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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오벧에돔의 집 (대상 13: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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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벧에돔의 집 (대상 13:1~14)
  
군대에서 장성급 상관이 예하부대로 시찰을 나오게 되면 소위 "별이 떴다."라고 하면서 전 부대원이 거의 비상근무나 다름없는 상태로 돌입하게 됩니다.
  
부대 안팎을 구석구석까지 깨끗하게 청소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군장비는 물론이요 사병들의 복장에 이르기까지 흠 하나 보이지 않도록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입니다. 
  
예하부대장으로서는 자기 부대의 모습이 그 장군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에 다음 번 진급심사가 걸려 있고, 각개 사병들 역시 잘하면 포상휴가도 받을 수 있지만 잘못 걸리면 영창까지 갈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 장군은 평소에도 부대장의 상관이요 사병들의 사령관이지만 그처럼 직접 부대시찰을 나오게 되면 그 '별의 권위'가 더욱 강력하게 느껴지게 되면서 모든 부하 장교들과 병사들이 평소보다 몇 배로 더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궤' 즉 언약궤는 구약 시대에 대표적인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언약궤에 가까이 가게 되면 그만큼 하나님 임재의 권위가 실감나게 느껴지면서 절로 두렵고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까닭에 그 언약궤 앞에서 어떻게 행동했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극과 극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똑같은 언약궤를 모시면서도 극명하게 대조되었던 '웃사의 비극'과 '오벧에돔의 축복'을 비교해 보면서,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신자가 항상 마음에 새기고 삶 속에서 지켜야 할 마땅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말씀에 대한 순종 없이 의식(儀式)만 있는 곳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진노로 나타나게 됩니다. 

본문 1절부터 4절의 말씀에 "1다윗이 천부장과 백부장 곧 모든 장수로 더불어 의논하고 2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르되 만일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았으면 우리가 이스라엘 온 땅에 남아 있는 우리 형제와 또 저희와 함께 들어 있는 성읍에 거하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에게 보내어 저희를 우리에게로 모이게 하고 3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궤를 옮겨오자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매 4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고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궤는 엘리 제사장 시절에 블레셋과의 전쟁터에 가져나갔다가 오히려 적군에게 빼앗김을 당했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리신 재앙 때문에 그것을 벳세메스로 보내었고 벳세메스 사람들이 그것을 또 기럇여아림으로 보내었는데, 그 이후 약 20년 간, 이스라엘이 블레셋의 위협을 받던 기간 동안 내내 언약궤는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다윗이 왕권을 잡고 나라가 안정되자 그는 그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려고 작정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휘하의 모든 고위 공직자와 "더불어 의논"한 후에 또한 이스라엘의 "온 회중"에게 이것은 "너희가 선히 여기고 또 우리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거사라고 선포하면서 이 일을 추진시켰습니다.
  
그러자 "뭇 백성이 이 일을 선히 여기므로 온 회중이 그대로 행하겠다 한지라"고 기록된 대로 온 이스라엘 백성이 다 만장일치로 찬성했습니다.
  
이처럼 언약궤를 옮겨 오는 일의 출발은 그 이유가 정당했고 목적도 분명했으며 일치단결의 참여 자세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순조롭게만 여겨졌습니다.

그런 분위기는 언약궤를 옮기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5절 이하 8절까지에 기록하기를 "5이에 다윗이 애굽의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온 이스라엘을 불러 모으고 기럇여아림에서부터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고자 할새 6다윗이 온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바알라 곧 유다에 속한 기럇여아림에 올라가서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 이름으로 일컫는 궤라 7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웃사와 아히오는 수레를 몰며 8다윗과 이스라엘 온 무리는 하나님 앞에서 힘을 다하여 뛰놀며 노래하며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주악하니라"고 했습니다. 

다윗은 그 언약궤를 옮기기로 한 날에 "시홀 시내에서부터 하맛 어귀까지" 즉 그 당시 다윗의 통치권 안에 있던 이스라엘 영토의 남쪽 끝에서부터 북쪽 끝까지에 있는 "온 이스라엘"을 다 동원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는 언약궤 운반을 위하여 "새 수레"를 특별 주문 제작해서 준비해 두었습니다.
  
또한 그 수레 앞에는 특별 오케스트라가 앞장서서 연주를 했으며 그 뒤를 다윗 왕과 수많은 백성들이 찬송하고 춤을 추고 기뻐하면서 행렬을 지어 따라갔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눈에 그 언약궤 운반은 최고의 정성과 승화된 감격이 함께 어우러진, 정말 나무랄 데 없는 완벽한 행사로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최고조의 분위기가 치솟던 중에 실로 찬물을 끼얹은 듯한 뜻밖의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9절로 11절에 기록하기를 "9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10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웃사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11여호와께서 웃사를 충돌하시므로 다윗이 분하여 그곳을 베레스 웃사라 칭하니 그 이름이 오늘날까지 이르니라"고 했습니다. 

그 행렬이 "기돈의 타작 마당"이란 곳에 이르렀을 때, 그 언약궤를 실은 수레를 끌고 가던 소들이 갑자기 뛰면서 난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실려 있던 언약궤가 당연히 흔들리게 되었고, 그 수레를 몰고 있던 두 사람 중의 하나였던 "웃사"는 그것이 떨어질까 봐 걱정이 되어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보고 "진노하사" 그를 "치셨고" 그 결과 웃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두말할 것 없이 이것은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고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웃사가 언약궤를 붙잡은 것은 그것을 보호하려는 선한 의도에서 나온 것임이 누구의 눈에도 분명한 사실 같았는데, 웬걸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 웃사를 즉결처단해 버리신 것이었습니다.
  
다윗 역시 기분이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장소를 "베레스 웃사"라고, 즉 '(하나님이) 웃사를 치셨다'라고 이름지었던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과 온 이스라엘 백성이 그처럼 최고의 정성을 동원하고 더할 나위 없이 기쁜 마음으로 언약궤를 옮기고 있던 와중에 "웃사를 충돌하실" 정도로 홀로 진노하셨던 것이었습니까?
  
그 이유는 우선 그 언약궤 운반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언약궤를 운반할 때에는 반드시 '막대기에 꿰어 레위 지파의 고핫 사람들이 어깨에 메어서'(민 4:15, 7:9) 운반하도록 정해져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다윗은 그것을 '수레에 실어서' 운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새 수레요 아무리 아름다운 행렬이라고 해도 애초부터 이미 하나님의 눈에는 벗어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연히 다윗을 벌하셨어야 할 것 같은데 왜 일견 억울하게 웃사가 죽임을 당했던 것이겠습니까?
  
왜냐하면 웃사는 지난 20년 동안 언약궤를 자기 집에 보관하고 있었던 아비나답이라는 제사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레위인의 한 사람으로서 언약궤를 어떻게 운반해야 하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 비록 다윗으로서는 선한 의도에서 계획을 세웠더라도 그 방법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웃사라도 알아차리고 다윗에게 말해 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중대한 직무유기를 범하고 있던 웃사를 벼르고 계시다가 그가 '막대기에 꿰어 있지 않았던' 언약궤를 자기 손으로 직접 붙드는 치명적인 죄를 저지르는 순간 즉시 그를 치셨던 것이었습니다.

6절 하반절을 다시 보시면 "여호와 하나님의 궤를 메어 오려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므로 그 이름으로 일컫는 궤라"고 했습니다.
왜 이 장면에서 갑자기 언약궤에 대한 묘사가 등장하는 것이겠습니까?

또 언약궤에 대한 묘사에도 다른 여러 가지 사실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 언약궤의 '덮개' 즉 날개를 편 천사 형상의 "두 그룹"들이 양쪽 끝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속죄소'에 대해서만 여기서 언급했겠습니까?
왜냐하면 그 속죄소야말로 "두 그룹 사이에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그것이야말로 그 궤가 '하나님의 궤'라고 불리게 된 이유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언약궤가 누구보다도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다루어야 할 레위인에 의하여, 다른 사람도 아닌 제사장의 아들이라는 자에 의하여 온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멋대로 다루어지고 있었으니, 하나님으로서는 이보다 더한 신성모독이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것은 결코 '너무 심하신 처사'가 아니라, 그 행렬을 따르고 있던 다른 백성들이나 다윗은 손대지 않으시고 웃사 한 사람만 죽이신 것은 오히려 지극히 관대하신 처사였던 셈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이런 모습이 없겠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많은 성도들이 함께 모인 자리요 선한 목적을 가지고 정성과 열정까지 가미되어 함께 진행하는 행사이지만, 거기에 필수적으로 동반되어야 할 순종의 자세와 경외의 마음은 정작 완전히 결여되어 있는 경우는 혹 없겠습니까? 
다른 그 어떤 자리보다도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진실하고도 강력하게 자각하고 있어야 마땅한 자리에 참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심령에는 오히려 이런 '웃사의 허점'이 생길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저와 여러분은 정말 두려워하며 조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세상 사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식에 참석은 했지만 신랑신부와 함께 기뻐해 줄 줄 모르고 저희들끼리만 희희낙락하는 우인(友人)들이 있다거나 양가 부모들에게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마음은 없이 그저 잔칫상만 실컷 즐기고 돌아가는 하객이 만약에 있다면 신혼부부나 혼가로서는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국무회의를 하는 자리에서 대통령의 지시에 온 신경의 촉각을 세워도 모자랄 판인데 만약에 장관이나 보좌관이 저 혼자 딴 생각이나 하고 있다가 무슨 질문을 받게 될 때 깜짝 놀라는 꼴을 보인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참 기가 막힐 일이지만,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감히 그런 무례를 아주 흔히 범하는 것입니다.
우선 예배시간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마음과 몸 전체가 100퍼센트 온전히 하나님 한 분께만 드려지고 그분과만 교통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정말 두말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자리에서조차 설교 시간에 말씀을 듣는 데에 집중하지 않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교인은 정말 얼마나 '간 큰' 사람이겠습니까?
  
지금 자기가 찬양을 올리고 있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전혀 자각하지 않고 그저 사람들의 귀에 내 목소리가, 내 연주가 어떻게 들릴까 하는 것만 온통 신경을 쓰고 있다면 그런 찬양대원을 저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보고 계시겠습니까?
안내위원이나 헌금위원을 맡게 된 딱 한 달조차 좀 더 일찍 나와서 준비하기는커녕 걸핏하면 예배시간 직전에 교구담당 전도사에게 전화 한 통 달랑 걸고서 "오늘은 못 나가겠어요."라고 당당하게(?) 통보하는 서리집사들마다 만약 하나님께서 웃사를 치신 것처럼 즉결처단하신다면 과연 주일마다 이 지상교회들 안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겠습니까?
  
아름다운 예배당, 정숙한 분위기 - 겉으로는 아무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예배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그 한 사람의 심령이 하나님께서 바로 그 자리에 임재하고 계심을 망각하고 있다면 그 사람의 예배라는 것은 실제로는 감히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임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자신의 언행을 주의해야 할 시간은 예배시간뿐 아닙니다.
교회의 '천부장' 같은 장로들과 '백부장' 같은 집사들이 모여 '하나님이 선히 여기실' 일들을 계획하고 추진해야 할 당회나 제직회의 시간도 당연히 '오직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만 진행되어야 마땅합니다. 
'온 회중'들이 '여호와께로 말미암은' 봉사활동이나 전도와 선교운동 등을 위하여 같이 기도하면서 충성하기 위하여 모이는 전도회 월례회의 자리도 지금 하나님께서 친히 이 회의를 주재하고 계신다는 마음자세로 임해야 할 뿐인 것입니다.

그렇지 못하면, 비록 온 회원이 만장일치로 가결하여 무슨 선한 사업이라는 것을 작정하고 실행한다 해도, 그 모든 과정은 그저 '사람이 보기에 좋은 새 수레'에 언약궤를 싣고 '저희들끼리만 그 앞에서 흥겨워하는 허례허식'이 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의식,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하는 행사조차 실제로는 그저 '몸만 와 있고 마음은 떠난' 자리가 될 수 있음을 각별히 경계함으로써, 특히 여러 사람이 모여 있는 교회의 공적 예배나 모임의 시간에도 각자 개인의 심령으로는 시종일관 '하나님의 임재'를 자각하는 가운데 '말씀에 철저히 주의하고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경외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경건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축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온 백성들 앞에서 언약궤 운반이라는 이 거룩한 행사를 진행하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를 경시하고 말았던 웃사와는 아주 대조적인 사람이 바로 뒤를 이어 나타났습니다. 
  
본문 12절 이하 14절까지의 말씀에 "12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가로되 내가 어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13궤를 옮겨 다윗성 자기에게 메어 들이지 못하고 치우쳐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가니라 14하나님의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서 그 권속과 함께 석 달을 있으니라 여호와께서 오벧에돔의 집과 그 모든 소유에 복을 내리셨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웃사의 사건이 일어난 후에도 다윗은 자기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정확하게 깨닫지는 못했습니다.
아마도 그는 지금 언약궤 운반을 계속 강행하다가는 무슨 더 큰일을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당일에 언약궤를 옮겨 오는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에 임시로 갖다 두었습니다.
여기의 '가드'란 '블레셋의 성읍 가드'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영토 중에서 특별히 레위인 고핫 자손에게 할당되었던 '가드림몬'이란 동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벧에돔은 레위 지파 중에서도 고핫 자손이었을 것이며, 그렇다면 그는 언약궤를 보관할 만한 사람으로 적격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오벧에돔의 집에 언약궤가 옮겨진 후 아주 의외의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 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석 달"을 있었는데 그동안 "여호와께서 그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내려 주셨던" 것이었습니다.
조금 전에는 그 언약궤가 무슨 하나님의 저주나 재앙만을 불러 올 것처럼 여겨졌었는데, 오벧에돔의 집에서는 오히려 그 언약궤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집안 권속들이 형통하게 되고 재물의 축복까지 넘치게 되는 등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극과 극의 결과가 된 것이었겠습니까?
비록 본문에서 세세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우리는 사건의 전후를 비교함으로써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아까 웃사는 그 언약궤를 운반하면서 자기 딴에는 그것을 보호하려 하다가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입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만약 오벧에돔도 웃사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가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고만 생각했다면 그 언약궤를 자기 집안에 들이기를 꺼려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는 조금 전에 일어난 사건의 원인이 바로 웃사가 레위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 때문임을 알았고 그래서 그는 더욱 조심하는 자세로 그 언약궤를 자기 집에 모셨을 것입니다.
  
즉 언약궤가 오벧에돔의 집에 있음으로 해서 그의 집이 복을 받게 되었다면 그는 그 궤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날마다 상고했었을 것임에 틀림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에 이 언약궤를 직접 모시게 되었다고 한 번 가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인디애나 존스의 'Raiders of the Lost Ark'(잃어버린 법궤를 찾아서)라는 영화에서 제멋대로 만들어 낸 것 말고, 십계명 돌판과 만나 담은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들어 있는 그 진짜 언약궤를 바로 여러분의 거실에 석 달 동안 모셔 놓고 살게 되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구약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의 최고 상징인 줄을 알고 믿는 사람이라면 그 집안 생활이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겠습니까?
그 앞에서는 당연히 말 한 마디라도 더욱 조심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행동거지 하나도 더욱 정숙하게 했을 것입니다.
부부 싸움이나 자식 야단치는 것도 적어도 그 언약궤 앞에서는 하지 못했을 것임에 분명합니다.

평소에는 드리지 않던 가정예배도 그 언약궤가 들어온 후부터는 매일 빠짐없이 드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그 언약궤를 보고 있노라면,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 집안에, 우리 가족 사이에 항상 임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단 일분일초도 잊으려 해야 잊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언약궤 때문에 절로 그 신앙생활이 달라질 것이고, 그렇게 신앙생활이 달라지면 축복이 쏟아질 수밖에 없는 것은 자동적인 순서가 될 뿐인 것입니다.
저는 오벧에돔의 집에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적인 예배나 교회 모임의 자리에서는 그래도 우리가 어느 정도는 조심을 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의 사적인 처소에는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목사의 눈도 없고 다른 교인의 눈들도 닿지 않습니다.
 거기는 직분에 따른 어떤 체면 때문에 신경 쓸 필요도 없고 타인의 눈치 때문에 억지로 무엇을 행할 필요도 없는, 아주 자유롭고 편한 곳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곳에서, 나의 골방에서, 부부의 침실에서, 우리 가족만의 식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여기에도 계신다.'라는 사실을 우리가 항상 의식하고 산다면, 그 모든 것을 위해서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그 얼마나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보이겠습니까?
정말 복을 내려 주지 않으실 수 없는 특별대상, 아니 그것도 최고로 좋은 복을 제일 먼저 내려 주실 '0순위'의 자녀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언약궤가 없습니다.
그런 것이 하나 있어서 교인들 집에 돌려가면서 갖다 놓을 수 있기라도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더욱 잘 상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우리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는 그런 언약궤를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 놓으신 줄 아십니까?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심령을 '성령의 전'으로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언약궤 위의 속죄소가 아니라,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인격의 지성소에다 하나님께서는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을 각각 지어 놓으셨습니다.
  
우리의 심령이 바로 성령께서 거주하시는, 그것도 일시적인 임재가 아니라 날마다 아예 상주하시는 성전이 되어 있음을 우리가 자각한다면 우리 역시 절로 그 오벧에돔처럼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식탁에서 손님처럼만 잠시 동석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정예배를 드리는 시간에만 천장에서 내려다보듯이 잠깐 보고 가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우리 마음속의 생각과 영혼 깊은 곳까지 감찰하시며 임재 아니 동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의 말이,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학교생활과 직장생활까지도 당연히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그처럼 매사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경건생활'을 지킨다면 범사의 축복은 절로 따라오지 않겠습니까?
  
오벧에돔은 '석 달'만 그렇게 살았지만 우리는 바로 내 속에 좌정하시는 보혜사를 통하여 '평생'토록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음을 기억함으로써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가 되는 축복을 마음껏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웃사는 언약궤를 이십 년 동안이나 자기 집에 모시고 있었지만 정작 그것이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임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살다가 그 언약궤를 손으로 만지는 마지막 선을 넘는 순간에 그때까지 참고 기다리시던 하나님께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오벧에돔 역시 그와 같은 레위인이었고 똑같은 언약궤를 단지 삼 개월 동안만 모시고 있었지만, 그는 그 언약궤를 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날마다 상기했던 까닭에 그처럼 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잊는 그 시간 그 장소가 바로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 쌓이는 곳이며, 반면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심을 깨닫고 처신하는 그 시간 그 장소가 바로 그 사람에게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축복이 넘치는 곳이 되는 것입니다. 

서론에 예를 들었던 장군의 예하부대 시찰은 부하 장교와 사병으로서는 사실 영광스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스타'께서 최전방에까지 몸소 방문해 주시고 철책선에서 경계근무를 서는 병사를 친히 격려해 주시는 것은 군의 사기를 최고로 고조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 장군의 명령대로 근무를 하고 있지 않는다든지 혹은 그 장군의 시찰을 무시하고 긴장하지 않고 있다면 '제대로 걸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독신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임재'야말로 신앙생활에 최고의 긴장과 사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동기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주의 선배들은 그 '하나님의 임재를 마음과 몸으로 늘 느끼면서 사는 신앙생활'을 가리켜 '코람데오'(Coram Deo) 즉 '하나님 앞에서'라는 아주 멋진 두 단어의 표어로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사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므로 언제 어디에서나 임재하고 계시지만,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도 나는 하나님 앞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느냐 못하느냐의 차이는 '오벧에돔'과 '웃사'처럼 완전히 극과 극으로 갈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에서도 그저 몸만 와 있을 뿐 마음은 그 하나님의 면전에서 아주 딴 데로 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하여 우리는 정말 두려워하며 극도로 조심해야 합니다.
또한 '여호와의 집'에 모였을 때에 시종일관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줄 아는 성도는 다른 사람의 눈이 없는 '골방'과 '집안'에서도 성전에서와 똑같은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경건한 자세를 부단히 지키게 됩니다.
  
언약궤를 모심으로써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상기하고 복을 받았던 오벧에돔의 집 - 우리 경향교회의 모든 예배와 모임과 봉사가 이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대로만 따라가는 '코람데오'의 현장이 되며, 우리 경향의 권속들의 각 가정과 학업과 생업에 바로 이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신전 인격자'들에게 약속된 '오벧에돔의 집'의 축복이 넘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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