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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행 4: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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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 (행 4:13~22) 


우리는 오순절 날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리로 나가 예루살렘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 나라와 지방의 말로 들을 수 있게 말하기 시작했고 그때 처음으로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그로 인한 죄 사함과 구원의 도를 전하는 첫 대중설교를 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또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기도하러 성전에 들어가다가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어나 걷고 뛰게 했으며 그 사람 때문에 [솔로몬 행각]에 모이게 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두 번째 설교를 하게 되었음을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보다 정확히는 말하자면 [이방인의 뜰]은 예수님께서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을 다 내쫓으셔서 깨끗하게 하시기 전까지는 제물로 바쳐질 짐승들과 그 장사꾼들과 환전상들로 말미암아 소란스러운 장소였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성령 충만함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말씀이 울려 퍼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곧 세 번째 설교를 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이번에는 공회 앞에서입니다.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설교는 성소에 있던 제사장들까지도 다 들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아직 백성에게 말하고 있을 때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달려왔습니다(행4:1). “성전 맡은 자”란 어떤 사람인가 하면 제사장계급구조에서 대제사장 다음으로 두 번째 서열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모든 예식에서 대제사장을 보좌하며 필요할 때는 그를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성전 맡은 자”는 그 명칭에 걸맞게 성전 역내에서의 질서유지의 최고책임과 체포명령권까지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전 맡은 자”의 직위는 다음에 대제사장으로 지명 받기 위한 디딤돌로 여겨졌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엣세네파 사람들과 함께 1세기 유대인들 사이의 3대 사상집단에 속하는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은 제사장계층을 대표하는 무리들로서 “사두개인들”이란 이름은 옛날 솔로몬 시대의 대제사장이었던 사독의 이름에서 유래했으리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과 신학적 입장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며 대단히 정치적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의 정교한 해석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었고 엣세네파 사람들은 외딴 곳에 모여 수도적 영성생활에 전념하고 있었던 데 반해 사두개인들은 정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전과 공회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바리새인들은 신학교를 장악하고 엣세네파 사람들은 기도원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사두개인들은 총회와 노회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은 대개 많은 재산들을 갖고 있었고 따라서 그 소유를 보전하기 위해 정치적 현상유지와 안정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정권과도 타협하며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절대적으로 중요하게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로마 정권 또한 그들에게 협력적인 사두개인들을 선호하며 그들에게 많은 권한과 이익을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대제사장을 필두로 하는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로마정권과의 충돌을 피하며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최우선의 관심사였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렀다는 것은 성전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달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급히 몰려온 것은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백성을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행4:2에 보면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예수의 부활”을 전하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지 않고 “예수 안에 죽은 자의 부활이 있다”고 가르치고 전함을 싫어했습니다.

예수라는 개인 한 사람이 죽었다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사두개인들에게는 예수 안에서 누구나 부활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입니다. 예수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더라 하는 것은 사두개인들이 무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사도들이 떠드는 것이 누구나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이라면 그것은 사정이 달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나 부활할 수 있다는 말은 그들에게는 메시야사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의 메시야사상은 곧 민중봉기와 외세의 전복과 다윗왕국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로마 정권이 가장 경계하고 절대로 용납하거나 관용하지 않을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두개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바였습니다. 그런데 사두개인들에게는 혁명적 사고나 다름없이 여겨지는 부활과 “새롭게 되는 날”(행3:19)과 “만물의 회복”(행3:21)과 제2의 모세(행3:22)를 베드로와 요한이 많은 군중이 모인 데서 거론하자 예민해지진 사두개인들은 그들을 결코 그냥 놔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혁명적 사고가 백성 사이에 널리 퍼져 민중봉기로 발전하기 전에 그 싹을 잘라내야 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붙잡혔습니다. 성전 역내에서의 질서유지와 체포명령의 권한을 갖고 있던 “성전 맡은 자”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 그들을 잡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심문을 하기 위해서 이튿날까지 가두었습니다(행4:3). 베드로와 요한은 오후 세시에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고 했는데 날이 저물었을 때 붙잡힌 것을 보면 몇 시간 동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입니다. 이튿날 관리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등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여했습니다(행4:5-6).

공회가 소집된 것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웠습니다(행4:7). 회의를 주재하는 대제사장과 칠십 명의 공회원들이 반원형으로 둘러앉은  앞에 베드로와 요한이 선 것입니다. 설교하기에 딱 좋은 환경이 저절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공회원들은 사도들에게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백성의 관리들과 장로들아, 만일 병자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한다면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8-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는 이 유명한 말씀으로 끝나는 베드로의 세 번째 설교에 대한 공회의 반응이 무엇이었는지를 전하는 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공회의 반응은 “놀람과 곤혹스러움”이란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놀람과 곤혹스러움이 어떠했는지는 본문을 다시 한 번 읽는 것만으로도 설명이 필요 없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먼저 13-14절을 읽습니다: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 눅21:12-15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손을 대어 박해하며 회당과 옥에 넘겨주며 임금들과 집권자들 앞에 끌어가려니와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너희는 변명할 것을 미리 궁리하지 않도록 명심하라. 내가 너희의 모든 대적이 능히 대항하거나 변박할 수 없는 구변과 지혜를 너희에게 주리라.” 말씀하신 적이 있는데 예수님의 그 약속이 사도들의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회원들을 놀라게 하고 곤혹스럽게 한 것은 단지 베드로의 거침없는 설교만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에 의해 고침을 받아 일어나 걷게 된 사람이 사도들과 함께 그들 앞에 서있었다는 사실이 또한 그들의 놀람과 곤혹스러움을 가중시켰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끝에 보면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합니다. 사십 년 이상을 걷지 못하고 사람들에 의해 성전 미문 앞에 실려와 거기 앉아서 구걸해온 그였기에 그를 모르는 사람은 예루살렘에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멀쩡히 나아서 당당히 서있는 모습을 보고 공회에 모였던 모든 사람은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14절을 다시 봅니다: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비난할 말이 없는지라.” 그가 어떻게 거기에 사도들과 함께 서있을 수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사도들이 체포될 때 그도 함께 체포되었다는 말이 없고 또 그가 체포될 이유도 없었을 터이니 그는 함께 구금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공회에서 그가 사도들과 함께 공회원들 앞에 서있었다면 그는 밤을 지새우며 최대한 사도들로부터 가까운 데 머물러 있었으며 그들이 다시 모습을 나타내자 공회가 모인 장소로 따라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에게 육신의 치유를 얻게 해준 사도들을  떠나지 않고 그들에게서 영육간의 온전한 구원의 길을 가르침 받기를 열망했음이 분명하다고 보게 됩니다. 

그리고 솔로몬 행각에서의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진리를 발견하고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에게 신체적 치유뿐 아니라 참된 구원의 진리를 깨우쳐준 베드로가 잡혀가는 것을 본 그는 그를 위해 증언해야겠다는 책임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가 자기에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말하고 자기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을 때 자기의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일어나 걷고 뛸 수 있게 되었음(행3:6-8)을 확실히 밝혀야겠다고 굳게 결심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회에서 사도들 곁에 서게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말없이 사도들 곁에 서있다는 것만으로도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한 베드로의 증언에 대한 가장 확실한 증거였을 것입니다.

공회원들의 놀람과 곤혹스러움이 어떠했을지 15절부터 계속해서 봅니다: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이르되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까? 그들로 말미암아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그들을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공회 앞에서 조금도 굽히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외치는 사도들 앞에서 공회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는 위협밖에 없었습니다.

자유주의 비평가들 가운데는 공회원들끼리 모이는 비공개 석상에서 일어난 일을 사도행전의 기자인 누가가 어떻게 알 수 있었겠느냐 물으며 빈정거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아직은 사울이라 불리던 바울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보다 확실하게는 널리 존경 받던 율법 선생인 가말리엘이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그 가말리엘이 자기 문하에 있던 바울에게 알려주었을 것이고 후에 바울을 통해 누가에게까지 전해졌을 개연성은 충분하고도 남는 것입니다.

오늘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할 기회를 계속해서 만들어 가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들로 하여금 어디서나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말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들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과 생명의 주이심을 힘 있게 뒷받침해줄 표적을 행할 권능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사도들은 붙잡히고 갇혀서 그들의 복음전도가 저지당해도 주의 말씀은 저지당하지 않고 퍼져나가며 믿는 이의 수가 오히려 더 증가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둘째는 온 세상 만민의 유일하신 참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며 그 안에서 얻는 치유와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담대함입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는 말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는 말은 오늘의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누린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증언해야 합니다. 교회밖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돈을 구하는 일밖에는 모르는 이들에게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희망 없이 자포자기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걷고 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며 수십 년간 들은 것을 한 마디도 전하지 않는 삶이 과연 그리스도인의 삶이겠습니까? 그래가지고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이 은혜를 아는 삶이겠습니까? 나가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고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수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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