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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교회창립]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 (행 2:4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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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 (행 2:43~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행 2:43~47)

부모들의 한결같은 기대는 자녀들이 예쁘고 공부 잘하고 말도 잘 듣고 밖에서 칭찬받고 커서 큰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모들의 한결같은 마음이고 기대입니다. 이것은 사람만이 아니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교회는 금년으로 54주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동안 우리교회는 많은 은혜를 입었습니다. 발전도 성장도 역할도 했습니다. 오늘 이 시점에서 더 바람이 있다면 앞으로도 더 많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세상을 향한 역할을 다 했으면 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더 큰 바람이 하나 더 있다면 우리교회가 아주 건강한 교회를 이루어 하나님께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뜻이자 하나님의 뜻이고 그리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렇게 건강한 교회의 모습을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예수님 사후 직후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사후 성령이 강림하셨습니다. 제자들 모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모두 성령에 충만함을 입고 모두가 영적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나타난 현상이 교회의 건강한 모습입니다. 성경을 보면 가장 건강한 교회의 모습은 이런 것이다 할 만큼 모델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날마다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당시 매일같이 모일 동기가 분명히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모여서 떡을 떼며 찬미를 했습니다. 그 말은 그 때는 영적인 열기가 충만했다는 말이고 그 마음으로 서로 나누며 영적으로 형제애를 두텁게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말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교회가 공감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 결과 교회들이 날마다 성장하고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여기서 건강한 교회의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성 장 

생명체는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도 생명체입니다. 그래서 교회도 성장해야 합니다. 수적 성장과 영적 성장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함께 하시는 처소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장하고 성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날마다 성장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고 변화하고 퍼져나가 수적인 성장과 영적인 성장이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의 교회가 성장한 이유가 몇 가지입니다.    

하나는 “뜨거운 찬양”입니다. 당시 교회는 날마다 모여 하나님을 찬미했다고 했습니다. 신앙고백은 기도로도, 간증으로도, 찬양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그때 찬양은 힘차고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퇴보하는 교회나 퇴보하는 신자들이 모인 곳에서 부르는 찬양은 느리고 맥이 없는 찬송일 것입니다. 찬양에는 힘이 있고 활력이 있고 확실한 신앙고백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교회는 그렇게 매일 모여 찬미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구원의 역사와 성령의 감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교회가 부흥하고 성장하고 3천 명씩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예배”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매일 모여 성만찬을 떼고 나눔과 교제가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눈물과 고백과 사모함과 인내함이 있었고 형제애가 두터워졌을 것입니다.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나고 은혜가 넘치며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예배는 너무 기계적입니다. 한 시간 안에 끝나면 곧 바로 돌아가 버립니다. 한 시간 안에 드려지는 예배에 훈련이 되어 10분만 길어지면 모두 조바심을 합니다. 그러니 그 예배에 무슨 감동이 있겠습니까. 사도행전 교회는 날마다 모이고 성만찬을 나누고 함께 하는 교회였습니다. 

사도행전 시대 말고도 3,40년 전만해도 예배에 뜨거운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때 부흥회는 월요일 밤에서부터 토요일 새벽까지 했습니다. 설교도 두세 시간씩 했습니다. 그래도 그 설교에 은혜가 있었습니다. 모두 달게 받았고 자리를 뜨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는 모두들 그렇게 은혜를 사모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때에는 그곳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오늘 이 영적 부흥이 다시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배가 진정한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자발적 선교”입니다. 사도행전교회 중에서 가장 앞서간 교회는 안디옥교회였습니다. 그 시대에 이미 안디옥교회는 선교사를 파송하였습니다. 그것도 선교사를 이방사회에 파송하였습니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일이었고 혁명적인 시도였습니다. 그것은 당시 안디옥교회에 지도자들이 상당히 열린 신앙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지도자 군을 이루는 분들의 정신이 참 중요합니다. 

그 당시에 이방선교를 착안하였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인 일입니다. 당시 최초의 교회요 모든 교회의 모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그런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심지어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집을 방문하여 세례 주었다 해서 소환해서 문책할 정도였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고 성령의 계시가 있어 갔는데 그곳에도 성령이 강림하셔서 세례를 주었다고 말함으로 겨우 이해되어 불문에 부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모교회이면서도 개척교회 격인 안디옥 교회에게 세계선교에서 밀린 것입니다. 정신도 밀리고 사고도 밀리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일에도 밀렸습니다. 당시 모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 아쉬운 점이 바로 그 점입니다. 누구보다 열심도 있었고 구원의 역사도 있었고 회심의 역사도 있었지만 이방선교에 대해서는 상상도 못하였을 정도로 아주 구태의연했습니다. 오늘도 그렇게 구태의연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교회만 주장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나눌 줄을 모르고 선교에 개념도 없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교회들이 퇴보하는 것입니다. 선교는 교회가 할 일 중에 첫 번째 사역입니다. 선교가 있는 곳에 성령의 역사와 체험의 역사와 회심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선교에 열중하는 교회가 부흥합니다.  

또 “모두 참여”입니다. 본문을 보면 한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모두 “한마음으로 한 몸으로 함께 행동하는 모습”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다 함께(44)”,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고(46)했습니다. 이 말은 사도행전의 교회들이 지극히 능동적이었다는 말입니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을 보면 쉬지 않고 움직입니다. 생명력이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움직이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누워있거나 앉아있습니다. 생명력이 고갈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모두가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그 공동체가 건강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두가 한마음으로 움직였던 것입니다. 우리교회의 목표가 이것입니다. 다 같이 모이고 다 같이 행동하고 다 함께 봉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으로 모두가 움직이며 봉사하는 그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그런 공동체가 성장하고 발전하고 항상 움직이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다움 유지 

사도행전의 교회는 지극히 교회다운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몇 가지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하나는 “거룩함을 유지”하는 일입니다. 

본문을 보면 “사람들이 순전한 마음으로 모이고 찬미하고 음식을 나누었다(46)”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났다(43)”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거기에 “거룩함과 성결함”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지려면 이 성결과 거룩히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과 다른 점은 성결함과 거룩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이 거룩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그 거룩함을 입고 배우고 익히고 체험하고 경험해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를 “구원받은 거룩한 무리들”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룩성이 없으면 교회가 아닙니다. 

중세시대에는 너무 거룩과 성결을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아예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경건생활에 주력했습니다. 그렇게 너무 거룩과 성결을 강조하다 보니까 신앙이 행동을 멈추고 정적인 신앙으로 흐르게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은 도를 닦고 명상하고 앉아있는 거룩이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생활은 세속과 등지고 산속에서 혼자 거룩하게 살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거룩과 성결은 내가 주님의 영을 받고 말씀을 받아 내가 주안에서 거룩하여지는 것입니다. 거기서 주어진 힘과 능력과 거룩한 자본으로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삶이 거룩한 삶이고 경건한 삶이고 성결한 삶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교회에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거룩하고 성결한 줄 압니다. 그렇게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고 구별된 삶을 살지 못하니까 욕하고 비난하고 손가락질 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어느 여인이 차를 난폭하게 운전했습니다. 앞 차가 신호등 앞에서 멈추자 이 여인은 앞차 운전자에게 빨리 지나갔으면 나도 지나갔을 것인데 멈추어 섰다고 고함을 지르고 욕하고 흥분을 했습니다. 그 곁을 지나가던 교통경찰이 그 여인에게 다가가 나와 같이 경찰서로 가자하고 그 여인을 잡아 유치장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한참 후에 경찰이 오더니 “미안하다, 내가 실수했다, 나는 당신 차가 도난차인 줄 알았다, 왜냐하면 당신 차 뒤에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는 스티커를 붙인 것을 보고 당연히 당신 차가 도난차인 줄 알았다“ 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한참 생각해야 알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을 비난하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거룩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알았는데 아니니까 비난하는 것입니다. 그 책망은 하늘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양심으로부터 받을 수도 있습니다. 이웃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심지어는 사탄으로부터 받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반드시 “거룩과 성결”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그 거룩과 성결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교회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영성을 잃어서 세속화되고 타락해서 그렇습니다. 

또 하나는 “신앙정체성의 분명함”입니다. “정체성”이라는 말은 고유한 정신과 뜻과 가치관을 말합니다. 오늘은 이 정체성이 자꾸만 흐려지고 혼동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을 정체성 상실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정체성이 상실되면 삶에 대 혼란이 오고 목적이 사라져 버리게 됩니다. 가게의 모든 물건에는 정가가 붙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것이 정체성입니다. “나는 남자고 너는 여자고 나는 이 씨이고 너는 김 씨다” 그것이 정체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내가 김 씨가 됩니다. 그러면 정체성에 혼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가게의 값싼 물건에다 비싼 값을, 비싼 물건에다 싼 값을 붙여 놓으면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일대 혼동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정체성의 혼란”이라고 말합니다. 

덴마크 의 철학자 킬케골이 그런 예를 들었습니다. 그의 고향 덴마크에 있는 어느 큰 상점에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 도둑은 물건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물건은 그대로 있는데 다만 가격표만 조작해 놓았습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에 2달러를 붙이고 가죽으로 만든 고급 구두에 50센트를 붙이고 연필 하나에 100불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이 도둑은 물건 하나도 가져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도둑은 정말 중요한 것을 가져갔습니다. 그것은 상품의 본질을 가져간 것입니다. 즉 상품의 정체성을 훔쳐간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가게 안에 일대 혼란을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정체성을 잃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면 신앙인의 정체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이십니까. 그 대답은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것이 참 중요한 질문이고 대답입니다. 빌 하이벨 목사가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라고 말하기가 부끄러운가” 라고 묻고 “왜 그런가, 그것은 삶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한 말에 책임을 질 수 없기에 자신 있게 대답을 못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크리스천이다”라고 고백한 뒤에는 “책임 있는 삶”이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신앙인이 소신도 확신도 빛도 이렇게 바래는 것은 이 정체성을 상실해서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하나님의 자녀다”라는 고백이 확고해야 정체성이 분명해진은 것입니다. 거기서 분명한 신앙고백이 나오고 삶의 신조가 나오고 버릴 것은 과감히 버리고 찾을 것은 또 과감히 찾게 되는 용기가 나옵니다. 그것이 없으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게 됩니다. 다른 종교인들이 그렇게 너그러울 수 있고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것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길은 오직 하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세 번째는 “분명한 교회론”입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교회론이 분명했습니다. 모두 주님을 중심해서 건강한 교회공동체를 이루어 나갔습니다. 사도행전 교회의 특징은 예수를 중심으로 모두가 한마음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교회생활에서 모든 것의 중심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교회의 머리는 주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붙어 있는 가지들입니다. 가지는 가지역할만 해야 합니다. 그런데 때로 가지가 중심역할을 할 때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교회들이 갈등하고 편이 갈라지고 내가 옳다고 주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가 하면 교회론이 세워지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초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미국의 교포교회가 분란이 많은 이유가 이 가치관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교회는 주님의 머리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이 주인인 것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러니까 다투고 싸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신자들이 초점되시는 예수를 떠나 가지들을 초점인줄 알고 따라가게 됩니다. 그래서 갈등이 유발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싸우는 곳에 가 보십시오. 그곳에는 예수는 없어지고 인간들만 있습니다. 그 교회는 병든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예수를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의견. 내 생각, 내 판단이 예수에게로 모아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금년 1월로 54주년을 맞이합니다. 우리교회는 지난날에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건강한 교회로 나아갈 것입니다. 건강한 교회가 되려면 우리 모든 성도들은 중심되시고 주인 되시는 주님을 중심으로 모여야 합니다. 내 의연, 내 은사, 내 재능, 내 뜻이 모두 주님의 뜻으로 모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사도행전의 교회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행전의 교회는 날마다 모여 성만찬을 떼고 한 마음으로 찬미하며 구제하고 전도하며 주위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뜻이 있는 곳에 함께 하십니다. 마음이 하나로 모인 곳에 역사하십니다. 준비된 곳에 기적을 보내주십니다.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고 칭송받는 곳에 하나님의 의도 함께 하시고 섭리도 나타며 구원받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입니다. 그 일을 우리교회가 해 내야 합니다. 그때 우리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할 일을 다 하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회는 분명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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