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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보살펴 주심 (눅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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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펴 주심 (눅 12:4~9) 


두어 달 전에 신문(조선일보 2008년 12월 2일자)에서 흐뭇한 기사 하나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대구의 모 대학 같은 학과(계명대 서예과)에 어머니(백경화, 43세)와 아들(이시원, 18세)이 나란히 수시 2학기 입시에 합격한 것입니다. 이런 사연입니다. 아들이 6세 때부터 근육이 위축되는 ‘근이양증’이란 병을 앓게 되었답니다. 휠체어를 타야 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가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등하교를 직접 도왔습니다. 그런 가운데 아들의 대학 학업을 돕기 위해 어머니도 함께 진학하게 된 것입니다. 이 기사를 읽으면서 그 학생은 자신을 잘 보살펴주는 어머니가 있어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에 보살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정말 큰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가족이 소중한 것입니다. 가족은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해도 나를 버리지 않고 보살펴 주는 고마운 존재입니다. 설날 연휴를 맞이해서 전국 도로가 빙판길이 됐는데도 귀성객들로 붐비는 모습을 보면서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됩니다. 

특히 요즘처럼 어려운 때는 가족이나 친지들끼리 서로 보살펴 주는 것은 얼마나 아름답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꼭 기억할 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보살핌은 불완전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모라도, 자식이라도, 배우자라도, 친구라도 보살펴주는 데 한계가 있습니다. 누구도 나를 완전하게 보살펴주고 책임져 줄 수 없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우리가 힘든 인생을 당당하게 승리하며 살아가려면 ‘완전한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감사하게도 우리 성도들에게는 완전한 보살핌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바로 그런 보살펴 주심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시간 말씀을 통해 보살펴 주심의 축복을 받으시고 항상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 4절(상)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 ” 예수 믿고 성도 된 우리를 가리켜 ‘내 친구’라고 불었습니다. 얼마나 친근한 표현인지 모릅니다. 다정다감한 어조로, 그러면서 동시에 분명한 어조로 말씀하신 겁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됩니다. 


[1]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 위험하고 두려운 곳 

이러한 축복이 우리에게 얼마나 절실한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너무나 위험하고 두려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변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건과 사고가 있습니까? 또 얼마나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까? 악한 원수 마귀의 시험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흔히 이 세상을 가리켜 광야로 비유합니다. 혹은 풍랑이 이는 바다로 비유합니다. 이처럼 세상은 위험하고 두려운 곳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사노라면 늘 근심이 있고 염려가 있기 마련입니다. 


[2] 정말 두려워 할 대상 : 절대주권자 하나님 

그러나 예수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세상은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라는 겁니다. 정말 두려워 할 대상은 하나님임을 강조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생 만사와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다른 것들은 결코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를 위협하고 괴롭혀봤자 라는 겁니다. 4절(하) 보십시오. “ ...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기껏해야 우리의 육체를 죽이기까지만 한다는 겁니다. 그 이상은 못합니다. 우리 영혼까지 좌지우지 못합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5절.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 그는 죽이시고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입니다. 다시 말하면, 생사여탈권(生死與奪權)을 갖고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판주이십니다. 인간을 천국으로 보내기도 하시고, 혹은 지옥으로 보내시기도 합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겨우 100년 안팎이지만, 내세의 삶은 영원합니다. 그 영원한 운명을 결정하실 수 있는 분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두려워하면(하나님 경외 신앙), 

세상은 더 이상 두렵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이 있죠. 잠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그렇죠.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면 늘 심란하고 불안합니다. 근심과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전전긍긍 좌불안석입니다. 그런데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절대주권자 하나님을 의지하면 안심할 수 있습니다.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의 절대 보호하심이요 보살펴 주심입니다.


[3] 하나님의 절대 보호 : 보살펴 주심 

이런 은혜와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참새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십니다. 당시 이 말씀을 하실 때 산에서 하셨으므로 아마 청중들이 날아다니는 참새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저 참새들을 봐라! 얼마나 하찮은 존재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창조주요 주관자로서 그런 미물들조차 보살펴 주신다는 겁니다. 6절.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앗사리온은 당시 로마 시대의 최소 화폐 단위입니다. 1/16 데나리온에 해당됩니다. 1데나리온은 잘 아시는 대로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얼른 알기 쉽게 하루 품삯을 지금 우리 돈으로 5만원으로 쳐준다 하더라도 참새 한 마리에 얼마나 됩니까? 겨우 1천원 조금 넘을까 말까한 액수입니다. 

이렇게 하찮은 존재도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보살펴 주신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잘 보살펴 주시겠느냐 이겁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세밀하신 분입니다. 심지어는 우리 인간의 세포 하나까지도 살펴주십니다. 세포가 얼마나 미세합니까? 102층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꼭대기에서 땅바닥에 기어가는 개똥벌레를 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우리 눈에 도저히 안 보인다는 얘기죠. 그런데 하나님의 현미경에는 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주 미세한 부분까지 아시고, 또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광대하신 분입니다. 인간이 현재 알고 있는 지식으로 봐도 우주가 얼마나 광대합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태양계의 작은 부분인데, 태양계는 우리 은하계의 지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또 우리 은하계는 무수한 은하계의 또 작은 일부입니다. 이렇게 따져 보면 우리 인간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광대하셔서 이렇게 큰 스케일의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천체 망원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망원경을 갖고 섭리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 하나님이 얼마나 광대하시고 세밀하신 분인지 구구절절 노래합니다. 시139:9~10 “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우리 인생이 어디에 있든지, 우리 생각에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곳에서도 우리를 지켜보시고 돌보신다는 겁니다.

지켜보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감시하기 위해 보는 것과 보호하기 위해 보는 것입니다. 요즘 연예기획사에서 소속 연예인 휴대폰을 복제해서 사생활을 감시했다고 해서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보살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약점을 잡아서 협박하고 이용해 먹기 위해 그러는 것이죠. 얼마나 야비하고 치사하고 무섭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도와주시기 위해 지켜보신다고 말씀합니다. 

또 시17:8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 이 표현이 흥미롭습니다. 약한 눈동자를 잘 보호하기 위해 눈꺼풀이 자동으로 움직이도록 해 놓으신 것처럼 연약한 우리를 그때그때 세밀하게 지켜 주십니다. 날개로 보호한다는 표현도 나오는데, 시36:7에도 비슷한 표현이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 독수리 같이 큰 새가 새끼를 날개 아래 숨기고 보호하는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아무도 건드리지 못합니다. 얼마나 든든합니까? 


[4] 세상 사는 지혜 : 신뢰, 기도, 증거 

그러므로 험한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지혜로운 인생은 어떤 겁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절대 주권자 하나님을 믿기에 그를 신뢰하고, 그에게 기도하고, 그를 자랑하고 증거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① 신뢰 :

첫째로, 지혜로운 인생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참새 이야기를 하신 후 이어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7절 보시죠.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미물인 참새도 돌보시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얼마나 세밀하게 보살펴 주시는지 강조합니다.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다는 겁니다. 보통 성인 한 사람의 머리카락 숫자가 10만개 정도라고 합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그리고 매일 조금씩 숫자가 달라집니다. 내 머리카락이라도 나는 도저히 셀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런 우스갯소리가 있잖아요. 누가 효자 성도인가? 머리숱이 적은 사람이 효자 성도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숫자 세는 수고를 덜어드리니까 ... 하지만 이건 정말 우스갯소리죠. 하나님은 우리처럼 하나하나 카운트하시는 게 아닙니다. 척 보면 그냥 아십니다! 머리숱이 많으신 분들 하나님께 죄송하게 생각하지 많으셔도 됩니다. 괜히 염려하다 머리카락 빠집니다. 

마6:25 이하를 보면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죠.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농사하지도 않고 창고에 들이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아도 잘 살아가지 않느냐! 아주 풍성하게 아름답게 살아간다! 들판의 백합화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영광보다 낫지 않느냐 이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살펴 주시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걱정하고 근심한다면 그것은 정말 믿음이 없고 어리석은 것입니다. 마6:26,30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26 ...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 하냐 ... 30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사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이 굉장한 겁니다. 우리가 먹고 사는 문제 하나만 봐도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회식한 후 밥상을 보면 정말 많이 먹고 산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도 또 남았으니 얼마나 대단한 겁니까? 그 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먹은 밥, 마신 물, 입은 옷, 신발, ... 그 양이 대단합니다.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이 공급해 주심을 생각하면 정말 놀라운 정도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불신자들에게조차 이런 은총(일반 은총)을 베푸시는데, 하물며 예수 십자가 피로 값 주고 사신 우리 성도들은 얼마나 잘 보살펴 주실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롬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독생자 예수님까지 주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낄 게 뭐냐 이겁니다. 완전하게 보살펴 주십니다. 때때로 우리에게 고난이 온다 하더라도 그것은 지나가는 과정이지 결국은 우리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또 사49:15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오죠.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는 겁니다. 너희들은 내 새끼들인데 내가 왜 잊어버리겠느냐 이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벧전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Cast all your anxiety on Him)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염려되는 것 다 맡기면 됩니다. 이게 신뢰입니다. 던져버리라는 겁니다! 마치 수류탄 들고 있으면 불안하니까 멀리 던져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던져 놓고 마음 턱 놓고 편히 살라는 겁니다. 

어느 기차에 어린 꼬마가 타고 갑니다. 옆 사람이 아무리 봐도 혼자인 것 같아서 물었다. “얘야, 안 무서우냐? 혼자 다니는데 ... ” 그러자 꼬마는 태연하게 대답합니다. “뭐가 무서워요? 우리 아빠가 기관사인걸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인생 기차, 세상의 기차에 하나님 우리 아빠가 기관사인데 뭐가 무섭단 말입니까?

하나님을 신뢰하면 이렇게 마음이 든든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아무리 큰 권세자라도 불안합니다. 염려와 근심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이야기입니다. 측근 인사가 그에게 넌지시 물었습니다. “각하도 무서울 때가 있으십니까? 그러자 그가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1주일에 한 번씩 무섭지. 이발사를 불러 면도할 때 그래. 믿기는 하지만 혹시 적에게 포섭되어 나를 찌르면 어쩌나 하고 말이야.” 천하의 나폴레옹이라도 전적인 신뢰가 없으니까 불안한 겁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낮고 천해도 하나님을 전폭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없는 권세자보다 훨씬 더 나은 겁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우리 자신의 인생에 대한, 미래에 대한 유일한 대책인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므로 마음 놓고 평안히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② 기도 :

둘째로, 지혜로운 인생은 하나님께 기도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맡기면 되지만, 더 좋은 것은 그러기에 적극적으로 기도하면 더 좋습니다. 빌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신뢰하기에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줄 믿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수 있는 겁니다. 

사58:9 보면 이런 말씀도 나옵니다.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우리가 부르면 언제라도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겁니다. 우리가 부스럭 소리를 내거나 신음 소리만 내도 나를 지켜보면서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께서 듣고 도와주십니다.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살아가느라 너무 힘겨웠습니다. 돈 주머니가 텅텅 비고, 밀가루 통 바닥이 보일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배고프다고 칭얼거립니다. 빵을 만들어주려고 밀가루를 푸려고 하지만 바닥에 조금 남아 바닥을 득득 긁어야 했습니다. 그 순간 믿음이 흔들리고 울컥 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하나님도 무심하다고 불평을 합니다. 막내 아이가 다리를 붙잡고 울면서 말합니다. “엄마, 울지 마! 하나님이 바닥 긁는 소리 듣고 계시잖아 ... ” 철없는 아이의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회개합니다. 그리고 얼른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로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간증입니다. 

지난 1월 20일은 역사적인 날이었죠. 미국 역사 상 최초로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 날입니다. 오바마가 취임하는 광경을 보면서 여러 가지 부러웠습니다. 그 중에 가장 인상적인 것은 취임사를 마치고 오바마가 복창한 말입니다. “So help me, God!” 그는 자신이 가장 존경하는 링컨이 취임 당시 사용한 성경에 손을 얹고 취임 선서를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그대로 할 수 잇도록 하나님께 도움을 간구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세계 최고의 권세를 가진 미국 대통령도 두렵고 떨리는 일이 얼마나 많겠습니까? 정말 하나님이 도와주셔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간구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소서!” 부디 이런 간구로 날마다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③ 증거 :

셋째로, 지혜로운 인생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삽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을 언급하신 후 이어서 성도가 감당할 책임에 관해 말씀하십니다. 본문 8절~9절을 보십시오. “8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9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cf. 마10:32~33 ‘내 아버지 앞에서’) 

참 믿음의 증거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담대하게 예수님을 시인하고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을 더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습니다. 교회 역사 가운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거하다가 자기 목숨까지 바치며 순교했습니다. 

서머나(현재 터키의 Izmir)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A.D. 80~165)의 순교 사화입니다. 이즈미르에 기념교회 있는데, 그 안에 순교 장면이 그려진 성화가 걸려 있습니다. 그는 황제 숭배를 거부하다 체포되었습니다. 온갖 회유를 다했지만 그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는 재판관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믿음을 증거했습니다.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 번도 모른다고 한 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는 이 고백을 마치고 마침내 화형을 당하고 순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유로이 신앙생활 하는 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면서 신앙을 숨기기 일쑤입니다. 우리가 정말 하나님의 보살펴 주심을 믿는다면 담대히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고 증거해야 마땅합니다. 이번 설 연휴에 가족 친척들을 만나게 되면 지혜롭게 우리의 입술과 행동으로 예수님을 증거하시기 바랍니다. 그게 참 믿음의 증표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정말 어렵고 두려운 곳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전능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부디 그분의 보살펴 주심을 굳게 믿음으로 당당하게 승리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홍문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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