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달픈 인생길을 갈지라도 (마 20:29~34)

  • 잡초 잡초
  • 729
  • 0

첨부 1


고달픈 인생길을 갈지라도 (마 20:29~34)


지난주 우리사회에 슬픔의 소식을 접했습니다.  가톨릭계의 지도자요, 나라의 어른인 김수환 추기

경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모든 언론이 그를 추모하고 회고하는 일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습니다.  

명동성당을 찾은 조문객이 약 40만이었고, 전국적으로 보면 100만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는 한국인

으로서는 최초의 추기경이고, 역대 최연소 추기경입니다.  가톨릭에서 추기경은 대단한 자리입니다.  

추기경 중에 교황이 나옵니다.  또 추기경들이 교황을 선출합니다.  지금 교황은 옛날보다 힘이 없

지만 왕이나 대통령과는 다른 위치에서 영향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 자리에 그가 근접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한국역사의 격변기에 중심에 있던 인물입니다.  민주화를 열망하던 시대에 그

는 정신적인 지주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특히 힘들고 어려운 때에 

뭔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 같은 허전함으로 사람들은 총총 빈소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모두가 간다는 것입니다.  왕도, 권력자도, 추기경도, 우리도 모

두가 떠납니다.  보통 사람들의 죽음을 ‘사망(死亡)’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죽음의 높임말로 ‘승하(昇

遐)’ 또는 서거(逝去), ‘별세(別世)’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 믿는 자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는 뜻

을 가진 ‘소천(召天)’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복음을 위해 죽임을 당한 경우를 ‘순교(殉敎)’라고 말합니

다.  불교에는 죽음을 ‘타계(他界)’라고 말합니다.  윤회사상에 입각하여 다른 세계로 떠났다는 뜻입

니다.  높임말로 ‘입적(入寂), 혹은 열반(涅槃)’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런 많은 죽음의 용어가 있

는데 가톨릭에서는 죽음을 ‘선종(善終)’이라고 말합니다.  교리적으로 이 말은 큰 죄가 없는 상태에서 

죽는다는 의미인데, 말의 뜻은 마무리를 잘했다, 끝을 잘 맺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분명 선종했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누구나 그런 것처럼 그도 역시 고달프고, 곤고한 인생을 살다가 

간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을 ‘수고와 슬픔’이라고 규정합니다.  영원한 안식이 있기까지 인생은 수고

와 슬픔의 연속입니다.  찬송가의 가사처럼 ‘괴로운 인생길 가는 몸’입니다.  모든 사람은 울면서 태

어났다가, 많은 눈물을 흘리고, 마지막에 깊은 눈물로 마감합니다.  이것이 인생길인데 지금은 힘들

어서 더 고달프게 느껴집니다.  이런 때, 이런 인생길에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외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기에 있었던 하나의 사건으로서 소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다른 성경에는 ‘바디매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소경’이었습니다.  

몸의 결정적인 장애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몸의 모든 것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눈이 중요합니

다.  앞을 못 본다는 것만큼 답답한 일이 없습니다.  그는 나면서부터 소경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태어나면서 운명이 결정된 사람입니다.  평범하게 사는 것도 힘든데 앞을 못 보니 얼마나 고달팠겠

습니까?  게다가 성경은 그를 ‘거지’라고 말합니다.  못 보아도 혹 넉넉하게 산다면 그나마 위안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가진 것이 없었습니다.  먹고 살기가 힘들었습니다.  정말 고달픈 인

생입니다.  몇 번이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과 충동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

니었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곤고하고 고달픈 인생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슬픈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본문은 30절에 ‘두 사람’을 강조합니다.  여기 ‘둘’이란 말이 얼마나 

그에게, 우리에게 위안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함께 있었습니

다.  그 사람도 역시 소경입니다.  그러니까 처지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혼자면 힘들고, 어렵고, 

외롭고, 더 고달팠을 텐데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여기 두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 마을에는 더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그가 살고 있던 동네

가 ‘여리고’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여리고는 여호수아시대에 무너진 여리고성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예수님시대의 그곳은 소경이 모여 살던 곳입니다.  그곳에 눈에 좋은 약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많은 소경들은 여리고에 모여 살았습니다.  바디매오도 거기 살았습니다.  자기


처럼 형편과 처지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습니다.  그래서 외롭지 않았습니다.  물론 고달픈 

인생길이었지만, 함께 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결코 외롭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이 그런 것입니다.  고달픈 인생길을 갈지라도 외롭지는 않습니다.  아니 외롭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아도 곤고한 인생인데 외롭기까지 한다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가장 참기 힘든 것이 바로 외로움입니다.  외로움이 무서운 병입니다.  우울증이 그래서 무

서운 것입니다.  고달파도, 곤고해도 견디지만 외로우면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것은 죽음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혼자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만약 죽

음도 함께 간다면 그리 외롭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은 혼자 갑니다.  죽음은 철저한 고독 

속에서 나 혼자만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두렵고, 때론 받아드리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는 죽음조차도 외롭지 않습니다.  아무도 함께 하지 않는 길을 주님이 더불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는 자는 세상에서도, 죽으면서도 외롭지 않습니다.  고달픈 인생길에 하나님은 이렇게 우

리를 사랑하고 이끌어 가십니다.


 처음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않게 여기시어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이것이 창조의 원리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외롭지 않게 하십니다.  외로운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외롭지 않게 살아야 합니다.  주변에 사람이 있어야 

하고, 특히 형편과 처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사람을 내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사랑과 이해와 섬김과 배려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습니

다.  “당신의 재능은 사람들 머릿속에 기억되지만, 당신의 배려와 인간적인 여백은 사람들 가슴 속에 

기억됩니다.  가슴으로 당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당신 편입니다”


이제 배려와 사랑으로 사람들의 가슴속에 기억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서 내편이 많아야 합니

다.  그래야 우리가 외롭지 않습니다.  혼자이지 마시고, 독불장군처럼 살지 말고, 있는 사람 멀리 하

지 말고, 그렇지 않아도 고달픈 인생길, 외롭지 않게 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주님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소경의 이야기는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났다는 것에 중요한 초점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지 않았

다면 그의 이름도, 기록도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절묘한 타이밍에 맞춰 주님은 바디매오에게 오셨

습니다.  그는 자기 앞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결코 놓치지 않았습니다.  이미 예수님에 대한 소문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유일한 소망은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

나기 위해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는 먼저 소리를 질렀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기에 오

직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했지만 더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주님이 그의 소

리를 듣고 멈추어서 그를 불렀습니다.  그러자 그는 겉옷을 벗고 나갑니다.  당시 사람들의 겉옷은 

우리의 겉옷개념이 아닙니다.  그것을 벗으면 그냥 알몸입니다.  주님을 만나는 일에 체면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는 뛰어갔다고 말합니다.  보통 사람이 뛰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

다.  하지만 못 보는 사람이 뛰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주님에게까지 가는 거리가 얼마인지는 

모르지만 아마 이곳저곳 부딪치면서 달려갔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고달픈 

인생길에 주님을 알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것이 인생에 큰 복이었습니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우리도 지금까지 많은 사람을 만났고, 앞으로도 더 많은 사

람을 만날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내고 좋은 일을 하면서 외롭지 않게 사는 것

이 분명 복입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주님을 만나는 것만큼 축복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

님처럼 나를 아는 자가 없고, 주님만큼 나를 사랑하는 자가 없고, 주님만큼 나를 이해하는 자가 없

으며, 주님만큼 나를 위로하고 힘주는 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날마다 만나야 합니다.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호소 할 대상이 있는 것만큼 축복이 없습니다.  지

금이 바로 그런 때입니다.  이런 때에 주님을 부르며 기도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위로와 힘입니

까?  그래서 우리는 바디매오처럼 불러야 합니다.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긍휼히 여기소

서’라고 외쳐야 합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나의 소리를 들으시고 가던 길을 멈추어 나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故 김수환 추기경은 생전에 자기 삶을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내 나이 85,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

다. 자연히 과거를 되돌아보게 된다. 66년 전 1941년 일본 상지대학에 갔을 때 당시 학생기숙사 사

감이 나를 보고 기린아라고 하셨다. 행운아라는 말씀이었다. 처음에는 그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하

지만 돌아보면 그 말씀 그대로 나는 정말 많은 시련과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

왔다. 그리고 이제 미구에 맞이할 죽음을 거치면 부족하고 자격이 없지만 모든 것을 용서하시는 자

비하신 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나를 받아주실 것이다. 하나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한마디로 그의 생애 가장 큰 축복은 주님을 만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일생을 돌아보면서 주님을 

만나, 주님의 길을 걸어간 것보다 더 큰 축복이 없다는 것입니다.  힘들 때 붙잡을 손이 있고, 아플 

때 찾아갈 대상이 있고, 곤고할 때 부를 이름이 있고, 답답할 때 하소연할 대상이 있는 것만큼 축복

이 없습니다.  나에게 주님이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고달픈 인생길에 만난 소중한 주님을 날마다 

더 깊이 만나면서 위로와 힘으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놀라운 일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바디매오의 이야기에 하이라이트는 그가 외롭지 않는 길에, 주님을 만나, 그의 눈이 떠진 것입니다.  

성경은 그 신비로운 과정을 소개합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은 그에게 주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

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는 주님께 소원을 아룁니다.  ‘보기를 원하나이

다’  그러자 주님은 그를 불쌍히 여기사 그의 눈을 만지셨고, 주님의 손이 닿자 그의 눈은 떠진 것

입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한 사건이고, 오늘 말씀을 대하는 우리에게도 놀라운 일입니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놀랄 일입니다.  성경은 이처럼 놀라운 일을 기

록합니다.  사실 놀라운 일이 아니면 성경에 기록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믿는 하

나님, 우리가 사랑하는 주님은 우리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알려줍니다.  그분은 우리

를 놀라게 합니다.  그냥 충격이 아니라 우리의 입을 열게 하고, 기뻐하게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놀라운 것이요, 주님의 손길이 놀라운 것입니다.  기적의 손이요, 능력의 손입니다.  그분이 한번 눈

을 만지면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분이 마음을 만지면 다 치료가 됩니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우리로 하여금 웃게 하십니다.  고달픈 인생길

에 이것보다 기분 좋은 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주님은 역사와 교회에 놀라운 일을 행하셨고, 앞

으로도 행하십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개인을 향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가정을 향하여도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어렵고 힘든 우리나라와 민족을 향해

서도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무엇보다도 교회를 향해 놀라운 일을 행하십니다.  이미 우리가 많

은 경험을 했습니다.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로 진정 웃게 하는 놀라운 일을 행하실 줄로 믿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고달프지만 소망이 있습니다.  곤고하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힘들지

만 포기하지 않고, 염려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찡그리지 말아야 합니다.  표정을 환하게 

하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 근심 내가 다 쥐는 모습을 버려야 합니다.  한순간에 역전시키시고, 한순

간에 반전시키시는 주님의 능력이 우리 모두의 삶에 놀랍게 임할 줄로 믿습니다.


말씀의 결론을 내리면서 오늘 이야기의 가장 놀라운 일이 하나 더 나옵니다.  그것은 바디매오가 

눈이 떠진 후에 주님을 따라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의 결론은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그들의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그들이 예수를 따르니라”고 말합니다.  마가복음에서는 ‘길에서’라는 말을 추

가합니다.  그가 이렇게 예수를 따라갑니다.  길에서 따라갑니다.  이것이야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평생 앞을 못보고 살다가 눈이 떠졌는데 얼마나 하고 싶은 일이 많았겠습니까?  보란 듯이 사람들

에게 보이고, 이젠 남들처럼 편하게 살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뒤로하고 길에서 주

님을 따라갑니다.  그런데 주님이 가는 길이 어떤 길입니까?  주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 

길은 십자가로 가는 길입니다.  바로 그 길로 갑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온몸이 찢기고, 피를 흘리며 

돌아가신 주님을 봅니다.  거기에서 그는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더 성숙하고 새로운 사람

으로 거듭납니다.  그리고 마가의 다락방에서 120명과 함께 성령 충만을 받고, 초대교회의 기둥 같

은 인물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가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이야기에서 이것이 가장 놀라운 일입니다.  눈이 떠진 것도 놀랍지만, 그의 헌신과 결단이 더

욱 놀랍습니다.  성경은 바로 이것을 우리에게 깊은 감동으로 전합니다.  성도여러분, 분명 고달픈 

인생길에 우리에게 베푸신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있습니다.  늘 외롭지 않게 하시고, 주님이 나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십니다.  그리고 나를 향한 계획을 세우시고 나를 놀라게 하고, 웃게 하십니다.  

이젠 우리가 주님을 놀라게 해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잊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보다 놀라운 일이 없습니다.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습니까?  그 길로 가야 하지 않겠습

니까? 


말씀을 맺습니다.  고달픈 인생길을 갈지라도 우리는 결코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통해 

힘과 위로를 얻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주님이 행하시는 놀라운 일을 기대하며 나아갑니다.  이제 

우리 모두 주님이 놀라시도록 바른 삶을 결단하면서 한주간도 승리하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