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느 6:1~9)

  • 잡초 잡초
  • 468
  • 0

첨부 1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더라도 (느 6:1~9)

  
세종대왕이 만드신 우리 한글은 세계가 인정하는 우수한 문자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한글의 뿌리가 되는 한자도 인정을 받는 문자입니다.  한자는 현대까지 사용하는 유일한 고대문자입니다.  한자를 가르쳐 보통 ‘표어문자(表語文字)’라고 합니다.  ‘단어를 표기하는 문자’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한자는 하나의 문자가 하나의 말을 나타냅니다.  

한자를 표어문자와 함께 ‘표의문자(表意文字)’라고도 합니다.  표의문자는 의미를 표시하는 문자라는 뜻입니다.  한자는 그림이나 모양, 형상 등을 통해 의미와 소리까지 아울러 드러냅니다.  그래서 한자는 한 단어가 가리키는 귀한 의미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람 인(人)'자가 있습니다.  ’인‘자를 보면 두 개의 선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단순히 선이 잇닿게만 쓰지 않았습니다.  우선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서로 비스듬히 누워 있고, 좌측이 우측보다 더 깁니다.  무엇보다도 우측은 좌측 선분을 버텨주는 모양을 합니다.  그래서 가장 안정감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서로 연결되고, 더불어 산다는 뜻을 내포합니다.  그런 사람들의 연결은 한 사람의 양보로 서로를 세워간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 내가 딛고 서려 하면 상대도 팽팽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 하나는 반드시 숙일 수 있어야만 한다는 심오한 뜻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사람을 떠나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평생 많은 사람들과 함께 합니다.  바로 그 사람들이 내 삶에 큰 위로와 기쁨을 줍니다.  가만히 보면 인생에서 사람이 내게 주는 기쁨과 위로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사람을 통해 힘을 얻고, 용기를 갖고, 깨달음도 갖고, 위로를 받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사람에게서 아픔과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위로도 사람이지만, 가장 큰 아픔도 사람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힘들게도 하지만, 때론 사람이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의 힘든 것을 극복하듯이,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힘든 것도 극복해야 합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더불어 사는 우리 인생에 때론 힘들게 하는 사람을 통해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첫째는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느헤미야의 말씀을 함께 읽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요즘 매일 새벽기도회에서 묵상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이 말씀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만 온 성도와 함께 교훈을 나누기 위해 오늘 다시 소개하게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포로이후 시대를 주도한 이스라엘의 지도자입니다.  스룹바벨, 에스라와 함께 참담했던 한 시대에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귀하게 쓰임 받은 인물입니다.  스룹바벨은 성전재건축의 역사를 이루었고, 에스라는 영적각성의 일을 주도했으며,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 쌓는 일을 감당했습니다.  

성전재건축이 14년 이상 오래 걸린 것에 비해, 성벽은 두 달도 안 된 기간에 완공했습니다.  하지만 결코 순탄하게 된 일이 아니었습니다.  끊임없는 방해와 공격이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산발랏과 도비야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일인데 이들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가만히 보면 ‘일’이 힘든 게 아니라 ‘사람’이 힘들게 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의 전반부는 그것을 전합니다.  특히 본문은 힘들었던 느헤미야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처음에는 공동체적으로 방해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여기에서는 개인적으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힘든 과정을 잘 대처해 나갑니다.  

본문에 보면 산발랏과 도비야는 느헤미야에게 편지를 보내 ‘오노’평지에서 만나자고 제안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오노까지는 약 48키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곳으로서 이스라엘 땅의 변두리였습니다.  그들이 이곳으로 느헤미야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두말할 나위도 없이 그를 제거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을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중에 분별했던 것입니다.  얼핏 만나자는 것이 화친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금까지 서로 얼굴을 잘 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만나자고 하니까 이젠 뭔가 그들이 마음을 접고 협조하려는 의도로 보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2절에 느헤미야는 이렇게 말합니다.  “산발랏과 게셈이 내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서로 만나자 하니 실상은 나를 해하고자 함이었더라”  느헤미야는 바른 판단력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오라고 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4번이나 동일하게 요청했지만 가지 않았습니다.  결국 이 일이 무산되자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이제 그들은 본격적으로 모함을 시작합니다.  성벽건축이 바사 왕에 대한 모반이라는 누명을 씌웁니다.  그런 상황이 전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몹시 힘듭니다.  사람이 이렇게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때 느헤미야가 보여준 행동이 무엇입니까?  결코 그들을 대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를 보아도 같이 비방하거나, 공격하거나, 같이 악한 행동으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느헤미야의 해법이었고,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아주 귀한 진리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사람이 힘들게 해도 대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결국 대적은 대적을 낳습니다.  싸움은 싸움을 키웁니다.  전쟁은 더 큰 전쟁을 일으키고,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만듭니다.  앞서서 말한 ‘사람 인(人)’자에 담긴 뜻처럼, 내가 딛고 서려 하면 상대도 결국 일어서려고 합니다.  누구 하나는 숙일 수 있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나온 진리가 바로 ‘지는 게 이기는 것이다’는 말입니다.  팽팽한 대립은 다 사는 것 같지만 결국 다 죽습니다.  그러나 한쪽이 포기할 때 싸움은 끝나는 것입니다.

‘치킨게임(chicken game)’이라는 말입니다.  1950년대 미국의 갱단 사이에서 유행한 무서운 게임입니다.  한밤중에 도로의 양쪽에서 두 명의 경쟁자가 자신의 차를 몰고 정면으로 돌진합니다.  그러다가 충돌 직전에 핸들을 꺾는 사람이 지는 경기입니다.  핸들을 꺾는 사람은 겁쟁이, 즉 치킨으로 몰려 명예롭지 못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쪽도 핸들을 꺾지 않을 경우 물론 게임에서는 둘 다 승자가 되겠지만, 결국 충돌함으로써 양쪽 모두 자멸하게 됩니다.  당시 이것이 미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임스 딘이 주연했던 영화 ‘이유 없는 반항’도 바로 이것을 바탕으로 합니다.  후에 이 말은 정치용어가 되었습니다.  특히 1950년부터 1980년대까지의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간의 군비 경쟁을 빗대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고, 특히 사람사이에 극단적인 다툼과 경쟁으로 치닫는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사람이 우리를 힘들게 할지라도 이제 더 이상 치킨게임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둘 다 살수도 있지만 다 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는 게 이기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진실은 언제나 통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사람이 힘들게 할 때 느헤미야의 해법으로 잘 극복해 가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자기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해치려는 계략을 알았던 느헤미야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곧 그들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이르기를 내가 이제 큰 역사를 하니 내려가지 못하겠노라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게 하고 너희에게로 내려가겠느냐 하매”  이것은 대적을 향한 느헤미야의 지혜로운 답변이요, 또한 지혜로운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이던 느헤미야에게 하늘의 지혜가 임한 것입니다.  먼저 그의 답변을 보십시오.  지금 큰 역사를 감당하고 있으니 잠시도 자리를 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성벽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한순간도 현장을 떠나지 않았고, 자리를 비우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지혜로운 행동이 돋보입니다.  ‘어찌하여 역사를 중지하고 가겠느냐’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하던 일을 계속하겠다는 것입니다.  중지할 수 없고, 잠시도 중지할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지금 건기가 계속되어 일을 합니다.  하지만 우기가 오면 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기가 오기 전에 일을 마쳐야 했습니다.  성전건축 때에는 중단되어서 오래 걸렸습니다. 

 하지만 성벽건축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중단하지 않고 집중했던 것입니다.  물론 내외부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순간도 중단하지 않았기에 52일 만에 완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느헤미야가 사람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보여주었던 놀라운 해법입니다.  자기 일을 계속하라는 것입니다.

사실 가만히 보면, 지금까지 산발랏과 도비야가 느헤미야와 백성을 방해했던 것은 포로에서 돌아온 그들이 예루살렘 땅에서 뭔가 열심히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서로 몰랐고, 서로에게 이처럼 대적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일을 시작하면서 방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해도 없고, 대적도 없고, 심지어는 격려도 없습니다.  지금 내가 뭔가 열심히 일을 하기에 반응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만히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맡겨진 모든 위치에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누워 있지 않고, 앉아 있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움직이고, 일하고, 행동하는 것은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입니다.  죽은 자는 누워있지만, 살아 있는 자는 눕지 않습니다.  죽은 자는 미동도 없지만 살아 있기에 움직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살아있기에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분주히 활동합니다.  그렇게 움직이며 사는 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죽은 자처럼 삽니까?  그럴 수는 없는 법입니다.  움직이고 일하기에 어려움도, 위로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힘들 때에도 지금까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그것은 곧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방해하고 공격한다고 중단하고 주저앉으면 나는 죽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것을 믿음으로, 은혜로 깨달았던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지는 게 이기지만, 자기에게 지는 것은 지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질수 없습니다.  나의 가치는 결국 움직이는 현장에서 찾는 것입니다.  

여러분, 힘들어도 자기 일을 중단하지 마시고, 일을 계속 하십시오.  묵묵히 최선을 다해 감당하십시오.  바로 거기에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바로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완성됩니다.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가서는 안 됩니다.  쓰지 않는 그릇에 녹이 습니다.  결국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 법니다.  우리 모두 그런 믿음으로 감당해 가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힘들게 할 때 보통 세상 사람도 우리처럼 대적하지 않고, 하던 일에 매진하면서 풀어갑니다.  그러나 그것이 해결되지 않고 맺혀 있다면 결국 상처와 아픔은 남게 됩니다.  또한 해결되지 않으면 오히려 더 큰 화를 불러일으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해결하는 것과 우리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합니다.  무엇이 달라야 하겠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가장 다른 해법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자의 차이가 이것입니다.  불신자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아니 기도를 모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신앙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도를 알고, 기도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래서 모든 일을 기도로 해결해야 합니다.  눈물 나게 힘들 때, 억울해서 고통스러울 때, 답답하고 숨이 막힐 때, 몹시 세상과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할 때, 우리는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한나’라는 여인이 당한 어려움을 압니다.   한 집안에 다른 아내였던 ‘브닌나’로 인해 그는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사람이 그를 가장 힘들게 했습니다.  너무도 그녀를 격동시켜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럴 때 한나의 해법은 오직 기도였습니다.  성전에 올라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눈물과 통곡으로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한번만 돌아보시고, 생각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의 기도는 상처도 치료되고, 사무엘이란 아들을 얻게 되는 은혜도 받았습니다.  기도로 그녀는 힘든 과정을 극복한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그를 시기하는 많은 대적들로 인해 몹시 힘든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의 대적은 한순간도 다윗을 가만히 두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다윗의 해법도 역시 기도였습니다.  시편에 나오는 다윗의 시는 모두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다윗이 많은 시편을 지은 것은 그만큼 힘든 시절을 거쳤다는 뜻입니다.  힘들고 어려울 때 그는 기도하고, 찬양하고, 하늘을 보며 기다리고 인내하며 하나님을 의지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기도를 드리느냐 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헤미야를 통해 배웁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지금과 같은 때 나오는 기도가 과연 무엇입니까?   ‘하나님 억울합니다, 원통합니다, 분합니다,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를 모함하는 자들, 비방하는 자들, 나를 해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 혼 좀 내주세요, 내가 하나님을 위해 지금까지 이렇게 일했습니다.  아시잖아요, 그런데 사람이 힘들게 합니다.  하나님 저들을 가만히 두지 마시고 손 좀 봐주세요...’ 아마 그렇게 기도할 것입니다.  그것이 모든 인간의 동일한 심정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이제 내 손을 힘 있게 하옵소서”   쉬운 성경으로 9절을 유의하여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우리의 원수들은 우리에게 겁을 주려 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하면 우리가 힘을 잃고 성벽 쌓는 일도 하지 못할 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 내 손에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에게 힘만 있으면 문제가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힘이 없기에 낙심하고, 좌절하고, 포기하고, 넘어집니다.  그러나 내게 힘만 있으면 어떤 상황에도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 힘을 주십시오. 내 영혼아 힘을 내어라, 약해지지 말고, 쓰러지지 말고 다시 일어서라’  결국 느헤미야는 이런 기도로 힘을 얻고 어려운 과정을 극복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배워야 할 해법입니다.

여러분, 세상이 나를 힘들게 하지만, 사람도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극복해야 합니다.  이겨야 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대적하지 마십시오.  활동하여 생긴 일이니 자기 일을 계속 하십시오.  그리고 힘을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분명 힘을 주실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어렵고 힘든 모든 과정을 잘 이겨 나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