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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다 (삼상 20: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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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다 (삼상 20:12~17)


지난 시간에 우리는 삼상 19장에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시도가 있었음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다윗이 죽을 짓을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전쟁터에서 싸웠을 뿐이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원수는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 속에 있다.’ 

다시 말하면, 원수를 맺게 되는 것은 나쁜 ‘상대’가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내 마음속에 그 대상에 대한 나쁜 ‘감정’이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뒤틀려진 내 ‘감정’이라는 것이지요. 

어떤 사람이 나한테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아무리 큰 손해를 입혀도, 그래서 원수질만한 일을 해도 ‘그럴 수도 있잖아요?’라고 생각하면 문제가 안 되더라는 것입니다.  

‘젊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뭐!’ 
‘화가 나서 한 말이니 그럴 수도 있지 뭐.’ 
‘경험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 
‘천사가 아니고 사람인데 그럴 수도 있지 뭐.’ 
‘높은 사람이니 그런 말 할 수 있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 그렇게 섭섭하지도 원망스럽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사소한 일이라도, 일은 고사하고 말 한마디라도 ‘그럴 수가 있어?’라고 내 감정이 꼬부라지면 원수가 맺어지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면서 미운 대상이, 미운 이웃이 생기면, 그 사람을 거울삼아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는 잘못된 감정, 미워하는 마음, 꼬부라진 감정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가슴을 치고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 용서하옵소서. 내 마음이 꼬부라지니 만사가 꼬부라져 보입니다. 내 마음에 사랑이 없느니 사람들의 말 한마디조차 듣기 싫고, 걸음걸이까지 보기 싫어집니다. 용서하옵소서.” 

 
오늘의 말씀입니다. 

제임스 돕슨이 쓴 ‘하나님 어찌 이런 일이.......’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대릴 구스타프슨(Daryl Gustafson)과 그의 아내 클라리타 구스타프슨(Clarita Gustafson)에게는 끈질긴 검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무슨 영문인지 아기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한나처럼 아기를 갖고 싶다고 성가실 정도로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응답은 없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아내 클라리타의 생물학적인 능력이 소멸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일이 생겼습니다. 아내가 임신한 것이었습니다. 7개월이 지난 후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으며, 모세의 형 이름을 따라 ‘아론’이라고 지었습니다. 아론은 그 부부의 행복이고,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론이 세 살 때 악성 암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희망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아론을 살리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수없는 눈물과 기도에도 불구하고 아론은 1992년, 네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주님의 품으로 가버렸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차라리 그럴 바에야 아이를 주질 마시지........ 
어떻게 이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합시다. 


1. 배경설명 

본문에 보면, 몇 차례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는 음모와 시도가 있었습니다. 
다윗이 그 억울함을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에게 토로했습니다. 
삼상20:1절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부친 앞에서 나의 죄가 무엇이관대 그가 내 생명을 찾느뇨?”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느냐는 것이지요. 
그때마다 요나단의 도움으로 다윗은 생명을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 예가 ‘화살 신호’ 이야기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에게 약속했습니다. 
요나단이 아버지 사울왕의 다윗에 대한 생각이 어떠한지 알아본 후 화살로 그 뜻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죽일 의사가 없다고 판단되면 화살을 쏘고, 종에게 “화살이 네 이편에 있으니 가져오라.”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사울 왕의 곁으로 돌아와도 됩니다. 

그러나 죽일 의사가 확고하다고 판단되면 종에게 “화살이 네 앞에 있으니 가져오라.”고 소리칠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은 도망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삼상20장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다윗의 망명생활은 시작됩니다. 


2. 본문을 읽으면서 생긴 의문은, ‘왜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은 政敵이 분명한데 다윗을 생명처럼 사랑했을까?’였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정적이 분명합니다. 
삼상20:31절 보십시오. 
이 말은 사울 왕이 그 아들 요나단을 책망한 말입니다. 
“이새의 아들(다윗)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요나단)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니라.” 

실제로 그랬습니다. 
다윗은 요나단의 정적이었습니다. 
사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요나단은 다윗을 감싸고 생명처럼 사랑했을까요? 
단순히 우정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었을까요? 

대답은 이것입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아끼고 사랑한 것은 우정을 넘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단이 파악한 하나님의 뜻이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요나단 편에서 볼 때 이 사실은, 사울 왕이 폐위되고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은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이고, 자기는 그 왕위를 계승할 왕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이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입니다. 
요나단이 한 말을 통하여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삼상20:14절-16절을 읽습니다. 
14절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그때의 상황으로 보아 죽으면 다윗이 죽어야지 왜 요나단이 죽습니까?)” 

15절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버리지 말라 하고(그때의 처지로 보면 왕자인 요나단이 다윗에게 인자를 베풀어야지 어떻게 다윗이 요나단에게 인자를 베풀겠습니까?)” 

16절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어다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르게 하시기로 작정하셨음을 파악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작정하셨다면 그 누구도 이를 막을 수 없다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겸허히 받아드렸습니다. 


3.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렇다면 요나단은 자신이 왕위 계승자라는 현실적인 야망과 다윗이 왕이 되어야한다는 하나님의 뜻 사이에서 얼마나 깊은 갈등을 겪었겠습니까? 

그것도 보통일이 아니라 대권과 관계된 일이 아닙니까? 
요나단도 사람인데 왜 그런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본문에 보면 요나단은 ‘여호와 하나님’을 유독 많이 찾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만 봐도 여러 군데 나옵니다.  
12절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거하시거니와.......” 
13절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부친과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14절 “너는 나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를 내게 베풀어서.......” 
15절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16절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찌어다 하니라.” 

요나단이 ‘여호와 하나님’을 그렇게 많이 찾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를 생각해봅니다. 

1) 우선, 아버지 사울 왕에서 찾아볼 수 없는 요나단의 ‘神本主義’ 신앙을 나타내는 것이겠지요. 

삼상20장에 ‘여호와 하나님’이란 말이 11번이나 나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 중심으로 살겠다는 것입니다. 

2) 그러나 그것만이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내면의 욕구가 간단치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시 말하면 대권을 거머쥐고자 하는 자신의 인간적인 욕구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자 하는 순명사이에서 갈등하면서 “하나님, 어떻게 좀 해보세요.”라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는 부르짖음이 아닐까요? 

우리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담대하면 하나님을 덜 찾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불안하면 오히려 ‘하나님’을 더 찾게 됩니다. 
같은 심리상태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요나단 편에서 볼 때 사울 왕이 폐위되고 다윗이 왕위를 잇는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용납하기 힘든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은 다름 아닌 자기 아버지이고, 자기는 그 왕위를 계승할 왕자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참된 신앙인은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할 수 없지만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고 반발하지 않습니다. 
“내 생각으로 다 이해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옳습니다.(You are always right.)”라고 고백하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간혹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조금만 자기에게 불리하게 상황이 전개되면 “하나님이 계신다면서 뭐 이래!”하고 반발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떠나고, 믿음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배반합니다. 
그런 태도는 하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을 이룹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하더라도 이것은 진리입니다. 
지금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다하더라도 이것은 진리입니다. 
지금 우리의 의도와 다를지라도 이것은 진리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눅1:31절에 보면, 동정녀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수태고지(아기를 임신하리라.)라고 하지요.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동정녀 마리아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습니다. 
얼마나 당혹스러웠겠습니까? 
마리아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실은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자신과의 충돌을 빚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① ‘어떻게 남자를 모르는 처녀가 임신할 수 있을까?’라는 상식과의 충돌. 
그래서 마리아는 즉시 대답합니다. 
눅1:34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이런 상식과의 충돌이 마리아를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② ‘어떻게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율법을 어길 수 있을까?’라는 율법과 충돌. 
유대 율법에는 약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와의 관계로 임신했을 때 어떻게 하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신22:23-24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 만나 통간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마리아는 지금 율법에 따라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할 판입니다. 
이런 율법과의 충돌이 경건한 마리아를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③ ‘당장 약혼자인 요셉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인간관계의 충돌. 
약혼자 요셉에게 이 일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설명한다고 약혼자 요셉이 믿어줄 것인가? 
(여러분은 믿겠습니까?) 

약혼자 요셉이 나를 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신24:1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 온 후 수치 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마리아는 지금 약혼자 요셉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인간관계의 충돌이 마리아를 당혹스럽게 했을 것입니다. 
충분히 추측할 수 있고, 이해가 가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눅1:2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영어표현은 좀 더 절실합니다. 
“I am willing to do whatever he wants.........' 
(주님이 원하시는 일은 무엇이든지 기꺼이 하겠습니다.) 

‘계집종’이란 말은 ‘씨받이’란 말입니다. 
처녀가 ‘씨받이’ 신세가 된다면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그것은 목숨을 걸고 저항할 일이지 받아들일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뜻이 자기 생각에 부당해도, 자기 마음이 괴로워도, 남들의 오해를 받아도 받아들입니다. 
이 받아들임이 마리아를 위대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복음성가 <사랑해요> 

사랑해요. 목소리 높여 경배해요 내 영혼 기뻐. 
오. 나의 왕 나의 목소리 주님 귀에 곱게 곱게 울리길. 


이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사55:8-9절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과 우리의 삶에 개입하시는 방법을 알 수 있는 능력은 우리 인간에게 없다고 합니다. 
그 분의 전능하심을 헤아린다는 것은 마치 단세포인 아메바가 인간의 행동을 알아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습니다. 

중요하고 중요한 것은, 비록 우리가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에 대하여 명쾌한 대답을 얻지 못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하나님은 선을 이루신다.’는 사실을 믿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나단을 그토록 칭찬하고 기리는 것은 의리를 지키는 사나이다운 면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신앙적인 자세 때문입니다. 
비록 내 이성과 충돌하고, 내 의도와 충돌하고, 내 감정과 충돌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옳다.’고 믿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태도 때문입니다. 

이런 성숙한 믿음으로 “너는 진짜로구나!”라는 주님의 칭찬을 받는 교우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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