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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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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 오시는 하나님 (창 21:1~6)


농부는 곡식을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벌레를 잡고, 잡초를 뽑고, 곡식에 물을 주어, 생기를 돋게 한다. 목자는 양떼를 지극 정성으로 돌본다. 위험한 동물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막아주고, 꼴을 베어 먹이고, 절벽이나 웅덩이와 같이 위험한 곳으로, 가지 못하도록, 잠시도 졸지 않고 돌본다. 

목자는 길 잃은 양을 위해서는, 위험한 벼랑이라도 기어 올라간다.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기르시는 양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지극 정성으로 성도들을 돌보신다. 양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먹고, 올바르게 자라고 있는지, 악한 것들에게 시달리고 있지 않은지, 늘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신앙생활은 처음 믿는 사람이나, 오래 믿은 사람이나, 순풍에 돛을 단 것처럼 순탄하지만은 않다. 인생항로가 고해 같다고 했다. 우리는 때로는, 가시밭길을 걷기도 하고, 돌 뿌리에 채어 넘어지기도 하기에,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필요하다. 

내일부터 심방기간인데, 심방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파카드(ד󰙍󰘱)라 하는데, “방문하다, 돌아본다, 권고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마9: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이처럼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친히 돌아보심으로(눅1:68),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가신다. 목사는 하나님의 종으로, 예수님을 대신해서 교인들을 방문하여,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양떼를 잘 자라고 있는지, 돌아보기 위해 방문함을 심방이라 한다. 

  심방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찾아와, 권고하시고 위로하시며 죄인을 구원하는데서 시작된다. 따라서 목회자가 성도들을 찾아가서, 말씀으로 위로하며, 권면하여 신앙성장을 도와주어야 한다.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1. 돌보시는 하나님(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왜 사라를 돌보셨는가?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 사라를, 누이라고 했다. 

그것도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씩 그랬다(창12장, 20장). 실수를 반복하는 아브라함이, 사라가 볼 때 얼마나 한심했을까? 이런 남편을 믿고 사는 사라는,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사라는 아브라함을 원망하지 않았다.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사라는 참았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라를 심방하셨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절망했을 때, 찾아오신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갈 때, 한계를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젊었을 때는 무서운 것도 없고, 부러운 것도 없다. 가난하고 연약해도, 언젠가는 모두 다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젊음의 패기이며, 확신이다. 능력이다. 

그런데 나아가 들수록, 그런 용기가 사라진다. 자꾸 초조해지고 불안해진다.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자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셨다(17:1). 인간은 나이가 들면, 한계를 느낀다. 나이가 젊어도 육체가 약해지면, 낙망하게 된다. 

사라는 나이 많아 늙었고,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다(18:11). “나도 노쇠하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18:12) 하였다. 꿈이 성취될 가능성이 없다고, 느끼고 절망하게 된다. 이때 주님께서 찾아오셔서, 아름다운 꿈을 주셨다. 아들을 주고, 심히 번성케 되리라고 하셨다. 

이렇게 연약한 자에게 찾아와, 위로해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인간의 한계를 느꼈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 나이가 많다고, 육체가 쇠약해졌다고 꿈을 포기하지 말라. 인생을 살다보면 되는 때도 있고, 안 되는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슨 일이든, 다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포기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면 된다. 심방하시는 하나님을 통해, 힘을 얻기 바란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는 자녀가 힘들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지만, 다스리지는 않으신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다스리신다면, 이렇게 수 있느냐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가 있다. 시련과 유혹은 비슷하지만, 분명히 다르다. 시련은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성장시키기 위해서다. 반면에 유혹은 사람들을 넘어뜨리기 위해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시험과 유혹을 구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시험을 통하여, 우리 안에 감춰진 금보다도, 더 귀한 믿음을 드러내시려고 그렇게 하신다. 따라서 시험을 통과하고 합격한다면, 시험만큼 멋진 것도 없다. 시험은 나의 변화를 보여주는 기회다. 

우리는 시험이라고 하는 어려운 때에, 믿음을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돌보시는 하나님을 증거 할 수 있다. 어려움이 있을 때, 믿음의 자리를 떠나지 말고, 믿음을 증명하라. 나오미 가족은 베들레헴 땅에 흉년이 들자, 생명의 떡 집 베들레헴을 떠나 이방 땅 모압 지방에 갔다. 

나오미는 거기서 믿고 사랑했던 남편과, 두 아들마저 잃었다. 세상에서 의지하는 것들이 다 끊어졌다. 나오미는 남편을 잃었고, 두 아들을 잃은 슬픈 여인이었다. 사랑하는 두 아들을 세상에 먼저 보냄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여인에게 자식은 생명줄이다. 가장 소중한 분신이다. 삶의 의미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저버리지 않으셨다. (롯1:6)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돌보셨다’는 말이, 심방하셨다는 말이다. 돌보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소망이 생기고, 인생이 역전된다. 

새로운 빛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인생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하나님은 자비와 사랑을 베푸신다. 그래서 나오미의 며느리 룻이,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어서, 가정의 문제를 해결한다. 그래서 낳은 아들이 오벳이고, 오벳은 다윗의 할아버지이다. 예수님의 조상이 된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신다.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통해(마6:), 깨우쳐 주신다. 새들은 씨를 뿌리지도, 거둬들이지도 않지만, 하나님이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는 길쌈도 수고도 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가꾸셔서, 그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광으로도 비교할 수 없게 하신다. 

하나님은 산천초목을 친히 관리하시고,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딤전5:8)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자기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강조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자기 자녀들을 돌보시지 않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심을, 사모하시기 바란다. 어려운 환경 가운데, 고통 하는 분이 있다면, 사업에 실패한 분이 있다면 낙심하지 마시기 바란다. 건강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낙심하지 마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하나님 앞에 절망하지 마시고, 주님을 사모하시기 바란다. 

2. 말씀하신 대로 이루시는 하나님(1)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기도에 대한 응답을 받아 본적이 없다고 생각하거나, 응답이 어렵다고 생각하거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특별한 사람을 위해서는 가능하지만, 나 같은 보통 사람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시다. 반드시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시다. 사람은 약속하거나, 자기 이익에 따라 약속을 파기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 약속을 이루신다.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내 시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시기가 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짐을 깨닫기 바란다. 

그러므로 약속의 말씀을 믿고 살아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았을 때에는, 그에게 고통이 있었고, 수치와 모욕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살아갈 때에는, 놀라운 축복이 있었음을 깨닫기 바란다.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말씀 위에 굳건히 살아가기 바란다. 라틴어 ‘나는 믿는다.’(credo)는 cor(심장, 마음, 심령)와 do(고정시킨다, 놓는다)라는 뜻의 합성어다. 곧 예수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마음을 고정시킨다는 말이다. 

25년간의 신앙훈련을 받은 아브라함이, 우여곡절 끝에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키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성취하신다. 아브라함에게는 긴 세월이었지만, 하나님께는 이미 정해진 기간이었다. 드디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말씀대로 행하셨다.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꿈에 그리던 아들이다. 100세가 된 아브라함과 90세가 된 사라가, 아들을 낳았다. 말씀대로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이삭을 통해,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셨기에, 오래 기다리게 하셨다. 

왜 이삭을 오래 기다리게 하셨나? 하나님의 뜻이 있다. 이삭은 오실 메시야의 모형이다. 
(1)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에게 땅을 주고, 네 자손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리라”는 “네 자손이”는 일차적으로는 이삭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갈3:16). 

(2) 이삭을 가리켜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라고 하였는데, 예수 그리스도도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독생자이셨다. 또 인간적인 방법이 아니라, 이적으로 태어났듯이,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의 방법으로 이 땅에 오시지 아니했다. 

(3) 이삭이 번제에 쓸 나무를 등에 짊어지고, 모리아 산에 오른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신 모형이다. 모리아 산 번제 단에 결박당한 채, 죽음을 기다리는 이삭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이삭의 출생은, 곧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이삭의 출생으로 기뻐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모습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나 하갈과 이스마엘에게는, 이삭의 출생이 고통이요, 기뻐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메시아를 진실로 기다리던 자에게는, 예수님의 탄생이 큰 기쁨이 되지만, 육적인 자들에게는 고통의 시작을 알리는 날이 되었다. 성경에서 가장 탁월한 능력은 ‘말씀대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의 공격을 ‘기록되었으되’라는 말씀으로 물리치셨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아보셨고, 그 말씀대로 이루어주셨다. 사라가 어떻게 아기를 잉태하였는가? “그 말씀대로”이다. 사라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선하시고, 신실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17:1), 능치 못할 일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18:14).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지 못했다. 그래서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생각해 보기도 하고, 첩을 통해서 아들을 낳기도 했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받은 아브라함이지만, 늙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자신과 사라를 통해서, 아들을 낳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두고, 엉뚱한 짓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심방하심으로,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짐을 보여주셨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한국 교인들의 신앙이 점점 감정에 치우치고, 환상과 이적에 치우침을 보게 된다. 왜 그런가? 말씀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중요하게 강조한다. 성경 66권을 무오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할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의 삶에 능력과 이적이 일어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이적이나 환상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건히 서도록, 방향을 잡아 주신다. 

하나님께서 말씀대로 이루어 주실 때, 아브라함의 반응은 어떠했는가? (3-4) “아브라함이 그에게 태어난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자기 아들의 이름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이삭이라 했다. (17:19) 하나님은 이삭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삭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다. 아브라함은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의 이름을 ‘이삭’이라고 했다.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면 이적이 나타난다. 

3. 웃게 하시는 하나님(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는 기쁨이 충만했다. 그래서 혼자 중얼거렸다. 

“하나님이 나에게 웃음을 주시는구나. 듣는 사람이 나처럼 웃지 않을 수 없겠구나.” 속으로 혼자 웃으며 중얼거렸다. 사라는 기쁨이 충만했다.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라의 기쁨이 사라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사라와 같이 믿음으로 사는 자는, 누구든지 이 기쁨을 누리게 된다. 

하나님은 결국 우리를 웃게 하시려고, 찾아오신다. 심방하신다. 하나님은 벼랑 끝에서 웃게 하신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신 아들의 이름은 이삭이다. 이삭은 ‘웃음’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이삭, 즉 웃음을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주셨다. 그래서 결국에 사라를 웃게 하셨다. 

사라의 웃음은 인생 역전의 웃음이다. 사라는 하갈이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 고통 중에 울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잉태했을 때, 자신을 멸시하는 하갈 때문에 울었다. 아브라함이 자신만 살겠다고 애굽 왕 바로 앞에서, 그랄 왕 아비멜렉 앞에서, 자신을 누이라고 할 때 울었다. 

그런데 이제 사라 자신이 아들을 낳아, 가슴에 품게 되었다. 그의 인생이 역전되었다. 사라는 벼랑 끝에서 웃는 웃음이었다. 절망의 순간,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하나님이 심방을 오셔서 이삭을 얻도록 하셨다. 

그래서 이삭이라는 이름을 부를 때마다, 웃음을 선포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웃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웃음을 주신다. 사탄은 우리의 기쁨을 원치 않는다. 사탄은 우리의 기쁨을 공격한다. 기쁨은 말씀을 통해서만 온다. 그러나 흥분은 말씀과 관계없이, 조작된 분위기를 통해 얼마든지 만들어진다. 

기쁨과 흥분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쁨은 수없이 반복되어도 질리지 않는다. 그러나 흥분은, 얼마 지나지 않으면 질리게 된다. 믿음으로 사는 자는 누구든지, 이런 기쁨을 같이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사라의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되게 해야 한다. 

우리는 웃음을 주는 성도, 웃음이 넘치는 교회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교회에는 웃음이 넘치는 성도들로 가득해야 한다. 웃음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를 웃도록 만들어주시기 위해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웃으면 복이 온다. 웃음은 행복을 가져온다. 웃는 사람은 행복하지만, 웃음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불행하다. 웃음이 있는 가정은 행복하나, 아무리 돈 많고 큰집에 살아도 웃음이 없다고 하면, 행복한 가정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다른 사람을 웃게 하는 기쁨의 근원, 기쁨의 전달자가 되기 바란다. 진정한 웃음은 또 다른 사람을 웃게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세상 속에 들어가서, 기쁨과 웃음을 줄 수 있는 웃음의 전달자들로 살아가기를 원하고 계신다. 하나님으로 웃고 사는 분들이 되시기 바란다. 

유머 책에, 사람마다 다르게 웃는다. 요리사는 어떻게 웃을까? ‘cook cook cook’이라고 웃고, 축구선수는 ‘kick kick kick’하고 웃는다. 살인마의 웃음은 ‘kill kill kill’, 남자 바람둥이는 ‘her her her’, 여자 바람둥이의 웃음은 ‘he he he’라고 한다. 

어쨌든 주님께서는, 힘들어하거나, 절망 중에 빠진 사람들을 웃게 만들어 주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9회 말 투 아웃에서도,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끝났다고 모두 자리를 뜨는 순간에도, 그리스도인은 포기하지 않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역전승을 만들어 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역전의 명수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때문이다. 우상숭배자였던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고, 사기꾼이었던 야곱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아버지가 되었다. 노예로 끌려갔던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 목동이었던 다윗은 이스라엘 왕이 되었다. 

포로로 끌려갔던 다니엘은 바벨론의 총리가 되었다. 고아처럼 성장했던 에스더는 왕후가 되었다. 모르드개를 죽이려고 준비했던, 하만의 장대에 오히려 하만이 메어 달려 죽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던 부자는 죽어 음부에 들어가고, 가난했던 나사로는 죽어 낙원에 들어갔다. 

이렇게 역전시킬 수 있는 힘은, 우리의 희망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역시, 역전승의 사건이었다. 어두움의 세력이 예수님을 쓰러뜨렸지만, 예수님은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던 날, 모두 다 역전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면, 어떤 인생도 역전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절망을 포기하고, 희망을 선택하라. 역전승을 확신해도, 많은 고통의 강을 건너야 한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나가시어, 최후에 웃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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