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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형통의 복을 누리는 사람 (시 2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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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통의 복을 누리는 사람 (시 23:1~3)


모든 사람들은 삶의 형통을 간절히 바라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형통이란 육신적인 것에만 국한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형통은 형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로서 나온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첫 사람 아담을 지으셨을 때 아담의 생활은 만사가 형통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처음 사람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인본주의로 살겠다고 했던 그때부터 인간에게서 참된 '형통'은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후손인 인간은 진정한 형통을 누리지 못하고 방황하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형통,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누구보다 형통을 누렸던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찬양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윗이 여호와 하나님을 삶의 중심으로 삼고 목자로 삼았기 때문에 부족함이 없는, 즉 '충만한 형통'을 누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와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목자로 모신 양은 형통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목자는 양을정성껏 돌봅니다. 목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양을 이끌고 풀밭을 찾아 나섭니다. 그리고 양들을 풀밭에 풀어놓아 풀을 뜯게 합니다. 그러면서 혹시 맹수가 습격해 오지 않는지 바짝 긴장하면서 경계합니다. 그 다음에는 양들로 하여금 물을 마시게 하고 저녁에 '우리'로 안전하게 양들을 끌고 와 쉬게 합니다.

목자가 이렇게 한다면 양은 철저히 목자를 신뢰하고 목자가 하라는 대로 순종합니다. 그러면서 목자를 위해 양털도 주고, 젖도 주고, 고기도 주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목숨을 버리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셨습니다. 

따라서 양인 우리는 목자이신 예수님께 절대 순종하고 시간 드려, 물질 드려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형통의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형통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실패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하거나 병드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낭패를 당하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공이십니다. 승리이십니다. 부요이십니다. 공의이시고 영원이십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목자로 알고 순종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은총의 길을 걸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목자이신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우리를 형통하게 하실까요? 

 1. 의식주 생활의 형통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의식주를 형통하게 하십니다. 다윗은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시 23:2)라고 고백했습니다. 양에게 있어서 푸른 초장은 삶의 터전입니다. 초장에 풀이 말라 먹을 것이 없으면 양은 굶어 죽고 맙니다. 그런데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이신 데, 목자이신 분이 양인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이끄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일'이 아닙니다. 일은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께서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서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십니다. 목자되신 하나님께서는 양인 성도를 위해 '은혜의 초장'을 마련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직장이나 사업장, 그 밖의 모든 삶의 열정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고 순종하는 자세로 은혜를 사모해야 합니다. 다윗은 '푸른 초장'이라고 했는데 '푸르다'라는 말은 형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푸르다'라는 것이 바로 생명 그 자체입니다. 풀이나 나무가 죽었을 때는 푸르를 수가 없습니다.

황폐한 곳은 노랗거나 잿빛입니다. 생기가 왕성한 색깔이 푸른 색깔이요, 이 색깔은 형통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인 양을 모래밭이나 황폐한 들판으로 인도하신다고 하지 않고 형통의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신다고 다윗은 고백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곳은 그 어디나 '푸른 초장'이 됩니다. 여러분의 직장, 사업장, 가정 등 삶의 현장이 푸르게 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하나님의 인도만 따르십시오 

또한 다윗은 '누이신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풀이 얼마나 많던지 양이 풀을 찾아 이리저리 헤맬 것이 없이 편안하게 지낸다는 말입니다. 우리말에도 '누워서 떡 먹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리저리 헤매지 않고 평안한 가운데 풍족함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녀를 위해 일하십니다. 일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 모든 문제를 부여안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의 비극입니다. 우리는 회개하고 믿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개선해야 합니다. 죄와 탐욕과 불의와 불순종과 교만과 우상숭배와 방탕의 불순물을 제거하고 겸손히 '그 발' 앞에 엎드려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우리 삶의 터전을 푸른 초장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성경은『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 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좋으신 우리의 목자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좋으신 목자'로 모시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양'됨으로서 신앙의 증거를 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일을 성수하고 있습니까? 주일에 교회에 나아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미하는 것, 이것은 성도의 본분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으면서 '하나님을 목자'라고 한들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목자시라면 주일날 반드시 교회에 나와 하나님을 예배하고 '목자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또한 털과 젖을 주인을 위해 드려야 합니다. 털과 젖이란 십일조와 헌물을 말합니다. 

하나님께 십일조와 헌물을 드리지도 않고 삶의 터전을 무조건 형통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희생과 헌신을 보시고 우리를 은총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목자이신 하나님과 언약을 맺었으면 '그의 양' 답게 헌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목자이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른 맹수들은 목자의 인도함이 없기 때문에 개방된 곳에서 살지 못하고 높은 산 벼랑길에서 포수의 눈을 피해 살아갑니다. 이는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지 않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좇아 험한 세상에 고통당하며 사는 인생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양이기 때문에 어둠 가운데 숨어살지 않고 편안한 곳에서 목자의 보호를 받으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목자를 위해 기꺼이 털과 젖,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 신앙고백을 하고 헌신의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목자는 선한 길로 양을 인도합니다. 그럴 때 양이 자기 뜻대로 판단하고 목자의 인도를 거부하면 파멸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깨닫고 기도하고 찬미하고 말씀을 읽을 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시고 마음의 소원을 주심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십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9-10)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비된 모든 것을 가지고 성령을 통해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푸른 초장의 세계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황폐한 초장이 아닙니다. 사막이 아니며 거친 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은 푸른 초장입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지금 풀이 말라버린 황폐한 들에 있지는 않습니까?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있습니까? 주일 성수하며 십일조와 헌물을 주께 드리고 있습니까? 항상 목자되신 예수님을 따라갑니까? 그렇지 않다면 회개하고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 3:20)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잘못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생각이 잘못되어 있으면 믿음도 잘못되고 맙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자에 대한 분명한 생각을 갖고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2. 마음의 형통 

하나님께서는 또한 마음을 형통하게 하십니다.『쉴 만한 물가으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 쉴 만한 물가는 바로  휴식과 평안 그 자체입니다. 우리가 복잡한 도시생활을 하다가 전원의 호숫가로 가면 그 상쾌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안식과 평안을 목말라 하는 존재입니다.

안식과 평안이 없을 때 갈증 이상의 고통을 당합니다. 이 세상에 갈증만큼 무서운 고통도 없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과 독일군이 서로 싸우다가 길을 잃고 사막에서 헤매게 되었는데 이들은 목말라 하던 차에 신기루를 보게 되었습니다. 이들 앞에 나타난 것은 물이 넘실대는 오아시스였습니다. 

그러자 연합군이나 미군이나 할 것 없이 오아시스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뜨거운 모래 속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모래를 물로 착각하고 벌컥벌컥 들이마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두 기도에 모래가 꽉 차 비참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갈증을 가지고 사막에서 헤매이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치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떠나고도 영혼의 갈증을 풀겠다고 '우물'을 팝니다.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대마초를 피웁니다. 술과 마약 이것은 우물이 되기는커녕 오늘날 인간을 파괴하는 무서운 독극물이 되고 있습니다. 술과 마약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치 사막 한 가운데서 신기루를 보고 물인 줄 알고 모래를 들이마시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존재뿐 아니라 생활과 가정, 대인관계까지도 부식시키고 있습니다.

인간이 참으로 갈증을 해소하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바로 생수의 근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요 7:37-38)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역사하시면 영혼의 갈증은 말끔히 해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은 영생의 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물을 마시면 삶의 의미를 알고 어디에서 와서,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지 분명히 알게 되므로 방황하지 않습니다.

그런가 하면 성령 충만을 통해 어떤 고난 중에서도 평안을 얻고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염려와 근심입니다. 그런데 성령 충만한 사람은 이 염려와 근심을 하나님께 다 맡기고 평안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근본적인 해갈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평안이 고갈되어 황폐한 사회를 만드는 것입니다. 

요사이는 정말 신문보기가 두려운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소한 일에도 무서운 살상을 저지릅니다.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 그 생수의 근원으로 나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면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누구든지 주님 앞에 나아오면 마음의 형통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음의 쉼을 얻으려고 방탕과 쾌락을 좇지 마십시오 그 길은 파멸의 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오십시오. 그 길만이 마음의 형통을 얻는 길입니다. 

 3. 영혼의 형통 

하나님께서는 또한 영혼을 형통하게 하십니다.『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시 23:3) 인간은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입니다. 죽었다는 것은 '교통의 상실'을 말합니다. 한 가정이 죽었다든가 무덤이 되었다는 말은 남편과 아내의 교통이 끊어졌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이 눈이 있어도 시신경이 죽으면 사물을 바라볼 수 없고 귀가 있어도 청신경이 죽으면 들을 수 없는 것처럼 죄로 인해 영혼이 죽으면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고 하나님과 원수 되고 분리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과의 교통을 잃고 사망에 이른 인간의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2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시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인간의 죄와 저주를 대신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던 원수의 담을 무너뜨리셨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영혼이 소생되는 것입니다. 그뿐입니까? 소생된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강건해지고 풍성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믿음을 통해 영혼이 살아나고 하나님과 교통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 모릅니다. 이런 은총을 입은 사람은 어떤 고난 중에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겉사람은 후패하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체험합니다. 오늘날 종교가, 도덕이 인간의 영혼을 소생하게 해주지 않습니다. 인간의 영혼을 소생하게 해주는 것은 목자이신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성경은『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엡 2:4-5)고 하였습니다.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는 하나님께서는 또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 (시 23:3)해 주십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죄 사함을 얻은 사람은 성령의 역사로 날마다 의의 길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가운 데 성결하게 살도록 도와주십니다.성령께서는 우리를 말씀으로 새롭게 하시고 권능으로 죄와 맞서게 하십니다. 그래서 천국의 길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붙들어 주십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사는 사람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 보장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생활의 형통, 마음의 형통, 영혼의 형통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이 우리에게 '물댄 동산'이 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살전 5:23)고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마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께서는 구만리장천에 계시지 않고 우리 몸을 성전삼고 와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목자로서 우리 삶의 현장에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범사와 마음과 영혼을 형통하게 하시며 날마다 승리하게 하십니다. 행복한 우리 해성교회 성도여러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형통하십시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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