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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전건축의 방해 (스 4:1~6,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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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건축의 방해 (스 4:1~6, 23~24) 
 
❚사촌이 땅을 사면

우리나라 옛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뜻일까요? 사촌이 잘되면 질투가 난다는 뜻이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사촌(四寸)이라 하면 남이라 할 수 없는 가까운 친척입니다. 그런데 왜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픕니까? 사촌이 잘되면 나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일인데 왜 질투가 납니까? 이 속담은 우리들 심리에 자리 잡고 있는 묘한 욕심과 이기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가까운 사람인데도 잘되는 것을 보면 축하하고 함께 기뻐하기보다 왠지 질투가 생기고 약이 오르고 속상한 마음이 생기는데 저를 비롯해 아마 이런 경험 한 번도 안 한 분이 있을까요? 
나하고 별로 상관없는 사람,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은 오히려 잘되어도 별로 신경이 안 쓰이는데 사촌이나 가까운 사람이 잘되면 괜히 신경이 쓰이고 비교가 되고 그래서 속상한 것입니다. 의사들은 이 속담이 의학적 근거가 있다고 하더군요. 바로 이 배가 아픈 것이 ‘과민성 대장염’ 증세라는 것입니다. 남들 잘되는 것 보면, 가까운 사람 잘나가는 것을 보면 질투도 나고 신경이 너무 많이 쓰여서 과민성 대장염에 걸린다나요? 특별히 아픈 데는 없는데 신경 많이 쓰고 스트레스 받으면 배가 아픈 증상 말입니다.

과민성 대장염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간에 우리 한 번 솔직해 봅시다. 잘 나가는 동창을 보면 괜히 우울해지지 않습니까? 함께 일하는 동료가 인정받으면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습니까? 투자로 돈 벌었다는 이웃을 보면 마음이 급해지지 않습니까? 뿐만 아니라 같은 교회 다니는 성도인데도 잘나가는 것처럼 보이면 축하하면서도 속으로는 좀 질투가 생기지 않던가요? 
그리스도인들도 이 문제에서 크게 예외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저도 솔직히 신학교 동기생 가운데 저보다 잘 나가는 것 같으면, 더 큰 교회 맡고 목회하는 것을 보면 표정 관리는 잘하지요, 겉으로는 축하한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좀 질투도 나고 속상한 때가 있습니다. 솔직히 우리 모두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데 성도가 잘되고 교회가 잘되면 아주 배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누구일까요? 마귀 사탄입니다. 아무튼 마귀 사탄은 우리 하나님 믿는 성도들이 잘되는 꼴을 못 봅니다. 교회가 잘되고 부흥하는 꼴을 못 봅니다. 정말 싫어합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도가 잘 못되고 교회가 잘 못되도록 훼방을 놓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원수들이 배가 너무 아파서 훼방을 놓고 태클을 거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설교 가운데 이런 말씀을 드렸지요? 하나님이 바사 왕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백성이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라는 칙령을 내리게 하셨다고요.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해 온 금은 그릇도 다 돌려주게 하는 등 성전 재건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도록 하십니다. 그래서 에스라 2장에 보면 주전 538년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1차 귀환자 명단이 나옵니다. 
총 4만 2천 3백 6십 명이 포로 생활에서 첫 번째로 돌아옵니다. 3장에 보면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감격에 젖어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번제를 드린 후 이듬해 둘째 달에 성전 재건 공사를 시작합니다. 먼저 성전의 기초를 놓고 나서 백성들은 너무 기뻐서 크게 소리 지르고 또 어떤 사람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울고, 정말 감격에 겨운 착공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나님의 일이 잘되는 것처럼 보이면 영락없이 태클이 들어온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습니다. 우리의 영원한 원수 마귀 사탄이 하나님의 일이 잘되는 것을 그냥 지켜볼 리 없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신앙이 좀 크려고 하면 근심 걱정이 생기게 만듭니다. 자꾸 복잡한 일을 만들고 신앙이 크는 것을 방해합니다. 
교회가 좀 잘되고 부흥하려고 하면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고 문제를 일으킵니다.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어떻게든 성도의 신앙이 크는 것을 방해하고 교회가 잘되는 것을 가로막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 새 성전을 재건하려고 할 때는 마귀 사탄이 어떤 방법으로 방해했을까요? 또 누구를 통해 방해했을까요? 그 방해가 과연 성공했을까요? 이 세 가지를 함께 살펴봅니다.

❚성전건축을 방해한 대적들

첫 번째로 성전재건을 방해한 자들이 누구인지 살펴봅시다.

물론 앞서 말한 것처럼 근본적으로 성전 재건을 방해한 것은 마귀 사탄입니다. 그런데 마귀 사탄은 자신이 직접 방해하기도 하지만 주로 대리인을 내세워 방해합니다. 이것이 마귀 사탄의 전략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알고 하든 모르고 하든 마귀 사탄의 도구로 사용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본문 1절에 나온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들은 누구냐? 바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주전 721년 경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후 북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자기들이 멸망시킨 다른 나라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혈통을 흐리게 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타락시키고 힘을 쓰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요 선민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사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이방인들을 와서 함께 살게 하면 어느새 그들과 결혼도 하고 혼혈아를 낳아서 혈통이 흐려질 테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힘을 쓰지 못하게 될 것 아닙니까? 이런 앗수르의 정책은 그대로 주효합니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 사이에 태어난 혼혈아들이 바로 사마리아인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는 속담처럼 남왕국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당해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간 사이 이 사마리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왕 노릇을 한 것입니다. 그동안 혼혈아라고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설움과 손가락질을 받았습니까? 그런데 마침 유대인들이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지도층들이 모두 포로로 끌려가니 찬스다 싶어서 그들이 없는 땅에서 큰소리치고 권력을 누리며 산 것이지요. 
특히 나중에 느헤미야가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에 성벽을 재건하려고 할 때 끝까지 방해한 산발랏 같은 사람도 사마리아인입니다. 결국 사마리아인이라는 혼혈아들이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이루어진 남왕국 유다의 원수가 되어 끝까지 성전 재건을 방해하고 나중에는 예루살렘 성벽 재건까지 방해한 원수가 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불신자들뿐 아니라 영적 혼혈아는 교회의 적이요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 혼혈아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제가 만든 말입니다만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순수한 하나님의 자녀 혈통을 갖지 못하고 영적 혈통이 섞인 사람들입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자녀생활을 잠시 했지만 곧 하나님을 떠나 세상의 자녀가 된 사람들을 뜻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사람들을 ‘실족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또 ‘잃은 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런 분들이 늘 하는 말이 무엇이냐? “나도 옛날에 다 교회 다녀봤어”입니다. 교회 맛은 봤는데 은혜는 체험하지 못하고 살짝 발만 담가 본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이런 영적 혼혈아들이 나중에 교회의 큰 적이 되기도 합니다.

역사학자들이 20세기 최악의 인물 3명을 뽑았습니다. 바로 히틀러, 스탈린, 그리고 폴 포트입니다. 세 사람 모두 독일, 소련, 그리고 캄보디아를 통치한 독재자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공통점은 독재정치를 하면서 수백만에서 수천만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주범들이라는 점입니다. 그런데 이 셋 가운데 히틀러나 스탈린은 크리스천이었다고 합니다. 히틀러는 어려서 수도원 학교에 다니며 수도원 원장을 꿈꾼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수도원 합창단 단원이 되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등 너무도 음악을 사랑한 사람이고 또 감수성이 예민한 화가 지망생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나중에 독재자가 되어 6백 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하고 세계 제2차 대전을 일으킨 흉악한 범죄자가 되었습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더 합니다. 역사학자들은 히틀러보다 오히려 스탈린이 더 무서운 독재자요 학살자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스탈린도 시인이요 젊은 시절 성직자를 꿈꾸던 성실하고 똑똑한 신학생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물들어 공산주의자가 되면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해 ‘도살자’라는 별명까지 얻은 20세기 최악의 학살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최근에 아주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습니다. 요즘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끔찍한 연쇄살인범 강호순도 옛날 교회 다녀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떤 분이 자기가 옛날에 강호순과 함께 교회 다녔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두 가지 생각이 제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첫째로 이 사람들이 정말 예수를 잘 믿었다면 독재자나 학살자라는 부끄러운 이름으로가 아니라 좋은 성직자, 좋은 크리스천으로 남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입니다. 강호순이라는 사람이 어느 교회를 얼마나 다녔는지 모르지만 그 때 예수를 제대로 믿었다면 끔찍한 연쇄살인범이 아닌 좋은 크리스천이 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교회가 책임이 큽니다. 교회가 불안정한 사람들, 소외되고 힘든 사람들을 잘 보듬고 치료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둘째, 이런 사람들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영적 혼혈아들입니다. 순수한 신앙인의 혈통을 갖지 못하고 혈통이 섞인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나도 옛날에 다 교회 다녀봤어.”라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서 교회를 잠시 다녔거나, 미션 스쿨에 다니면서 ‘채플’이라고 부르는 학교 예배에 참석했거나, 군대에서 멋도 모르고 초코파이 먹으려고 교회 갔다가 세례까지 받았거나, 성인이 되어 남들 따라 몇 번 교회를 가보았거나 그런 분들이지요. 
그런데 이런 분들은 ‘교회 맛’은 봤는데 은혜는 체험하지 못하고 살짝 발만 담가 본 사람들입니다. 문제는 이런 분들 가운데 나중에 교회의 큰 적이 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 조금 안다고, 교회 다녀봤다고 하면서 교회를 경멸하고 누구보다 앞장서서 교회를 비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 조심해야 합니다. 물론 교회에 한 번 온 분들이 교회를 떠나서 이런 영적 혼혈아가 되지 않도록 잘 돌보고 신앙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나아가 지금 교회 밖에서 교회를 비난하거나 경멸하는 분들도 잘 설득해서 교회 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해야 할 책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주변 사람이나 가족이나 가까운 분들이 교회를 떠나 영적 혼혈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반드시 신앙생활 제대로 해야 합니다. 
순수한 영적인 혈통을 가지도록 애써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서 은혜를 체험하는 일입니다. 그렇게만 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신앙을 저버리고 교회를 떠나지 않습니다. 심지어 교회에 문제가 생기거나 목회자나 성도에게 상처를 받더라도 예수님은 떠나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교회의 아군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적군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를 적극적으로 변호하고 교회의 순수성을 지키려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교회의 방관자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남의 일처럼 여기며 구경꾼 같은 자세를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정말 순수한 예수의 피를 가진 순수혈통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진정 아끼고 사랑하며 지키려는 교회의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방해의 방법들

두 번째로 이 원수들이 성전 재건을 어떻게 방해했는지 구체적인 방해 전략을 살펴봅시다.

제일 먼저 사마리아인들은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예수아를 찾아와 “우리도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고 요구합니다(2절). 우리도 당신들처럼 하나님을 알고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얼마든지 너희와 함께 성전을 재건할 자격이 있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이들의 요구를 한 마디로 거절합니다. 왜요? 우선은 혈통적인 순수성 때문입니다. 이들은 순수한 선민 이스라엘이 아니라 혼혈아들이기 때문에 받아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종교는 겉으로 볼 때는 같은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지극히 혼합주의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우물가에서 대화하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 보면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차별하자 예루살렘 성전이 아닌 사마리아 인근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단을 쌓고 그들 나름의 예배를 드렸으며 성경도 구약 전체가 아닌 모세 오경만 인정하여 그들만의 성경인 ‘사마리아 오경’을 볼 정도로 유대교와는 전혀 다른 전통의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니 순수한 여호와 신앙을 가진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코 이들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믿는 것 같아도 실상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왜곡하고 다른 종교와 뒤죽박죽 섞어놓은 혼합신앙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를 위협하는 이단 사이비가 다 이런 혼합종교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 찾고 성경 보지만 실은 자신들의 교주를 신격화하고 다른 엉뚱한 이단 교리를 뒤섞어놓은 혼합주의입니다. 그래서 이들이 오히려 타종교보다 더 위험합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이런 자들과 절대 섞일 수 없습니다.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이단 사이비는 하나님 믿는 것처럼 보여도 복음의 순수성을 가장 위협하는 최대의 원수들입니다. 또한 이단 사이비가 아니더라도 세상의 가치관을 복음과 뒤섞는 행위 등 어떤 혼합주의도 교회는 용납하면 안 됩니다.

이렇게 그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적 사마리아인들은 본격적으로 방해공작에 나섭니다. 바사의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고 성전건축을 방해하는가 하면(5절) 아하수에로 왕과 아닥사스다 왕 때는 유대인들을 무고하는 거짓 상소를 올려 방해합니다. 7절부터 사마리아인들이 아닥사스다 왕에게 올린 글의 내용이 나오는데 한 마디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면 반역을 일으켜 왕의 영토를 잃게 될 것이라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절대 성을 재건하지도 못하게 하고 성전 재건도 허락하지 말라는 거짓과 중상모략이 가득한 내용입니다. 보세요. 대적들의 방해는 우선 아주 끈질깁니다. 오랜 세월 조금도 중단하지 않고 계속 방해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어떤 수단 방법도 가리지 않습니다.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하고 중상모략도 하고 뇌물까지 써가면서 방해합니다. 이것이 원수들의 특징입니다. 나중에 느헤미야서에 보면 예루살렘 성벽재건을 방해하려고 똑같이 거짓말과 무고와 중상모략을 하고 나아가 느헤미야를 암살하려고까지 듭니다. 기억하십시오. 악한 무리들은 이처럼 수단 방법 안 가립니다.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지 다 합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방해가 성공했을까?

마지막 세 번째로 이들의 방해 전략이 과연 성공했는지 살펴봅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공하기는 성공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성공이 아닙니다. 실패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마지막 부분인 23~24절을 보면 사마리아인들이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방해한 결과 아닥사스다 왕이 조서를 내려 결국 예루살렘 성전 재건이 중단되고 맙니다. 원수들의 방해가 성공한 것입니다. 아니,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성전 공사가 16년 동안이나 중단되었다가 에스라 5장에 이르러서 다시 재개됩니다. 이런 대적들의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끝내 성전공사를 재개하고 완공하게 되는 과정은 다음 주일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만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원수들이 방해해도, 아무리 대적들이 끈질기게 수단 방법 안 가리고 훼방해도 결국 하나님의 일은 이루어지고 만다는 사실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원수들이 이긴 것 같이 보이지만 그것은 잠시뿐입니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한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전건축의 걸림돌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교회의 모습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새 성전건축을 위해 기도하며 준비하고 있습니다. 건물만 잘 지으려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더 아름답게 재건하고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더 부흥하고 발전하고 성장하는 교회로 만들려고 하고 애쓰고 있습니다. 그러면 원수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안 있겠습니까? 당연히 가만히 안 있지요. 우리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한다는데, 새 성전을 짓는다는데 배 아파서 어떻게 가만히 있습니까? 앞서 사마리아인들이 했던 것처럼 끈질기게, 수단 방법 안 가리고 방해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성전건축과 교회성장 부흥에 크게 두 가지 걸림돌이 있습니다. 하나는 외부적인 걸림돌입니다. 교회 밖에서 사탄이 방해합니다. 그리고 마귀 사탄에게 자기도 모르게 이용당하는 사람들이 나타나 해합니다. 별 방법을 다 써서 말입니다. 또 하나는 내부적인 걸림돌입니다. 우리 안의 불안요소들을 뜻합니다. “성전 건축 왜 하냐? 그거 가능하겠냐?”는 부정적 사고방식입니다. “뭐 하러 그런 일을 하냐?”는 비웃음, 냉소주의입니다. 
“경제도 어려운데, 우리도 힘든데 과연 우리가 할 수 있겠냐?”는 불안감입니다. “성전 건축 맡은 사람들이 제대로 하겠냐?”는 불신감입니다. 물론 외부적인 걸림돌도 문제입니다만 사실은 내부적인 걸림돌이 더 큰 문제입니다. 많은 분들이 지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너무 어렵다든가 또 공사를 시작하면 이웃들이 가만히 안 있을 것이라고 걱정하지만 사실 이런 외부적인 걸림돌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말 극복해야 할, 몰아내야 할 걸림돌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얼마 전 포항의 어떤 교회에서 설교를 했습니다. 지금은 자그마한 교회인데 항상 교인들이 모이면 이런 말을 한답니다. “우리 교회도 옛날에 잘 나갔는데...” 이게 “아, 옛날이여” 아닙니까? 안 되는 교회, 안 되는 사람, 안 되는 집안의 특징이 이것입니다. “옛날에는 잘 나갔는데 지금은 안 돼”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잘 나간 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안 돼, 우리가 뭘 하겠어 하고 앉아있으니 정말 안 되는 것입니다. 환경이 무슨 문제입니까? 외부적인 조건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사실은 우리 속에 있는 이런 마음이, 이런 절망이 더 큰 문제란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마리아인들이 그토록 끈질기게 방해했지만 다 이겨냈습니다. 문제는 우리 안에 있는 걸림돌입니다. 불신, 냉소주의, 불안 이런 걸림돌들을 우리 스스로가 극복하지 못하면 성전 건축도 교회 재건도 절대 못 합니다. 그래서 이런 걸림돌들을 이기는 힘은 결국 돈도 아니고, 환경도 아니고, 믿음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앞에서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지금은 원수들의 공격이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만, 당장은 환경과 상황이 어려워 보이지만 결국은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성경과 인류역사를 통해 입증된 사실입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반드시 승리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편에 서서 하나님이 승리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사람도 반드시 승리합니다. 결과를 보십시오. 
과정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결과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1500년 전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 때 그러했듯이 오늘 우리가 꿈꾸고 기도하며 추진하는 성전건축과 교회 재건에 하나님이 함께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이 승리 주실 줄로 믿습니다. 모든 걸림돌, 모든 방해와 훼방을 물리치고 끝내 이기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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