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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베데스다의 은혜 (요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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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의 은혜 (요 5:1~9)
 
   
오늘 본문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입니다. 이 연못은 예루살렘 성 북쪽에 있는 양문 근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연못의 크기는 길이가 약 100미터에 너비가 약 60미터 정도의 크기입니다. 그러니까 대략 축구장 정도 크기의 연못입니다. 이 연못 네 귀퉁이와 중앙에 정자처럼 생긴 행각이 있어서 사람들이 쉴 수 있는 편이 시설도 갖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연못의 특징은 간헐천이라는 것입니다. 가끔 불규칙적으로 물이 솟아오르는 연못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 연못에는 진풍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행각들 안에 수많은 각종 병자들이 누워있습니다. 간헐천인 연못에 물이 차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연못에 물이 차오르면 서로 앞을 다투듯이 연못으로 뛰어듭니다. 제일 먼저 그 물 속에 몸을 담그기 위해섭니다.

이 연못의 이름은 베데스다입니다. 히브리어를 헬라어식으로 발음한 것입니다. 원래 히브리어로는 “벧-헤스다”(Beth-Hesda)입니다. 이 말의 뜻은 “은혜의 집” 또는 “자비의 집”입니다. 우스개로 하는 말 중에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또 비슷한 말로 이런 말들도 있습니다. “칼국수에는 칼이 없다”, “빈대떡에 빈대가 없다”, “가래떡에는 가래가 없다.” 마찬가지로 당시 베데스다 즉 은혜의 집에 은혜가 없었고, 자비의 집에 자비가 없었습니다.

당시 베데스다 연못은 그야말로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세상 의술로 고칠 수 없는 병자들이 모여 있습니다. 먼저 물에 뛰어들면 낫는다는 허망한 미신을 마지막 소망의 끈으로 붙잡고 있습니다. 그나마 먼저 그 물 속에 뛰어들 수 없는 병자들은 그 자체로 또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세월을 보내는 동안 병은 더 깊어가고 아무도 낫지 못하는 가운데 하나씩 둘씩 죽어나가는 그야말로 절망의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름은 은혜의 집이나 사실은 절망의 집인 그 베데스다 연못에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그곳에 은혜의 빛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절망의 집이 아닌 은혜의 집 진정한 베데스다로 변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884년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처음 도착한 언더우드 선교사는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직시하면서 이렇게 기도를 드렸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주님께서 저희들을 옮겨와 앉히셨습니다. 그저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만이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오직 제 믿음을 지켜주소서.“

19세기 말 이 땅은 그야말로 절망의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면서 이 땅은 은혜의 땅으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뒤 이 땅은 이제 은혜를 나누는 땅이 됐습니다.

아직도 곳곳에 절망의 땅들이 있습니다. 절망의 심령, 절망의 가정, 절망의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 절망을 떨쳐보려고 몸부림쳐보지만 그럴수록 절망의 더 깊어져만 갑니다. 어떻게 해야 할 까요?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그래야 절망의 땅이 은혜의 땅으로 변합니다. 진정한 베데스다의 은혜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데스다에 오셔서 일어난 놀라운 은혜의 역사를 소개해 줍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오셔서 절망의 땅을 은혜의 땅으로 바꾸는 전형적인 예를 보여줍니다. 그 은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찾아오시는 은혜

본문 1-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명절에 예루살렘에 오셨고, 지금 이 베데스다 연못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38년 된 이 병자를 찾아오셨습니다. 

누구의 청을 받아 오신 것이 아닙니다. 누구의 조언을 받아 오신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 등 떠밀려 오신 것이 아닙니다.  전적으로 예수님의 뜻을 따라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시간과 장소를 결정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만날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찾아오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생각지 못했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찾아오셨습니다. 모세는 호렙산에서 양을 치다가 생각지 못했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을 찾아오셨습니다. 바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러 가다가 생각지 못했던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찾아오십니다. 저들은 생각지 못했던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래서 깜짝 놀라고 감격하게 됩니다.

김춘근 박사가 쓴 [Why Me]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가 1967년 미국에 유학 와서 박사 학위를 받고 페퍼다인이란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최우수 교수상을 탈 정도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37세의 젊은 나이에 간경화와 간염으로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극심한 가난을 이기고 살 터전을 찾아 미국으로 떠나 갖은 고생 끝에 이제 학위를 받고 교수가 되어 겨우 안정되게 자리를 잡게 되었는데 젊은 나이에 청천벽력과 같은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입니다.

깊은 절망감에 하나님께 반항했습니다. “하나님, 이럴 수가 있습니까? Why me? 하필이면 왜 접니까?” 그 후 자기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간치료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으로 ‘빅 베어 마운틴 기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퉁퉁 부어버린 배를 잡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기도 도중 자기를 찾아오신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세상 바라보던 시선이 주님을 향하게 됐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깨닫게 됐습니다. 자신을 위해 큰 비전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제 기도 내용이 바뀌었습니다. "Why me! 하나님 왜 저 같은 것을 그토록 사랑하십니까? 왜 하필 저 같은 것을 찾아오셨습니까?" 물론 병도 치료됐고 그 이후로 주를 위한 놀라운 사역들을 펼치게 됐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찾아오시는 은혜를 입게 되면 우리는 감격하게 됩니다. “Why me! 왜 저같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무능한 자를 사랑하십니까?” “왜 하필이면 저 같은 것을 택하셨습니까?” 

시 8:4에서 다윗은 이렇게 감격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주님의 찾아오시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은 다윗처럼 이렇게 노래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을 찾아오시는 주님을 맞이하십시오. 그리고 그 찾아오시는 은혜를 감격적으로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2. 희망을 주시는 은혜

본문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병자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5절에 보면 “거기 서른여덟 해 된 병자가 있더라” 무슨 병인지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38년 동안 고쳐보려고 해보았으나 허사였고 병은 더 깊어져 왔다는 것입니다. 이제 이 환자는 당시 의학에는 희망을 걸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게다가 7절을 보면 병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라고 했습니다. 지금 이 병자 곁에 병수발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투병생활이 길어지면 점점 도움의 손길이 없어진다는 말입니다. 38년간 투병했으니 친구나 친지는  물론이고 가족들마저 그 곁을 지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의지할 사람 없음에 절망은 더 깊어져만 갑니다.

할 수 없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베데스다 연못을 찾았습니다. 간헐천 연못에 물이 동할 때 먼저 그 물에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미신에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걸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혼자서 연못에 물이 동할 때 애써서 들어가 보지만 늘 뒷전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발 빠르게 뛰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제 이 병자의 희망이 바뀌었습니다. 병이 낫든지 말든지 연못에 먼저 좀 들어가 보고 싶은 것입니다.

이 병자의 문제는 희망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병이 낫고자 하는 희망조차 가질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이 병자의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점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물으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역시 병자의 대답은 “네! 낫고자 합니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런 소리 말고 나 좀 먼저 물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병을 낫고자 하는 희망을 되찾게 해 주셨습니다. 진정한 희망을 되살려 주신 것입니다.

가난한 광부가 있었습니다. 이 광부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들이 자신의 꿈을 이야기했습니다. “나는 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겠어요.” 광부는 기뻤습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은 무거웠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든데 어떻게 대학을 보낸단 말인가. 그렇다고 아들의 꿈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커다란 상자 하나를 아들에게 보여주며 말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자랑스럽다. 가정형편이 어려우니 고학을 해야 한다. 나는 지금부터 너를 위해 이 상자에 돈을 모으겠다. 네가 의사가 되면 이 상자에 모은 돈으로 병원을 지어 주마. 이것은 우리 둘만의 약속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아들은 열심히 공부해 의사가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까만 때가 낀 거친 손으로 장롱에서 상자를 꺼냈습니다. 상자는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꿈을 꺾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단다.”

아들은 눈물을 글썽이며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았습니다. “아버지 고맙습니다. 상자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가득 담겨 있어요. 그것은 제게 희망의 상자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 중요합니다. 그 희망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어진 현실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희망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주어진 현실이 자꾸 우리의 희망을 뒤흔듭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어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에게 희망을 주십니다.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예수가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지만 주님과 함께 하면 할 수 있습니다. 

일찍이 이런 사실을 깨달은 시인들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시 39:7)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참된 희망을 주십니다. 주 안에서 얻게 되는 참된 희망을 풍성하게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3. 치유하시는 은혜

본문 8-9절을 보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제 예수님께서 이 병자를 고쳐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예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고치셔도 아주 깨끗하게 고치셨다는 것입니다. 

이 병자의 상황을 들여다 보면 재미있습니다. 38년 동안 자리가 이 환자를 들고 다녔습니다. 환자는 늘 그 자리 위에 누워있었고, 이동할 때도 자리 위에 누워있으면 사람들이 그 자리를 들고 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병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제 거꾸로 되어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가게 된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꿔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회복시켜주신 것입니다.

어느 마을에 독실한 의사가 있었습니다. 이 의사는 하나님께로부터 남다른 은사를 받아서인지 명의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그저 잠시 진찰만 해도 어디가 아픈지 알아냈고 처방도 잘해서 많은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몸이 아프면 이 의사를 찾아가서 치료를 받곤 했답니다.

그런데 이분이 나이 많아 세상을 떠나게 됐습니다. 목사님과 가족들 그리고 교우들이 임종을 하게 됐습니다. 이분이 모인 사람들에게 유언처럼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보다 훨씬 훌륭한 의사 세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바로 ‘소식’, ‘수면’, 그리고 ‘운동’입니다. 음식은 위의 75%만 채우고 절대 과식하지 마십시오. 잠을 충분히 주무십시오. 그리고 열심히 걸으십시오. 그러면 웬만한 병은 다 나을 수 있습니다.”

이분이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의사는 다음 세 약을 함께 복용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더욱 귀를 종긋 세우고 그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바로 ‘말씀’, ‘기도’, 그리고 ‘사랑’입니다. 말씀 약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평생 꾸준히 복용해야 합니다. 기도 약은 부작용이 없는 약이라 많이 복용할수록 좋습니다. 그리고 사랑 약은 상비약입니다. 늘 준비했다가 수시로 복용하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덧붙였습니다. “육체의 건강은 반쪽건강입니다. 영혼이 건강하면 육체의 건강은 따라옵니다. 먼저 영혼이 건강하고 그리고 육체도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가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의 영혼이 건강해 집니다. 우리 심령 속에 죄가 다 씻겨나가고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가지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도 평안해 집니다. 웬만한 스트레스도 다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의 몸도 건강해 질 수 있습니다. 질병에 대한 면역력도 강해집니다. 이미 병든 사람들 치유도 훨씬 잘됩니다. 

실제로 예수가 우리에게 오시면 치유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의 영혼, 우리의 마음, 그리고 우리의 육체에 치유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가정도 치유가 시작됩니다. 관계가 회복되고 떠났던 사랑이 돌아옵니다. 우리 사회도 치유가 시작됩니다. 갈등이 해소되고 건강한 사회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치유를 시작하십니다. 이 놀라운 치유의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한 병원 영안실에 세 구의 시신이 들어왔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시신들이 모두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답니다. 이상하게 생각한 병원장이 그 이유를 알아보니 이렇더랍니다. 첫 번째 시신은 로또에 당첨이 됐는데 너무 기뻐 웃다가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합니다. 두 번째 시신은 아들이 그렇게 공부를 잘하지 못했는데 서울대학교에 수석합격해서 너무 놀라 기뻐서 웃다가 쇼크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세 번째 시신은 벼락을 맞아 죽었다고 하는데 어떻게 웃음을 띄게 됐는지 그 이유를 알아보니 사진을 찍는 줄 알고 웃었다는 것입니다. 

요즘 너무 힘들다보니 우리들의 얼굴이 너무 굳어있습니다. 상황이 절망적이다 보니 웃을 수 있는 여유가 없습니다. 마치 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들 얼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면 달라집니다. 우리 얼굴에 웃음이 되살아나게 됩니다. 저 베데스다의 은혜가 임하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되찾게 되고 치유가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베데스다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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