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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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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막 2:1~12)


한 치 앞도 모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인생은 불확실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어느 성가 가수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라고 노래합니다. 그렇습니다. 누구도 내일 일을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이 그렇고 또 원치 않는 질병이 그렇습니다. 지난 가을까지만 해도 그래도 잘 돌아간다던 경제가 세계적인 불황으로 인해 이제는 어떻게 자리를 지킬 수 있느냐가 관건인 그런 때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아직 몸이 건강하다면 아무리 어려운 한파라고 해도 이기지 못할 이유는 없습니다. 

문제는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온 육신의 질병 가운데 우리 스스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그런 질병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병이 다 힘들겠지만 특히 우리를 힘들게 하는 병이 과연 무엇일까요? 나름대로 사람들은 자기가 겪고 있는 질병이 가장 힘들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도 치료가 가능한 병이라면 다행이지만 치료의 방법조차 알 수 없는 그런 병에 걸려있다면 이건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함께 하는 가족들에게도 큰 고통을 안겨주는 일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많은 질병 가운데 하나인 중풍에 걸린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도록 합니다. 

세상에는 거동을 하지 못하는 중풍병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주 건강하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쓰러지고 난 다음에는 아주 형편이 말이 아니게 되는 병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풍입니다. 이는 뇌혈관이 막혀서 생기기도 하고 뇌혈관이 터져서 생기기도 합니다. 그 이유야 어디에 있든지 중풍에 걸리게 되면 몸이 기능이 일부가 마비가 된다는 점에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래도 침을 놓는다든가 여러 가지 치료를 통해 효과를 보기도 하지만 일단 중풍에 걸리게 되면 예전처럼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가 없다는 점에서 아주 치명적입니다. 

중풍에 걸리게 되면 우선 말이 어눌해집니다. 그리고 수족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정신은 말짱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을 말로 표현하는 것이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전처럼 자유롭게 걸을 것 같은데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래서 옆에 돕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나병은 그래도 자기 혼자서 움직이는 데는 아무 불편이 없습니다. 단지 사람들과 따로 떨어져 생활해야 한다는 불편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에 병에 걸린 것을 알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다다른 다음입니다. 그러니까 서서히 병이 진행이 되어 왔지만 그것을 본인이나 주위 사람들이 다 모르고 있을 뿐 입니다. 

한데 중풍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아주 사람을 형편없게 만들어 버리고 맙니다. 전처럼 자유롭게 활동할 수가 없습니다. 몸도 마음을 따라 주지 않을 뿐 아니라 말조차 제대로 되어 나오지를 않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이제는 누가 도와주지 않고서는 살 길이 없습니다. 물론 혈압이 높다든가 하면 다소 조심도 하고 하겠지만 어느 날 잠시 마음을 놓고 괜찮겠지 한 순간 병이 찾아오게 되면 그때는 대책이 없습니다. 

예전엔 성인병이라고 해서 이는 나이든 사람들이 흔히 걸리는 병인 줄로만 알았는데 요즘은 어린 아이들에게도 간간이 중풍이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뚱뚱한 사람이나 걸리는 병이냐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어쨌든 미리 조심해야지 일단 증세가 나타났다 하면 그때는 대책이 없습니다. 그래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라도 재활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몸을 추스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볼 때 얼마나 눈물겨운지 모릅니다. 그걸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의 안타까움은 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더군다나 그 환자가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라면 이는 더욱 심각합니다. 환자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 전체가 살아갈 길을 잃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가족 가운데 누군가가 먹고 살기 위해 나서야 되는데 그러면 환자도 돌보려 생활도 꾸리랴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고 그러다보니 형편이 오죽하겠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날마다 자신의 건강을 세세히 살펴서 이런 질병이 우리에게 오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합니다. 특히나 중풍의 제일 큰 원인 중 하나는 과로입니다. 하지만 육신적인 피로는 푹 쉬면 회복될 수가 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그냥 쉬는 것만으로는 해결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왜 예수님이 한적한 곳을 찾으셨던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나 하나님 앞에 우리가 엎드리는 그 시간이 단순한 육신의 휴식의 시간 뿐만이 아닌 우리 마음의 휴식을 얻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 나아와 우리 마음의 모든 고통과 힘든 것들을 다 아뢰게 되면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평안을 주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평안을 주노라”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서 주셨던 첫 번째 말씀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주님 앞에서 평안히 안식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서는 많은 수고가 필요합니다. 특히 그들을 돕는 손길이 필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중풍병자는 아주 중중 환자입니다. 자기 스스로는 조금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왔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네 사람이나 수고를 합니까? 그것은 그 사람이 스스로 움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 그 사람을 네 사람이 들고 와야 하니 얼마나 그들의 수고가 대단하겠습니까?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래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문둥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그렇다면 중풍도 고치실 것으로 그들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한 집에서 모여든 많은 사람들에게 도를 말씀하실 때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예수께로 왔지만 그들 앞에는 엄청난 난관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어디서부터 중풍병자를 메워가지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리 먼 곳은 아니었다고 해도 역시 힘든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꼼짝도 못하고 있는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메워가지고 왔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든다는 말입니다. 

근데 예수님을 만날 길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집 앞을 가득히 메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은 남들이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입니다. 물론 이들이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데리고 온 것부터도 남들이 생각지 못한 일이었기는 해도 그래도 그것은 한번쯤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남의 집 멀쩡한 지붕을 뜯어낸다. 그것도 주인의 허락도 없이 그것도 집안에 사람이 가득 들어차 있는 그 지붕을 뜯어낸다고 할 때 그 소란함이 어떠하겠습니까? 아마 사람들이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무슨 정신으로 무얼 하기 위해서 남의 집 지붕을 뜯어내는가 했더니만 들 것이 하나가 내려옵니다. 보았더니 거기에 한 중풍병자가 누워 있습니다. 지붕을 뜯어내는 소란함이 웅성대던 사람들이 순간 조용해집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렇게 까지 하는 그 마음을 그들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할 수만 있었다면 자기들도 그렇게 하지를 않았겠습니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그 지경이 되었다고 할 때 누군들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단지 그럴 용기가 없을 뿐이지 해도 된다고만 하면 무슨 짓인들 못하겠습니까? 

우리가 누구를 돕는다고 할 때 그것이 그냥 쉽게 도울 수 있는 것만은 아닙니다. 도움을 손길을 펼칠 때에도 그 손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칫하다간 도와주고도 욕을 먹습니다. 도와준다고 애를 썼는데도 그 결과가 시원찮으면 또 욕을 먹습니다. 그럴 바에야 아예 처음부터 모른 척 하는 것이 낫다는 말까지도 합니다. 그만큼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도 않으면서 효과 있게 돕는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이왕 돕기로 작정을 했으면 정말 죽기 살기로 도와야 합니다. 정말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 덤벼들어야 합니다. 그냥 시작만 거창하게 해 놓고는 슬그머니 꽁무니를 빼서는 아니 됩니다. 괜히 기대감만 잔뜩 주어 놓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먼 산만 바라보는 그런 모습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것은 결코 여우가 있는 사람이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기도 힘들게 살고 있으면서도 남을 돕는 데는 앞장을 서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자기도 고물을 모아 살아가면서도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발 벗고 나서서 돕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까 형편이 되어서 돕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마음입니다. 마음이 있으면 십시일반으로 도울 수 있습니다. 작은 도움의 손길이 모이면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중풍병자도 보십시오. 네 사람이 그를 메워가지고 옵니다. 더욱 지붕을 뜯기까지 합니다. 이건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이 사람이 고침을 받기를 그토록 바라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미치지 않고는 이렇게까지 할 사람이 과연 누가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 사람들은 비록 주인에게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먹을지라도 반드시 중풍병자를 예수님께 데리고 가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합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그렇게 해서 저가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확신으로 가득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펼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그렇게 해도 가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하다가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 가망이 없다고 해도 주님에게는 가망이 있습니다. 주님이 하시고자 하면 못하실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들을 도와 그들의 문제를 주님께로 가지고 나오는 도움의 손길이 그래서 필요합니다. 이 중풍병자에게는 사람들이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왔다고 했으니까 몇 사람인지는 몰라도 두 사람 이상의 사람들이 네 사람을 통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것으로 생각하면 저를 돕는 손길이 적어도 여섯 명 이상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함께 돕는 손길이 된다고 하는 것은 서로에게도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아마 한 사람이 이 일을 하려고 했다면 힘이 부쳐서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마음을 합하여 함께 이런 중보자로서 사로를 돕는 도움의 손길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그런데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십니다.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그리고는 곧 바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그랬더니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 일의 꼬투리를 잡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꼭 말꼬투리를 잡고 늘어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지 마세요. 그저 일이 되는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그리고 수고하는 이들을 격려하십시오. 일을 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이러쿵저러쿵 하면 일하는 사람도 힘들고 그렇게 참견하는 사람도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시시비비할 이유는 없습니다. 

여기 보십시오. “작은 자여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예수님에게 그런 권세가 없다면 여기 이 사람들의 말처럼 신성모독이 되어 그 당시로서는 가장 중한 벌을 받게 되는데 누구라서 감히 그럴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님은 이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은 그냥 그 사람을 고쳐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한데 굳이 시비 거리가 될 줄을 알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그만큼 당당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당당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예수님은 자신을 인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로서 세상에 왔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들에게도 역시 동일한 권세가 있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래서 너희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렇게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바로 잡아주는 역할을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합니다. 그 권세를 주님이 우리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가기만 하면 중풍병자가 고침을 받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 믿음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지붕까지 뜯어내는 그 마음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그것은 중풍병자를 정말로 안타깝게 여기는 마음이었습니다. 그가 고침을 받기를 원하는 그 간절함을 주님이 보셨습니다. 

그 결과 자기가 들려왔던 그 들것을 들고 그 사람이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는 사람들의 감격이 아니 그 사람을 데리고 왔던 사람들의 감격과 기쁨이 얼마나 대단했겠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중보자가 받는 상급입니다. 이런 기쁨을 우리들도 다 함께 누릴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차 세계대전 때 군인인 아들을 전쟁터에서 잃은 부부가 있었습니다. 아픔을 딛고 교회에 나온 부부는 하나님께 거금을 바쳤습니다. “좋은 아들을 이십 년 동안 우리 곁에 두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들의 영혼을 받아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것을 보고 다른 집 남편이 말했습니다. “여보, 우리도 저 사람들처럼 감사 예물을 합시다.” 아내가 말했습니다. “아니 우리 애는 아직 살아 있지 않아요!” “바로 그것 때문에 하는 거요.” 드디어 이 사람은 평범한 일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보통 일에서도 힘을 주시고 격려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감사하지 않을 게 없습니다. 아직 온몸의 모든 부분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음을, 힘들어도 하나님과 함께 살아 나갈 삶이 있음을, 모두 다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열이면 열 사람 모두 다 일이 잘되어야 감사하고 보통 때나 안 될 때는 불평합니다. 일이 잘 풀리면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잠깐이고 곧 마음이 우쭐해지고 느긋해지는 게 인간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살펴보면 내가 사랑하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물질이요, 명예요, 욕심임이 드러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아니면 내 소원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은 단지 심부름꾼이 아닙니다. 더 큰 계획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유익이 아니라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주님,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주옵소서.”

이러한 감사함을 가지고 이웃의 아픔을 주님께로 가지고 나오는 귀한 중보자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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