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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예수님이 오신 목적 (막 10:4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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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오신 목적 (막 10:42~45)


(막 10:42)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곁에 불러 놓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는 대로, 민족들을 다스린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을 마구 내리누르고, 고관들은 세도를 부린다.
(막 10:43) 그러나 너희끼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위대하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막 10:44) 너희 가운데서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막 10:45)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은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주러 왔다. "

지금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갈등과 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정치권의 갈등, 이데올로기의 갈등, 노사 갈등, 계층의 갈등 등 심각한 갈등과 대립으로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갈등은 우리의 가정안에서도 심각합니다. 부부의 갈등, 부모와 자식의 갈등, 고부 갈등 요즘은 사위와 장모의 갈등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이런 갈등이 있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제자중 야고보와 요한 형제가 주님께 주의 나라가 이땅에 이루어질 때 주님의 좌우편에 앉게 해달라고 청탁을 합니다(37). 그러자 다른 제자들이 야고보와 요한에게 화를 냅니다(41). 서로 높은 자리에 앉으려 하다가 갈등이 발생하였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불러 놓고 중요한 교훈을 하십니다.  제자들에게 갈등을 넘어서는 섬김의 삶을 교훈하십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큰 목적중에 하나가 섬김을 받고자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목숨까지 희생하며 섬기려고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인 갈등과 대립을 해결하는 열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사회와 가정의 갈등과 대립을 풀려면 우리 모두 예수님처럼 섬김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높은 자리를 욕심내지 말고 서로 종이 되어 먼저 섬기려고 해야 합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일수록 낮은 자세로 섬겨야 합니다. 공로가 크고 잘난 사람일수록 교만한 마음을 비우고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1. 예수님은 섬기려는 목적으로 오셨습니다.(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인자가 온 것은'이란 표현은 예수님의 사명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지난 두 주일에 걸쳐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것과 영원한 생명과 풍성한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임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막10:45에 의하면 예수님의 또 하나의 사명이 바로 섬김이라고 말씀합니다.   

본문은 구원과 섬김이 결국 하나임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섬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섬김은 결국 섬김의 대상에 대한 최선의 유익을 구함이 아니겠습니까? 주께서는 인류에 대한 최선의 유익은 우리의 구원임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는 우리를 섬겨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자신의 목숨을 속죄의 제물로 드리기로 결단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의 목적이 바로 섬김이었습니다. 섬김의 절정이 바로 자신의 목숨의 드림이었고 그 결과가 저와 여러분을 포함한 인류의 구원이었던 것입니다.

본문 42절과 43절에서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세속적 리더십과 주님의 새로운 섬김의 리더십을 차별화하셨습니다. 먼저 42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소위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여기서 "주관한다"는 말을 표준 새번역 개정판에서는 "마구 내리 누르고"라고 번역하고 "권세를 부린다"는 말은 "세도를 부린다"는 말로 번역했습니다. 공동 번역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 누른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 리더십의 전형을 볼수 있습니다. 그것은 지배하고 내리 누르는 리더십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높이려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이 이 땅에 들어오기 전의 우리 한국 사회는 유교적인 사회였습니다. 유교적 문화가 바로 이런 계급 지향적인 혹은 권력 지향적 문화를 만들어온 요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한국인들은 모인 곳에서 누가 높은가를 결정해야 그 다음 교제가 성립합니다. 보십시오. 우린 만나면 제일 먼저 뭘 하나요? 나이 따지고, 입사 연한, 학교 선후배 가립니다. 그 배후에도 이런 숨겨진 권력 욕구가 도사리고 있는 것입니다. 웃 사람과 아래 사람을 구별하기 위해서 입니다. 옛날  한국인의 살고 있는 방에도 계급이 있었습니다. 웃목 아랫 목을 구별하지 않습니까?  언어구조에도 상대방의 높이에 따라 자신을 친하는 호칭은 무수하게 변신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상대가 누구이든 자신을 칭하는 호칭이 하나이셨습니다. "인자가--"이 명칭은 계급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의 역할, 사명을 상징하는 호칭이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사람이 아들이 되어 이땅에 오신 사명을 나타내고 있는 호칭이셨습니다. 그분에게는 자리가 중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역할과 사명이 중요하셨을 따름입니다.  우리 사회가 변하려면 속히 섬김의 리더십으로  리더십 체질 개선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면 세상과 다른 리더십을 보여야 합니다. 43절의 말씀이 어떻게 시작됩니까? "너희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너희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인류는 수많은 유형의 리더십을 실험한후 오늘에 와서야 가장 건강한 리더십이 "섬김의 리더십"(Servant Leadership)임을 발견했습니다. 1977년 로버트 그린리프라는 그리스도인이 저술한 "종의 리더십"이 주목을 받기 시작하다가 1996년 "섬기는 지도자 되기"라는 책이 세계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면서 오늘 날 전 세계 100대 기업의 약 절반은 사원들의 훈련과정에 "종의 리더십"을 가르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은 2천년전에 이런 섬김의 리더십을 가르치셨고 행하여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 최초의 완벽한 "섬기는 리더"이셨습니다. 


2. 예수님은 섬김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할 이유는 주께서 친히 명하시고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목숨을 드리는 거창한 일 뿐 아니라 가장 작은 일로도 가능한 것을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장에 수건과 대야를 들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은 친히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행한 가장 작은 일도 목숨을 드리는 일 못지않게 소중함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자동차 주차할 때 이렇게 주차하면 이웃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배려하여 주차하고, 엘리베이터 타실 때 몸이 불편한 이웃들이나 노약자들을 먼저 배려하는 일, 다른 분들이 엘리베이터 타도록 양보하고 자신은 층계를 이용하여 걷는 일, 교회 봉사에도 남이 가장 꺼려하는 일들을 자원하는 일, 복도에 주보나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줍는 일, 다른 사람을 생각하여 화장실을 깨끗이 사용하는 일- 이런 사소한 것에서 섬김의 정신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발 씻음은 샌들을 신고 다니던 시절 더위가 심한 사막지대에서는 손님들에 대한 예절이어서 집 문 곁에 물동이와 대야를 준비했다가 귀한 손님이 도착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섬김의 실천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제자도 이런 섬김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으로 보여 집니다. 

요한복음13:3은 "저녁 먹는 중에"라는 표현으로 시작합니다. 사실 발 씻음은 저녁 전에 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런 천한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서로 다른 누군가가 발을 씻겨드리겠지 하며 눈치를 보다가 아무도 주님의 발을 씻기는 섬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마침내 저녁 드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십니다.  주님은 먼저 서둘러 자신의 식사를 끝내시고 이 소중한 기회를 섬김을 가르치는 기회로 사용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실천 후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본'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누군가가 따라 오게 하려는 것 아닙니까?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 따라하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들을 예수의 제자로 자처한다면 예수의 본을 따르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그렇게 못할까요? 자신의 이기심 때문입니다. 내 한 몸 조금 편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작은 고난들을 견디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할 수가 있겠습니까?  섬김은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이셨습니다. 
  
섬김은 보다 더 가진 자가 덜 가진 이들을, 보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보다 편리하게 사는 자가 덜 편리하게 사는 이들을 섬기는 것이 성경적 원칙입니다.  저는 이 원칙이 우리 교회안에서 적용되는 것을 보고 싶습니다. 건강한 이들이 불편한 이들을 섬기는 데[ 적극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모습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영적으로 성숙한 이들이 미숙한  이들을 능동적으로 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주심 같이 자기의 소중한 것을 기쁨으로 내어 줌으로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줄 수 잇는 최고로 아름다운 것이 무엇입니까?  시시한 것을 마지 못해 던져 주듯이 해서는 감동을 줄 수 없습니다.  최고의 것을 정중하게 최선을 다하여 드리듯이 내어줄 때 예수님의 섬김을 따라는 것이 됩니다.  

또한 우리 교회는 우리 보다 더 연약하고 힘들어하는 많은 교회들을 섬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 동안 우리 교회가 그런 노력을 안했던 것은 아닙니다. 선교사를 파송하고 여러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느낍니다. 저는 그냥 연약한 교회들에게 선교비를 얼마 지원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 실제로 교회들을 개척할 때 개척을 돕기 위해 우리 교인들이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금년은 창립 25주년인데 이를 기념하여 가장 모델적인 분립개척을 하는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최소한 4명에서 10명 정도가 개척멤버가 되어 개척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이렇게 교회적인 섬김을 감당하면 주님께서 무척 기뻐하실 것입니다. 천사들에게 자랑하실 것입니다. 

페르시아의 왕, Cyrus 라고 하는 왕이 어떤 날 전쟁을 하면서 자기 적수, 그 원수의 나라의 왕자와 그 부인과 아이들을  포로로 잡아 왔습니다.  이제 재판을 해서 죽이려는 그 시간에 그는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만일에 내가 당신들을 죽이지 않고 당신을 놓아주면 당신은 나에게 무엇을 주겠는가?"하고 물었습니다.  왕자에게 말하기를 당신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냐고. 
"내가 가진 재산의 절반을 주겠습니다." 
"이 아이들을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했더니 
"재산 전부를 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마누라를 놓아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했더니 
"내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그랬어요. 

왕은 깜짝 놀라서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이 어디 있단 말인가? 감동이 되가지고 "다 놓아줘라" 그랬습니다.   이제 그날 밤 집에 돌아가서 왕자는 축하파티를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보면서 말했습니다. 
"오늘 그 Cyrus 왕은 참 훌륭하지. 내가 보니 참 미남이더니만. 의젓하고 지혜롭고 훌륭한 왕이더라" 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 아내는 하는 말이 
"저는 왕의 얼굴을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럼 무얼 봤는가?" 
"나를 위해서 대신 죽겠다는 한 남자를 보았습니다. 당신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다른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멋이 있는 남자입니까?  감동받은 그 부인은 평생을 남편을 위해서 목숨을 다해 섬겼을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늘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섬기시고자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이제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 본을 보이셨다면 이제 우리도 섬김을 결단할 때가 아닐까요?  아씨시의 성자 프랜시스의 라베르나 산에서의 기도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주님, 저에게는 주님처럼 섬기다가 고난받아본 일이 없습니다. 제 몸에는 못 자국이 없습니다. 저에게도 주님의 고난을 알게 해 주십시오." 

그의 기도의 응답으로 그의 손과 발에 거룩한 5개의 못 자국이 생겼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도 섬김을 통한 거룩한 흔적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주님, 우리가 어떤 차를 소유했나를 자랑하지 않고 얼마나 많은 사람을 태워 주느냐를 열심내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사는 집의 크기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느냐에 관심을 갖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는 것보다 그 지위를 이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로 삼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무엇을 가졌는가 보다는 남에게 무엇을 베푸느냐를 중요하게 여기고 살게 하소서. 
주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 보다는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되느냐를 생각하게 하소서. 
우리를 진정한 친구로 여기고 섬겨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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