 횡포와 만행에 맞서 저항했습니다. 이와 같이 그 분의 개인적인 인격이나 행적 등 많은 요소들이 전국가적인 추모 열기를 불러일으킨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 추모 장면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 이 국민이 얼마나 참 종교와 참 영성에 목말라 있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세속화 시대 한 가운데 종교와 전혀 무관하게 산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종교와 영성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하여 정말 영혼을 움직일 수 있는 그런 종교, 그런 성직자들이 있다면 언제든지 종교에 귀의할 사람들이 수두룩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계기로 우리 개신교회와 감리교회를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뉴스를 접할 때마다 뭔가 형언하기 어려운 자괴심(自愧心)과 자성(自省) 같은 것이 제 마음속에 떠나지 않았습니다. 누구 말대로 가톨릭교회는 한 사람의 죽음으로 저절로 전도가 되었습니다. 관속에 누워 있는 한 사람이 수천만의 국민들 마음속에 큰 감명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우리 감리교회는 어떻습니까? 감독회장 당선자가 둘이라고 해서 양쪽이 다 감리회관을 점거한 채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깟 감독회장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돈을 물 쓸듯 쓰는 것은 물론이고 세속 정치인들보다 더 야비한 수단을 총동원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교회법은 물론이고 사회법조차도 지키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고서야 어떻게 160만 감리교회의 아버지가 될 수 있을는지, 전혀 반성하거나 회개하는 모습이 엿보이지 않습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이 왜소하기 짝이 없는 우리 감리교회의 현주소입니다.    

사실 가톨릭교회는 교황과 추기경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이기에 모든 일을 일사분란하게 체계적이고 일관성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경우 우리나라 최초의 추기경이었을 뿐만 아니라 전 세계 가톨릭 교계에서도 최연소 추기경이었으므로 큰 영향력을 미칠 수가 있었습니다. 가정을 갖지 않은 독신자였으므로 물질에 대해서도 비교적 초연할 수 있었겠지요. 이처럼 가톨릭의 추기경이 가지는 위상으로 볼 때 감리교의 감독회장이 끼칠 수 있는 영향력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영향력을 사회 전반에 두루 미칠 수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제도적이고 교파적인 한계만 탓할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수많은 교파가 난립하고 있는 개신교의 경우 일치된 목소리를 내기 어려울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큰 영향력을 끼칠만한 지도자를 배출하기 어렵다는 태생적인 한계만 불평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차제에 우리 감리교회를 비롯한 모든 개신교회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지 냉철하게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제가 지난 주 내내 부끄러워하고 괴로워했던 가장 큰 이유는 우리 감리교회, 특히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도 내부에 들어가 보면 숱한 모순과 문제점들이 있겠지만 적어도 언론을 통해 비춰진 가톨릭의 모습은 굉장히 긍정적인 것 같습니다. 특히 지식인들의 경우 가톨릭에 대해서 상당히 후한 점수를 주는 듯이 보입니다. 

저는 그 가장 중요한 이유가 가톨릭이 세상을 향해 문을 활짝 열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역사적으로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마다 항상 앞장 서 왔습니다. 특히 가난한 자들, 핍박받는 자들, 소외받는 자들을 위해 가톨릭이 보여준 자비와 사랑의 실천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추기경이 된 다음 제일 먼저 교회가 세상을 위해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고 대(對)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일에 앞장 서 왔습니다. 김 추기경이 1966년 주교 자리에 오르면서 내건 사목 목표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습니다. 세상을 향해, 세상을 위해 사목활동을 하겠다는 다짐이었지요. 김 추기경은 바로 이런 대 사회적인 사랑과 정의의 실천 때문에 종교를 초월해 모든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설가 박완서 씨는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추기경님께서는 부끄럽게도 당신은 신비 체험 같은 걸 해본 적이 없다고 말씀하신 걸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 분 생애를 통해 중대한 고비마다 선택한 길, 내린 결단이 곧 하느님의 음성이었다는 신비를 체험하게 된다.…거꾸로 가는 듯 하다가도 이 나라는 발전해왔고 가난에서 벗어났고 식민지에서 벗어났고 전쟁을 이겨냈다. 진통마다 그 분은 현장 한 가운데 계셨다." 

이제 중요한 것은 김수환 추기경을 우상화할 것이 아니라 그 분의 정신과 삶을 본받는 일입니다. 모든 매스컴과 언론이 서로 다투며 김 추기경을 추앙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그만큼 이 황폐하고 절망에 찬 시대에 참된 지도자를 그리워한다는 갈망은 이해가 되지만 자신을 지나치게 찬양하는 것은 그 분의 본뜻이 아닐 것입니다.  

-  세상을 향해, 세상과 함께,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교회로 

이제 우리 교회도 세상을 향하여 문을 여는 교회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와 교인들만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만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시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을 위해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봉독한 요 3: 16절도 하나님이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고 하지 않았지요.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옳습니다. 그러므로 교회 역시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세상과 함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오해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교회만 사랑하시고 세상은 미워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도 '저 죄 많은 세상', '저 타락한 세상'이라는 표현을 주저하지 않고 씁니다. 목사들 중에 세상을 무조건 미워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기 때문에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이런 편견으로 성(聖)과 속(俗)을 아주 예리하게 갈라놓을 때가 많습니다. 이러다보니 교회의 문턱은 날로 높아져서 교회와 세상은 점점 멀어져만 갑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는 결코 진리와 구원을 독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진리와 구원은 이 세상 전체를 향하여 지금도 흘러들어갑니다.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님 때문에 죄인인 우리 역시 의롭게 되었을 뿐이지 우리 역시 세상에 속해 사는 한 시민에 불과합니다. 의인이면서 죄인입니다. 교인이면서 시민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의로운 척 자랑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항상 세상을 향해 겸손해야 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의 목회 사역을 한번 반성해봅시다. 제가 이 교회에 부임해온 이래 우리 교회와 학교, 그리고 요양원을 운영하는 일에 늘 바빴고 그 때문에 살림살이도 늘 빠듯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큰 덩치의 살림을 꾸려 와야만 했기에 한 번도 풍족한 적은 없었고 늘 쪼들렸습니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해외 선교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어려운 교회들도 적지 않게 도와왔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일을 해왔다는 것이 이와 같이 주로 선교와 교회를 지원하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특별한 절기에 우리의 이웃을 위해 좋은 일을 영 안 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니 퍽 부족했습니다. 월요일마다 지역 사회의 노인들을 모시고 점심을 대접하는 봉사 역시 우리의 자랑거리이지만, 우리의 이웃과 사회를 위해서 선익(善益)을 베푼 것은 충분치 않았다고 반성해봅니다. 

사실 우리가 둘러보면 도와주고 봉사해야 할 이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점심을 굶는 결식 학생들도 많다고 하고, 노숙자들, 독거노인들, 소년 소녀 가장들, 고아와 교도소에 수감된 이들 역시 우리가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야 할 이웃들이지요. 부끄럽게도 우리는 1년 내내 우리 살림살이하기에 바빴고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는 큰 관심과 사랑을 보이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사회적인 봉사도 많이 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점을 깊이 반성하면서 앞으로 우리의 이웃을 돌보고 섬기는 일에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예컨대 여선교회나 남선교회, 청장년회, 각 선교회별로 우리 사회의 소외된 형제자매들을 위해 무슨 일로 어떻게 도울 수 있는지를 살펴보며 자선을 베풀고 봉사하는 일에 앞장 서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자선과 봉사에는 반드시 물질과 수고와 희생이 따라야 하겠지요. 고아원을 방분한다든지, 교도소를 방문한다든지, 사랑의 쌀 돕기를 한다든지, 이웃을 돕는 이 모든 일에 우리의 물질과 시간과 노동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저는 우리가 만든 '선한 사마리아인 기금'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1주일에 무조건 1천원은 이웃을 위해 나누자는 운동 선한 사마리아인 운동이지요. 그러나 생각해보니 제 마음이 너무 쫀쫀했습니다. 적어도 매주 만 원 정도는 이웃을 위해 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모든 헌금을 다한 뒤 엑스트라로 덧붙여 하는 헌금이기에 할 수 있으면 여러분에게 부담을 드리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1주 1천원' 운동을 시작해왔지만 스케일이 너무 작았던 것 같습니다. 

이 선한 운동에 많은 분들이 동참하지 못한 이유가 이 기금이 어떤 구체적인 목적을 위하여 쓰인다는 충분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지만 이것을 하나의 버릇이 되게 하자는 것이 저의 본래 취지였습니다. 몇 사람이 하면 별반 힘을 발휘할 수 없지만 우리 전교인들이 다 동참하면 아주 큰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앞으로 저는 여러분 모두가 이 사마리아인 운동에 적극 참여해서 우리의 이웃을 돕는 일에 발 벗고 나서 주시기를 간곡하게 부탁합니다. 

이렇게 사회를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적극적으로 봉사를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지만, 제일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과 태도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을 무조건 비판하고 정죄만 할 것이 아니라 존중하고 돌보고 섬기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우리와 종교가 다른 이라고 할지라도 존경하고 따뜻한 친절을 베푸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웃에게 유익을 주지는 못할망정 불편이나 해를 끼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 교회는 이웃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는지를 반성하면서 교회의 문턱을 낮추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저 높은 곳을 향해서도 날마다 올라가야 하겠지만 저 낮은 곳을 향해서 내려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세상의 어둠을 환히 비추이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썩은 환부를 썩지 않게 하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가 이런 사명을 잘 감당해왔다고 할지라도 또 한 번 각성하고 더 잘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동시에 세상으로부터도 존경과 신뢰를 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