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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창 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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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 (창 4:1~7)


어느 초등학생이 자전거를 간절히 갖고 싶어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은 모두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데 자기만 없는 겁니다.
그 아이의 가족들은 모두 가톨릭 신자들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아들에게 제안을 했습니다. 
성모 마리아에게 기도해 보라고. 

그 날 밤, 이 소년은 기도문을 적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님, 저 자전거를 꼭 갖고 싶어요. 
제 소원 꼭 들어주세요.”
그리고는 기도문이 적힌 그 쪽지를 마리아상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마리아가 잘 볼 수 있도록.

그 다음날도 이 소년은 잠들기 전에 또 다른 종이에 기도문을 적어 
마리아상 앞에 두었습니다. 
일주일 내내 이 소년은 낙심하지 않고 계속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기도는 전혀 응답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이 소년은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자기의 기도문과 함께 
마리아상을 수건을 싸서 옷장 깊숙한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날 밤 이 소년은 마지막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 만일 네 엄마를 다시 보고 싶다면, 내 기도를 들어주는 게 좋을 걸.
내가 네 엄마를 인질로 잡아두고 있거든.”   

이 글의 제목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어느 초등학생의 묘수”입니다. 
기가 막힌 아이디어 아닙니까? 
예수님은 엄마가 보고 싶어서, 꼼짝 못하고 기도를 들어주었을까요?

기도가 이런 것인가요?
만일 내가 원하는 대로 들어주지 않으면 위협하고 협박해서라도 
내 소원만 성취하면 되는 것인가요? 

예배는 어떻습니까?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나 좋을 대로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으니 
하나님은 내 예배를 받으셔야 한다고 협박을 하지는 않습니까? 
과연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예배와 관련하여 가장 고전적인 사건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이후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처음으로 얻은 아들들입니다. 
두 아들의 출생에 대한 설명이 조금은 다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창4:1 “아담이 그의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임신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가인은 분명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아들이었습니다. 

하지만 2절에 보면 
아벨에게는 그냥 가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다고만 되어 있습니다. 
출생에 있어서 마치 가인이 더 중요한 아들인 것처럼 강조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의 직업은 서로 달랐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어쨌든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도 있지만 받지 않으시는 제물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있지만, 받지 않으시는 예배도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배만 드리면 기계적으로 모든 예배를 그냥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들면 그 예배를 받으시지만,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예배를 거절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차별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맏아들 가인의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어떤 예배는 받으시고, 어떤 예배는 안 받으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받고 싶으면 받고, 안 받고 싶으면 안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아무런 원칙도 없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변덕쟁이입니까?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1. 예배는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가인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가인은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가인의 제물만 받지 않으신 것이 아니고 가인마저도 받지 않으셨습니다. 
5절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우리가 예배를 잘못 드리면 우리의 예배만 거절당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예배를 드린 우리도 거절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욱 끔찍한 일인 것입니다. 
제물보다도 더 앞서는 것은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의 태도와 그 사람 그 존재 자체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어떤 태도로 드리든지 
예배만 드리면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헌금만 많이 드리면 무조건 기뻐하시고 입이 벌어지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으로 드렸는가가 더욱 중요한 것입니다.   

가인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가인은 땅의 소산을 여호와께 드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하나님이 그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땅의 소산”이 문제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땅의 소산’보다는 “양 새끼”를 더 좋아하신다고 
생각할 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보다도 가인의 태도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자기방식대로 드렸다가 받지 않으시니 
가인은 분하여 안색이 변했다는 것입니다. 
가인이 왜 분을 내고 안색이 변했습니까? 
“왜 동생 아벨의 제물은 받으시고 내 것은 받지 않으셨느냐?”는 비교의식,
동생에 대한 열등감, 시기심 등이 작용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 가인이 어떻게 했더라면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은 가인이 어떻게 하기를 원하셨겠습니까? 
‘그걸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내가 하나님이 아닌데’ 
이런 반응을 보이는 분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배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드리는 것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그 예배를 받지 않으셨을 때, 분을 내고 안색이 변하기 전에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하나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갔어야죠. 

‘하나님 뭐가 문제입니까? 제가 드린 제물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그랬더라면 하나님은 “나는 이런 제물을 원한다.”하고 말씀하셨을 겁니다. 
그러면 자기의 잘못을 고치고 하나님께 맞추면 되는 것입니다. 
분을 내고 안색이 변하여 화부터 낼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이 분을 내고 안색이 변하였다는 것은
애초부터 정말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를 드리려는 마음이 없었던 겁니다.
그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문제가 생겼으면 자기를 돌아보고, 자신의 잘못을 고치려고 해야 하는데
자기의 잘못은 헤아릴 줄 모르고, 대뜸 화부터 내고 있는 것입니다.   

6-7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은 지금 가인이 선을 행하지 못했다고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죄를 다스리라고 경고하십니다. 
가인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아벨을 죽이는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자기중심성을 버리지 않으면 우리를 죄를 범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매사에 내 중심으로 하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안색이 변하는 것,
이것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예배를 드리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나에게 맞출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께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무엇일까를 고민하며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려고 해야 합니다. 
자기중심성을 버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예배하는 자가 되길 바랍니다. 
  

2. 예배는 믿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오늘 본문 자체에서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히11장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신 것은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지도 않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이 받으시겠습니까?
믿음도 없는 사람이 아무리 헌금을 많이 드린다고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십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드리는 예배라야 받으십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 대한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이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믿음 없이 드리는 예배는 아무리 풍성하고 화려한 것이라도 하나님이 받지 않으십니다. 

아무리 노래를 잘하는 전문 합창단이 와서 찬양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하나님은 그런 찬양을 받지 않으십니다.   

사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왜 하나님이 헛된 제물이라고 말씀하십니까? 
그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배를 드리기는 하는데, 
하나님도 모르고, 악을 없애지도 않는 겁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많이 기도할지라도 듣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만홀히 여겨 멀리 물러갔다고 탄식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고 책망하십니다. 
이미 머리끝부터 발바닥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인데도 
치료받지 못한 채 더 매 맞을 짓만 하고 있다고 애통해 하십니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없이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은 받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받지 않으시는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을 믿고, 
성령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을 믿고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3. 예배는 희생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가인의 제물은 그냥 땅의 소산이라고 했지만, 
아벨의 제물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이라고 했습니다. 
Cassuto라는 성서 주석학자는, 가인은 다만 의무를 수행했을 뿐이지만
아벨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최선을 다했다고 해석을 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발전이 되어 율법(출13:2,12, 레22:17-25)은 
예배자가 자기 것 가운데서 흠이 없고 가장 살지고 건강한 
가장 좋은 것을 드릴 것을 요구했습니다. 
여기에는 정성과 희생이 따르는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레22:22 “너희는 눈 먼 것이나 상한 것이나 지체에 베임을 당한 것이나 
종기 있는 것이나 습진 있는 것이나 비루먹은 것을 여호와께 드리지 말며 
이런 것들은 제단 위에 화제물로 여호와께 드리지 말라.”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이런 짓을 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가지고 옵니다. 
여기에는 아무런 정성도, 자기희생도 없는 것입니다. 
이런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예배에는 정성과 자기희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맥스 루카도라는 분은 [예수님처럼]이라는 책에서 이런 글을 썼습니다. 

준비된 모습으로 예배에 나올 것을 당부하고 싶다. 
기도하고 오라. 그래야 도착해서도 준비된 상태로 기도할 수 있다. 
충분히 자고 오라. 그래야 도착해서 깨어 있을 수 있다. 
말씀을 읽고 오라. 그래야 예배드릴 때 마음 밭이 부드러워진다. 
갈급한 마음으로 오라.
자원하는 심령으로 오라.
말씀 주실 하나님께 기대를 품고 오라. 

여러분의 예배가 정성이 담긴 준비된 예배이길 원합니다.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물은 쓰다 남은 찌꺼기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귀한 것을 드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 헌물 속에 하나님께 대한 그의 마음이 담겨져 있는 것입니다. 
첫 새끼를 드렸다는 것은 사랑과 정성이 담겨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배가 고파서 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첫 열매를 드리는 그 아름다운 마음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십니다.   

여러분의 예배는 얼마만큼의 정성과 희생이 있는지 돌아보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되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예배가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정성과 자기희생이 있는 예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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