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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일을 잉태하는 성도 (느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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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잉태하는 성도 (느 2:1~12)


6.25전쟁이 한창일 때 한 종군 취재 기자가 포탄이 나르고 있는 전쟁터의 참호 속에 들어가 있던 한 유엔군 병사에게 이 순간 당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에게 내일을 주십시오."(Give me tomorrow)

문화적 선진국 사람들과 후진국 사람들의 차이는 내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다고 합니다. 문화적 후진국에 속하는 사람들일수록 내일을 걱정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저축의 습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냥 오늘을 즐기면 되고 오늘을 생존하면 그뿐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흑인들의 노예로부터의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흑인 사회 지도자들이 동료 흑인들에게 가장 힘들여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 저축의 중요성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물론 훨씬 나아지기는 했지만 빈곤층 흑인들의 경우는 아직도 저축생활을 몸에 익히는 것을 그렇게 어려워한다고 합니다. 돈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 원인은 내일에 대한 혹은 미래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의 bc 586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함락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간 후 성전히 파괴되고 이스라엘의 신앙은 퇴색되어 졌습니다. 느헤미아에게 들려오는 고향의 소식은 참으로 암담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느헤미아 1:2-3절에 보면 어느 날 느헤미아는 고향에서 온 하나니라고 하는 사람에게 고향에 대한 형편을 듣습니다. 

“내 형제들 가운데 하나인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내게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의 형편을 물은즉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바벨론으로 끌려오지 않고 예루살렘애 남아 있던 형제들이 거기서 큰 고초를 당하고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는 소식에 그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자기 민족과 나라의 장래가 암담하기 그지 없음을 느끼고 울었습니다. 그리고 느1:4-5절에 보면 수일동안 앉아서 울고 하나님 앞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이르되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여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간구하나이다" 

그는 자신의 조국과 자기 민족에게 안정되고 가치 있는 내일을 선물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기도했습니다. 울면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서 당장 그의 조국에 어떤 변화가 나타났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포기하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내일에 대한 희망과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내일을 잉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조국의 내일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가 내일을 잉태하기 위해 기도하며 해야만 했었던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이 질문을 통해 얻고자 하는 대답이 무엇입니까? 
믿음의 사람들은 오늘 현실의 문제때문만이 아닌 내일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일 일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주님께서 내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잉태하지 않는 내일은 없습니다. 내일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하루 지나면 내일이 옵니다. 

밤이 지나고 날이 밝으면 오늘의 입장에서 볼때 그것은 내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내일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의 의미를 알고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내일은 주어집니다. 그래서 오늘 메시지의 제목을 내일을 잉태한 사람이라고 하고 싶습니다. 내일을 잉태한 사람은 어떻게 합니까?

1. 기도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희망을 품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희망을 버린다면 더 이상 기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느헤미야가 조국을 위해 기도를 시작하여 마침내 조국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재건하는 프로젝트에 착수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경과 된지 아십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2:1에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 니산월에--"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때가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 재건 프로젝트가 시작된 달이었습니다. 니산월은 4월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이 일에 대한 기도를 시작한 것은 언제였습니까? 

1:1에 보면 "--아닥사스다 왕 제이십년 기슬르 월에---" 기슬르월은 11월에서 12월경입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4개월 이상 경과한 것입니다. 그는 그동안 충분히 기도한 것입니다. 충분히 기도하며 충분히 기다린 것입니다. 그 동안 느헤미야 안에서 조국의 아름다운 내일이 잉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들 그리고 우리 한국 성도들 같으면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언제인가부터 우리 한국인들은 기다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움직이는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어야 하는 민족,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가 자동으로 닫히는 그 시간을 인내하지 못하고 단추를 눌러 닫아야 하는 대표적인 민족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제일 먼저 배우는 말이 "빨리 빨리"가 되었습니다. 이런 습관은 우리의 기도 생활에도 영향을 끼쳐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자 당장에 응답을 기대합니다. 소위 인스턴트 문화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기도조차 인스턴트식의 도구로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기도란 시간과 함께 열매를 맺는 하나님과의 교통의 장인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누가18:1이하에서 주께서는 기도를 가르치면서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억울한 일을 당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찾아가 지속적으로 탄원하는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기도하고 믿음으로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그러면 왜 주께서는 당장의 응답보다 기다림의 과정을 거치게 하실까요? 
아마도 그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기도의 응답 그 자체보다 기도하면서 우리가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를 더 중시하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기 한 재벌가문이 있다 하십시다. 재벌의 아들은 아버지의 유산을 빨리 상속받는 일에 무엇보다 관심을 갖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재벌 아버지가 지혜로운 분이라면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관심은 단순한 재산의 상속이 아닌 상속받기에 합당한 자질을 갖추는 아들로서의 인격적인 성숙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로 기다리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기다림의 시간이야말로 아들에게 있어서 내일을 잉태하고 준비하는 시간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빛나는 내일을 잉태하려면 기도하고 기꺼이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2. 기도하며 계획해야 합니다.

느헤미야가 기도하며 기다리면서 또 한 가지 한 일이 있었다면 내일을 계획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압니까? 

느 2:4-5절에 보면 느헤미야가 그가 모시고 있던 왕으로부터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라는 결정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왕이 내게 이르시되 그러면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하시기로 내가 곧 하늘의 하나님께 묵도하고 왕에게 아뢰되 왕이 만일 좋게 여기시고 종이 왕의 목전에서 은혜를 얻었사오면 나를 유다 땅 나의 조상들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건축하게 하옵소서” 

느헤미아는 네가 무엇을 원하느냐 고 물을 때 그는 마음 속에 품고 기도하던 제목을 내어놓게 됩니다. "내 고향 내 조국 이스라엘 땅 예루살렘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6절에 보면 “왕이 내게 이르시되 네가 몇 날에 다녀올 길이며 어느 때에 돌아오겠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그 일을 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걸리게 되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 

이 때 6절 마지막 부분에 보면 그가 "기한을 정했다"고 했습니다. 기한을 정했다는 것은 예루살렘 성 재건 프로젝트가 소요될 시간을 산출해 놓고 있었던 것입니다. 7절 이하에는 그가 왕에게 이 프로젝트의 완수를 위한 구체적인 도움의 리스트를 열거합니다. 

이 리스트를 보면 우리는 느헤미야가 이 기간 동안 얼마나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우선 왕이 주변 총독들에게 조서를 내림으로 그가 예루살렘까지 도착하는 일에 장애가 없게 명령서를 하달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8절에는 왕의 삼림감독 아삽에게 조서를 내려 성과 가옥 건축에 필요한 충분한 재목들을 공급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는 기도만 한게 아닙니다. 미리 치밀하게 계획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계획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두 가지 상이한 입장이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하면 되었지 계획이 무슨 필요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분들의 입장을 극단적인 신비주의적 접근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계획하면 되었지 기도가 무슨 필요가 있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고를 역시 극단적인 이성 주의적이고 인본주의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하며 계획합니다. 기도에서 비전과 계획이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꿈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꿈이 실현되느냐 못 되느냐를 결정하는 요소가운데 하나가 계획을 갖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 계획 여부에 따라 비전과 개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개꿈 이야기가 나왔으니까 이런 비유를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집에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두 이들 모두 개를 기르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아들 모두 개꿈을 꿉니다. 그런데 한 아들은 꿈만 꾸는데 한 아들은 개꿈을 꾸며 개집을 설계하고 짓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이 아버지이고 한 아들에게만 개를 사주어야 한다면 어떤 아들에게 개를 사주시겠습니까? 개꿈만 꾸는 아들입니까? 아니면 소원을 품고 계획하는 아들입니까? 

그런데 문제는 왜 우리가 계획하지 못할까요? 
많은 분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계획하고 실현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존 맥스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실패가 두려워 아무것도 계획하지 못하는 사람은 실패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John Maxwell) 그러므로 복된 내일을 잉태하고자 하십니까? 
엎드려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비전을 받으십시오. 그리고 그 주께서 주신 비전에 따라 내일을 계획하십시오. 치밀하게 계획하십시오. 


3. 기도하며 기회를 찾아야 합니다.

기회를 찾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며 계획한 바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결정적인 때를 찾고 그 때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회란 지나가면 다시는 붙잡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기회를 풍자하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옛날 희랍 시라큐스의 거리에 이상하게 생긴 사람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날개를 달고 있는 사람인데 앞머리는 무성하고 뒷머리는 대머리였습니다. 동상아래 이런 문구가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누가 그대를 만들었는가?- 리시퍼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기회. 
그대의 앞머리는 왜 그렇게 무성한가?- 내가 올 때 사람들이 쉽게 붙잡을 수 있도록. 
그대의 뒷머리는 왜 그렇게 대 머리인가?-내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다시 붙잡기 어렵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기회는 붙드는 사람의 것입니다. 지나간 기회는 붙들 수가 없습니다. 

드디어 느헤미야에게 기회가 찾아 왔습니다. 2절에 보면 느헤미야의 얼굴에 수색 즉 근심의 표정이 있는 것을 보고 왕이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온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 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3절의 느헤미야의 대답을 읽어보십시오. 
"왕께 대답하되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이 이제까지 황무하고 성문이 소화되었으니 내가 어찌 얼굴에 수색이 없사오리까?" 

4절에서 왕이 다시 묻습니다.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는 다시 묵도합니다. 감사의 기도와 함께 이제 결정적인 기회를 달라는 기도였을 것입니다. 이제 5절을 보십시오. 드디어 그의 요청을 내놓습니다. '나를 유다 땅 나의 열조의 묘실이 있는 성읍에 보내어 그 성을 중건하게 하옵소서" 그리고 그는 마침내 기도의 응답을 받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막연한 기다림이 아니라 기회를 찾는 기다림이어야 합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그 기회를 얻기 위해 기도해 오지 않았습니까? 1:11을 다시 읽어보십시오. "---이 사람(아닥사스다 왕)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이 기도는 구체적으로 기회를 얻기 위한 기도였고 드디어 그 기회가 도래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분을 전도하고 그가 구원받기 위하여 기도한다면 "그가 구원받게 해 주십시오"라고만 기도하십니까? 정말 그가 구원받기를 소원하신다면 좀더 구체적으로 "그에게 전도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막연히 기도하면 주께서도 막연히 응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가 구체적이라면 주님의 응답도 구체적일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기회를 위하여 기도했고 기회가 왔을 때 기회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성령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그 기회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자서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961년 존 F.케네디가 미 합중국 대통령 당선자가 된후 취임식 전에 빌리 목사님이 케네디 대통령 당선자의 집에 초청을 받습니다. 케네디는 그에게 선거기간 개신교와 천주교의 종교문제로 갈라진 미국인들의 마음을 치유하고 하나 되는 일에 노력을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빌리 목사님은 "최선을 다 하겠다"고 대답을 합니다. 그때 갑자기 케네디는 "목사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습니까?"고 물었답니다. 그래서 "물론입니다" 했더니 그러면 "제가 다니는 우리 천주교도 그것을 믿습니까?"고 묻더랍니다. "신조(사도신경)에 보면 그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에서는 별로 그런 내용을 설교나 강론으로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목사님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해서 빌리 목사님은 케네디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차이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그의 초림은 죄 문제의 해결과 새 삶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구주로서의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위해서였으며, 그의 재림은 구원받지 못한 인류의 심판과 천국의 완성을 위해서 다시 오셔야 하며 그때에 비로소 인류에게 진정한 평화가 올 것이라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케네디는 "흥미롭군요, 나중에 다시한 번 자세히 듣고 싶습니다"고 했다고 합니다. 

그후 2-3년이 지나간 후 빌리 그래함은 케네디 대통령을 국가 조찬 기도회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때 빌리 목사님은 감기에 걸려 있었는데 조찬기도회가 끝난 후 케네디가 "목사님, 잠시 백악관까지 가 주시겠습니까? 잠시 목사님께 묻고 싶고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요"하더랍니다. 그래서 빌리 목사님은 "제가 감기가 들어서 병균을 옮겨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중에 다시 기회를 주시겠습니까?" 했더니 "다음 기회라고요.---(더듬으면서)그렇게 하시지요."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해 11월22일 케네디 암살 소식을 듣게 됩니다. 

대통령 암살 소식을 듣자 마자 빌리 그래함 목사님의 뇌리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감기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했을 때 "다음 기회라고요--'하고 더듬던 모습이었다고 합니다. 다음 기회는 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때에 민감한 인생을 사셨습니다. 
요2:4과 7:8절에 보면 그는 나서지 않으셔야 할 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고 하셨습니다. 
그의 사역의 절정의 시간에 요9:4절에 보면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소명을 이루시는 십자가의 고난의 시간이 가까이 왔을 때 요 17:1절에 보면 드디어 그는 "내 때가 이르렀사오니--"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의 잔을 마시며 당신의 때를 붙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대신한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인류는 구원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고 그는 모든 민족 가운데 구주와 주님이 되셨습니다. 그리고 여러분과 저는 새로운 내일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그의 제자 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인생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그분에게 나아와 다시 기도하며 다시 그가 주실 내일을 잉태하는 자가 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기도하며 기다리십시오. 기도하며 계획하십시오. 그리고 기회가 오거든 이제 몸을 던지십시오.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승리의 깃발을 꽂을 내일을 위하여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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