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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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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고전 13: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고전 13:5). 

Ⅰ. 본문해설 

참된 사랑의 여덟 번째 특성은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입니다. 이 구절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Ⅱ. 구절의 의미 

A. 원어적 의미 

여기서 “생각하지 아니하며”의 원어적 의미는 ‘무엇으로 여기다’ 혹은 ‘무엇으로 계산해 넣다’입니다. 그래서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마치 제정을 담당하는 사람이 누군가에게 돈을 꿔주고 그것을 기록해 두는 것과 같이 ‘계산해 넣다’로 번역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번역은 다른 사람이 내게 행한 악에 대해 계산해 넣어 두지 아니한다는 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 것입니다. 

B. '성내지 아니하며‘와 관련됨 

그리고 이 구절은 앞 절의 “성내지 아니하며”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악한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행한 악이나 손해 때문에 분을 품게 되어서 자기가 당한 것에 대해 복수하리라고 마음에 적어두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혹은 직접 보복하지 않더라도 그 사람의 불행을 기대하는 심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사랑은 성을 내지 아니하고, 이런 것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악한 것은 그저 나쁜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 문제는 대단히 방대한 담론이 필요하지만 간단히 알아보겠습니다. 


Ⅲ. ‘악’이란 무엇인가? 

악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악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빛을 경험한 사람들이 어둠을 따로 연구하지 않아도 그것을 직관적으로 알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악의 대칭인 선과 질서의 문제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A. 선(善)과 질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이 선하신 분임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믿음으로 그분이 절대적으로 선하시고, 어떠한 악도 행하지 않는 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더 나아가 하나님이 선하실 뿐만 아니라 선 그 ‘자체’이심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실 뿐만 아니라 공평하시고,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신실하십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런 여러 가지의 좋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릇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구성요소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분이 아니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단순성’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구성요소로 되어 있다면 요소는 서로 의지할 것이니 완전하신 분이실 수 없고, 요소를 지닌 존재가 스스로 구성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지에 의해 구성된 것이므로 하나님보다 더 큰 힘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전능성의 교리에 위배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이시고 단순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선을 가지신 분이 아니라 선 자체이시고, 사랑 자체이시며 공의 자체이신 것입니다. 

하지만 마치 찬란하게 비치는 태양빛은 하나이지만 그 효과는 다양한 것처럼-새싹을 돋우고, 얼음을 녹여 시냇물을 흐르게 하는 등-하나님 자신은 설명할 수 없는 불가해한 분이시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선의 효과가 나타납니다. 고통 받고 아파하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위로가 나타나고, 온유하고 하나님 앞에서 선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베푸시는 축복들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주님의 공의가 나타나니 이로써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렇게 주님이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것을 모든 피조물들이 정신과 물질세계 속에서 경험하도록 하기 위해서, 그 효과를 보내시는데 바로 그것이 ‘질서’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이 선하심에 덕을 입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연의 만물에 자연적인 질서를 새기시고, 인간의 영혼과 정신에는 도덕적 질서를 새기셨습니다. 그래서 이 질서를 따라 살면 살수록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선하시다는 사실이 깊이 경험되는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를 감시한 사람이 없는데 하루 동안 악을 행한 사람의 잠자리는 고뇌와 외로움이지만 선을 행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산사람의 잠자리는 그의 선행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라도 평안한 안식이 되는 것이 그 예입니다.. 

B. 질서와 사랑 

그런데 이 질서와 더불어 등장하는 문제가 원하십니다. 바로 하나님이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인간에게 하나님이 사랑을 요구하실까요? 혹시 싫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아본 일이 있으십니까? 불쾌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완전하신 하나님과 우리 같은 인간들의 차이는 어떻습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거룩하시기 때문에 더러운 인간이 당신을 사랑하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지겨운 것이 되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을 받아야만 만족을 느끼실 수 있는 분이라면 하나님이 아니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도록 요구하십니다. 그래서 사랑하지 않으면 당신에게 비참이 되는 것처럼 형벌로 위협하시기까지 하며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행복해질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받지 않으셔도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은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바로 인간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회심을 살펴보십시오. 회심은 하나님을 모를 때 집착하던 질서를 버리고 하나님이 마음속에 새겨 넣으신 도덕의 질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갖는 것은 그 질서가 선하신 하나님의 작품이고, 그것을 따라 살면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기쁨을 드릴 수 있고, 자신의 존재로 이웃의 행복에 이바지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도 그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질서를 좋아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질서가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가장 훌륭한 책이 성경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그 질서를 사랑하고, 그 질서가 담긴 성경을 꿀과 같이 달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도 죄를 짓고 불순종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잠시 그 질서를 벗어났다고 할지라도, 그 고통 때문에 심히 아파하게 되는데, 질서를 벗어난 것이 자기 자신일 때는 회개라고 부르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행한 것인데도 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을 가리켜 다른 사람의 죄로 인한 애통,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눈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이 후자의 고통을 많이 겪으셨습니다. 당신 자신은 죄가 없으시고,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셨기 때문에 질서를 어긴 적이 없으셨지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을 때 질서를 어김으로 고통 하는 수많은 인간들을 발견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유익이 되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만 풍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정해놓으신 도덕과 자연의 질서 속에서 충만하게 누리면서 살 수 있는 행복한 존재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지엄하신 명령 속에서 우리는 오직 인간에게만 말씀하신 요구도 보게 되고, 그 요구 안에서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우리 인간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결론에도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하심, 절서, 아름다움 자비하심을 흠뻑 받으며 살기 위해서는 인간의 지성으로 연구해서는 불가능합니다. 인류 역사 이래 탁월한 지성을 가진 철학가와 사상가들이 풀고 싶었던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간은 누구인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어떻게 행복에 이를 수 있는가? 이런 것들입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어렴풋이 이런 기술문명의 폭발적 발전과 자원의 무한한 개방을 통해 흡족하게 누리는 것으로써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통해 이 질서를 깨닫고, 어떻게 선해 도달할 수 있는지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든 무지한 자들에게도 인간의 행복으로 돌아갈 수 있는 질서를 발견하도록 만들어 주셨습니다. 바로 사람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입니다. 바울 사도는 처음에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제대로 섬긴다고 자부하던 그는 사실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굽은 유대교의 사상과 특권주의적인 선민사상이 만들어낸 성경과 다른 종류의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된 구세주로 오셨을 때도 그는 그분이 바로 우리에게 참된 행복을 주기 위해 오신 질서라는 사실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기 위해 달려가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에서 빛으로 나타나신 예수를 만났고 그는 거꾸러졌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혼란을 느꼈습니다. ‘내가 아는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에서 죽었고, 나는 그를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라고 여겼다. 그런데 눈앞에서 살아나셨다니!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 죽었다면 다시 사실 수 없었을 텐데.’ 그는 신학적인 고민 끝에 놀라운 해답을 얻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죽임 당하신 의미의 재발견이었습니다. 그분이 죽으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인간들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의로우신 그분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선의 질서가 사도의 마음속에 분명하게 다가오게 되었던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그것이 자기가 거스르며 살았던 많은 무질서의 악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렇게 살았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며 예수가 보여주신 하나님의 질서를 따라 하나님과 교회와 이웃을 위해 살기로 다짐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은 왜 그렇게 질서를 따르지 않는 것일까요?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신자는 이미 그 질서를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신자들이 다시 악에 빠지고 그릇된 질서를 따라 살다가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맛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C. 악(惡)과 그릇된 질서 

인간은 선한 것보다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립니다. 항상 아름다운 것은 우리가 동의하든지 말든지 아름답고 선한 것은 인정하든지 말든지 선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마음이 요동치며 변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가득 찼을 때는 하나님이 좋고, 교회가 아름답고, 지체들과 함께 기쁘고, 성경말씀이 사랑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부패하여 죄의 지배를 받게 되면 하나님도 맘에 안 들고, 성경도 달콤하지 않고, 교회도 즐겁지 않고, 영혼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짜 좋고 아름다운 것이 다른 데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아 보이는 것에 마음이 끌리는데 참으로 좋지 않은 것을 좋게 생각하게 됩니다. 

결국 악은 이렇게 그릇된 질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오늘 본문 말씀에 대한 이해가 훨씬 쉬워졌을 것입니다.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할 때 악한 것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보여주신 선하신 질서에 어울리지 않는 것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그것을 선택하는 것은 그것이 어울린다고 믿는 마음 때문인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형성한 질서에 비추어 볼 때 그것이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악을 따라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악을 이기는 사랑에 대해서 깨닫게 됩니다. 

Ⅳ. 악을 이기는 사랑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는 의미는 악을 용납하는 것이 아닙니다. 

A.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는 의미 

여기서 그 의미는 성내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내지 않는 것은 일체가 분노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성내는 자체보다 성냄의 동기가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분노가 없다면 그는 죽은 신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자기 사랑에서 비롯된 성냄입니다. 그래서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행한 실수나 잘못 때문에 개인적으로 많은 손해를 입었을 때 그것에 대해 다른 사람에게 내가 이만큼 당했으니까 적어두었다가 기회가 될 때 갚아야지 하고 생각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네게 행한 잘못을 좀처럼 잊지 않습니다. 호의는 물에 새기고, 원한과 미움은 돌에 새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육신을 통해 그분의 질서를 깨닫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이런 식으로 악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지 타인의 악에 반응하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B. 타인의 ‘악’에 반응하는 인간 

어떻게 보면 이것은 생존본능입니다. 다른 사람이 나에게 부당하게 대할 때 그것을 물리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사도는 어떻게 해서 이렇게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바로 여기서 우리는 악을 이기는 은혜의 힘을 발견합니다. 

C. 악을 이기는 은혜의 힘 

해를 입었을 때 인간의 본성은 복수를 꿈꾸는 것이 당연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에게 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모본을 보여주셨습니다. 흔히 우리가 큰 손해를 입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당했을 때 복수를 꿈꾸지만, 사실상 힘이 없어 억울한 심정을 달랠 길이 없을 때 가장 큰 위로는 악을 끊임없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분명이 너에게 비참한 일이 일어날 꺼야. 하나님이 계시다면 네가 잘 살 것 같으냐?” 그런데 사랑은 이렇게 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첫째는, 자기가 사는 것이 사람의 사랑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기 선을 베풀 때 그 사람이 나에게 행한 것에 비례하여 하지만 신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악인들조차도 그렇게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원래 하나님을 등지고, 그리스도 예수가 받을 형벌을 받을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랑을 주셨다.” 그 이유 때문에 그 사랑의 질서 앞에 신자는 구원을 받았고 그 은혜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사 때문에 그 질서를 다라 살겠다는 결심을 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자신 안에 이런 것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때마다 우리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흠 없으신 분이셨는데도 모든 인간에게 사랑을 받지 못하셨습니다. 그분이 사람의 몸을 입고 선 자체로서 이 세상에 오셨는데도 창칼에 위협을 받으시고 몹쓸 고난과 십자가에 못박이지 않으셨습니까? 그분이 무슨 나쁜 일을 하셨습니까? 세상이 어두웠기 때문에 빛으로 오신 그분을 싫어했고 세상이 악했기 때문에 선으로 오신 그분을 미워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복수를 꿈꾸고 마음에 미움을 품거나, 원수 갚는 관경을 상상하는 것은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결국 주님께로 받은 무한한 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어떤 고난을 당하셨는지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내게 고통을 주었을 때 용서하는 것이 쉽습니까? 실제로 용서하는 것은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알아주지 않는 경우도 허다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악을 이기는 은혜의 힘을 끊임없이 공급받아야 합니다. 그 힘이 내 안에 없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앞에 나아갑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절대 그렇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일은 기도도 하지만 마음으로 원하지 않는 것은 기도자체도 하기 싫습니다. 악에 빠지고 싶을 때는 거기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마음 깊은 곳에서 기도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가 가한 고통이 내 안에 여전히 움직이고 있는데, 그가 입힌 손해와 고통이 지금도 나를 괴롭히고 있는데 용서하고 싶어 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고백해야만 합니다. “나의 죄와 악함을 주님 앞에 고백합니다. 주의 사랑의 줄로 나를 굳게 잡아매소서. 주께서 돌이키시면 내가 돌이킬 것입니다.” 정말로 통절하고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물론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습니다. 그 아픔은 줄어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용서한 사람은 철면피처럼 내 앞에 나타나 다시 우리를 시험할 수 있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이런 고통스런 경험을 통해서 내가 예수는 믿었으나 사실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되새겨야합니다. 

겉모양의 예수에 미친 사람 같지만 마음속에는 악함과 미움이 가득하여 주님의 질서를 해쳤고, 주님의 질서를 어긴 사람보다 내 질서를 해친 사람은 가만두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하지만 나 같은 인간을 위해 멸시와 욕을 참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을 생각할 때, 그리고 그분께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은 용서할 수 없는 인간을 용서하게 하시고, 복수할 칼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결국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발견하게 만드시며 인간은 그분께 의존하며 살아야 할 존재라는 사실도 알게 하십니다. 그 의존의 감정이 바로 ‘예수님께 대한 순수한 사랑’입니다. 이렇게 신앙생활하며 이 교회 안에서 주님을 알아가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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