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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기도 (행 4: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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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는 기도 (행 4:23~31)


저는 어릴 때부터 교회에서 살았기에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신했었는데, 그것이 착각임을 깨닫게 된 첫 사건이 유치장에 갇혔을 때였습니다. 신학생 때였는데, 당시는 대학교에서 날마다 데모가 있었습니다. 광화문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당했는데, 제 가방에서 시국토론회 원고가 나온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데모 주동자로 몰려 유치장에서 하루를 지내게 되었습니다. 유치장에 들어가 계속 형사들에게 불려 나가서 취조를 받는데, 제가 잘못한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두려운 것입니다. 

‘내 인생이 여기서 뒤틀어지는구나? 이제 앞으로 더 어떤 어려움을 당할까? 말로만 들었던 고문이라는 것을 내가 당할까? 내가 정말 갑자기 데모 주동자가 되는구나...’ 별의별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그동안 가정과 교회라는 온실 안에서 있던 나의 믿음은 유치장에서 다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믿음이 아무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제 마음에 평강도 없고, 지금 생각해도 아주 부끄러울 정도로 제가 데모 주동자가 아니라는 것을 변명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하나만 가지고 나보다 더 당당한 청년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이 정도인가? 너무나 부끄러웠습니다. 그 다음부터 다른 사람의 믿음이 좋다 나쁘다 하던 비판이 사라졌습니다. 자격이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제가 실제로 어려운 상황에 부디쳐 보니까 제가 가지고 있던 믿음이라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아마 예수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평생 감옥이라고는 가볼 이유가 없었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착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평생 감옥에 갈 이유가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전도자가 되는 바람에 붙들려 감옥에서 하루를 지내며 매도 맞았습니다. 

지금 유치장에 하루 들어갔다 나오는 것도 다시 상상하기 싫을 정도의 끔찍한 경험이라면, 그때 당시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았다면 베드로와 요한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리고 공회는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 사용 금지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시는 예수에 대해서 얘기하지 말라.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그러면 죽는다’ 는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그런 무시무시한 명령을 받고 나와서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 성도들과 같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담대하였습니다.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애절하고 조급한 마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루 동안 감옥에 갇혀서 매를 맞고 공회로부터 예수 이름으로 말하면 죽는다는 엄함 경고를 듣고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살려 달라, 도와달라, 어려움이 사라지게 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당당하게 하나님이 천지의 주재자이심을 고백하고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었고 그들은 정말 성령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입니까? 
교회에 다니며 주일마다 예배에 출석하는 것입니까? 흔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러 이러한 것들을 하지 않는다.’고 말하는데, 술 마시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도박하지 않고 담배 피우지 않으며 세상에서 도덕적 가치들을 지키며 선한 삶을 사는 것입니까? 아니면 특별한 종교 체험, 곧 성령 체험을 했다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진짜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정말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그가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보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 때 우리가 신앙 고백을 했습니다만, 내 신앙 고백이 진짜 신앙 고백인가 하는 것은 위기를 만나봐야 합니다.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은 두려운 일을 겪어보아야 비로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일도 더 이상 나를 두렵게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신앙 생활을 잘해왔다고 자부하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인생의 위기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는 것을 봅니다. 마음에 평안 다 사라지고, 너무너무  두렵고 정말 강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허둥대는 자기를 보면서 하나님을 믿는 내가 왜 이런가? 이것이 믿음인가? 자기 믿음에 대한 처절한 좌절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어려울 때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을 곧잘 합니다. 신앙이야말로 정말 그렇습니다. 어려울 때 믿음이 진짜 믿음인 것입니다.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치고 모든 길은 막히고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을 때 여전히 평안하고 오히려 감사가 된다면 그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다 죽여 없애 버리겠다는 위협을 받았을 때 사도들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그들의 기도에 하늘의 권능이 임하였습니다. 기도하던 곳이 진동하였다고 했습니다.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이렇게 믿어야 하는 것이구나 하는 말씀을 오늘 읽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더욱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다시 강력한 성령의 임하심이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건을 제 2의 성령강림이라고도 말합니다. 

사도들이 도대체 어떻게 기도하였기에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들은 환란 중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천하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이심을 고백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나 죽고 예수로 사는 믿음을 가진 자가 아니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사도들이 믿은 하나님은 철학자들이 믿은 하나님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막연한 하나님에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시며 자기들과 함께 하심을 알았습니다. 사도들이 이처럼 하나님에 대하여 확신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성령이 충만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의 목적이 죄사함의 확신을 주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아주 틀린 것은 아닙니다만, 그것은 한 단계에 불과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입니다. 이것이 기도 생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구체적인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정확하게 받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분명히 알았기에 무시무시한 권력 기관인 산헤드린이 죽이겠다고 위협하고 헤롯 왕과 총독 빌라도가 위협을 해도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원하기만 하면 온 우주라도 동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 앞에 이 당국자나 권력자들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여겨진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면 그들은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것입니다.  

사도들이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어려움을 없애달라, 환란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했습니다. 

29-30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한 마디로 말하면 감옥에 들어가도 좋고 매를 맞아도 좋고 죽임을 당해도 좋으니 오직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이 나타나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기도할 수 있습니까? 사도들이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성도의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려움이 닥칠 때 환란이 다가올 때 “하나님, 내가 어려움을 만나도 좋습니다. 내가 감옥에 들어가도 좋습니다. 내가 매를 맞아도 좋습니다. 죽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좋습니다. 오직 이런 일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더 전해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적과 기사가 더 나타나게 되기만을 원합니다.”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분명히 통과한 성도만이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나는 이미 예수님과 함께 죽고 이제는 예수님으로 사는 것이 분명할 때 누구나 다 이런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하나님이 역사하셨습니다. 땅이 진동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저는 설교 준비를 하면서 참으로 중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악한 자들이 사라지고, 환란이 사라지게 해 주소서.” 하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마나 한 기도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까지 그런 일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가 다 제거될 때가 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도들에게도 환란이 오고 악한 자는 여전히 있습니다. 왜? 아직은 구원받아야 될 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을 전도해야 될 때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한 자가 완전히 구분되는 날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 때까지 전도해야 하고 그 때까지 악한 세력은 역사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악한 자를 만나고 환란을 만났다고 “하나님, 이것이 없이 되기 원합니다. 하나님, 이런 환경에서 구원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그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그 기도는 응답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그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기도해야 됩니까?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오직 사도들처럼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이런 일이 있다 하더라고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을 계속 하겠습니다! 박해가 있든지 환란이 오든지 주의 복음 증거는 계속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기사와 이적이 계속 일어나게 하옵소서.” 

여러분이 담대하게 이렇게 기도하게 되면 반드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여러분 가운데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어서 그것을 허락받는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에 십자가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예수 안에 죽고 예수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모를 때는 기도가 이방인들이나 불신자들이나 다른 종교인들과 똑같이 그저 하나님께 내 소원을 이루어달라고 구하는 것인 줄로 여기지만, 이제 예수님 안에 죽고 예수로 살게 되는 눈이 뜨이고 나면 기도는 전혀 의미가 다릅니다. 기도는 성령님께서 우리가 하나님의 역사에 참여할 수 있게 해주시려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도록 우리를 초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미 하실 일을 이미 다 계획해 놓으시고 우리로 하여금 기도에 동참해서 그 일에 참여시키시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일에 동참시키려고 기도를 시키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읽어 보면, 성령의 역사가 먼저 시작되고 그보다 한 템포 늦게 성도들의 기도가 따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기도가 가장 먼저 기술된 곳은 1장 14절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그 약속을 붙잡고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기다린 것입니다. 

성령강림은 사도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아닙니다. 그들이 기도했기 때문에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강림은 기도하기 전에 이미 약속되어 있었습니다. 기도를 예수님이 시키신 것이지 그들이 스스로 알아서 기도한 것이 아닙니다. 기도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믿고 기다리는 순종의 표현이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사건 이후 교회는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였고, 예수의 이름으로 병든 자가 고침 받고 많은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사도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습니다. ‘아,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일이구나!’ 그래서 그 후 사도들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이 역사가 계속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하실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핍박을 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들은 권력자들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간구하지 않고, 그 위협에도 불구하고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나게 해 달라고만 기도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할 때, 하늘의 권능이 임하여 땅이 흔들리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기도를 하게 된다면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도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땅이 진동한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1806년 미국 윌리엄스 대학 교정의 숲 속에서 사무엘제이밀스를 비롯한 여섯 명의 대학생들이 불신앙이 가득한 학생들과 구별하여 학교 뒤 단풍나무 숲에 들어가서 매일 기도했습니다. 소나기를 맞으면서도 땅끝까지 세계 선교의 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것이 불씨가 되어 19세기 20세기를 거치면서, 미국 대학을 중심으로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고 세계 선교의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대학생들이 세계 선교사로 나가겠다고 헌신을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오게 된 것입니다.

비록 소수의 인원이 연약한 가운데 누구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기도하는 것같아도 하나님이 하시려는 일을 붙잡고 기도를 하게 되면 땅을 뒤흔들어놓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1904년 영국 웨일즈에서 에반존로버트를 중심으로 탄광 노동자들이 모여서 기도모임을 만들었는데 모일 때마다 "영적 부흥을 주시옵소서."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들의 간구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1904년부터 1906년 사이에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받는 역사가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것을 웨일즈의 대부흥이라고 말합니다.    

안산에서 젊은이교회를 창립할 때 한 청년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제가 처음 청년부에 올라왔을 때, 몇 안되는 언니 오빠들과 토요예배를 준비하시는 전도사님을 보면서 참 썰렁했었습니다. 청년부에서 아무리 이런 저런 행사를 준비해도 나오는 청년들만 나오고 있었습니다. 전 학교에서 여의도 순복음교회 소속 기독교 동아리 CAM에 가입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을 향한 청년들의 뜨거운 사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지체들을 섬기며 자기의 것들을 드리는 그들이 부러웠습니다. 순복음교회 청년 금요철야도 따라가 많은 젊은이들의 뜨거운 열정도 보았습니다. 정말 은혜로웠습니다. 그러나 토요일과 주일에 우리 교회로 와보면, 참 안타까웠습니다. 아니 화가 났습니다. 왜 우리 교회 청년들은 이 모양일까 하구요.
  
그 때 저를 양육해 주던 언니가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을 보고 안타까워하거나 화만 낼 것이 아니지 않니? 우리는 우리 교회 청년들에게도 그런 부흥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지 않겠어?” 그때서야 전 저의 잘못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들도 순복음교회 청년들 만큼 부흥하고 주님을 향한 비젼을 품게 해달라구요. 
  
어제 젊은이 예배가 창립되었습니다. 어제까지도 전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오늘 아침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 청년들을 부흥시키시려고 우리에게 기도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그리고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음을 깨달았습니다.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조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려고 하는 엄청나고 놀라운 일들을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기도할 제목으로 부어주셔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것이기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기도할 때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그 기도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난 다음에야 우리의 기도는 제대로 된 기도가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핵심은 오직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 받았다고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해석을 잘못할 때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1장에 가면 성령께서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체포당할 것을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미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만류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바로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런 일을 겪고 그리고 로마로 가게 될 것을 하나님이 이미 사도 바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고 가라는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보여주시고 깨닫게 하셔도 하나님의 뜻을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대로 가르쳐주셔야만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왜 기도하셔야 했습니까? 
예수님의 기도의 핵심은 누가복음 22장 42절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신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가지셨기 때문에 육신의 소욕이 있으셨습니다. 드시지 못하면 배가 고프고 잠을 자지 못하면 피곤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고통스러우셨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재발견하고 확인하고 확증해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 땅에 오셨는지를 하나님의 계획을 항상 확인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계획을 계속 분별하는 것이 예수님의 기도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기도 중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면 성령께서 반드시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 제게 이런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기도하면 반드시 깨닫게 해주십니다.

사도들은 환란을 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25절-28절에 보면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시편 2편을 통하여 모든 세력이 합세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지 못하도록 대적할 것에 대하여 예언하셨음을 깨닫게 해 주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런 일이 있으라고 벌써 말씀하셨군요! 세상의 군왕들과 권세자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전해지지 않도록 가로막을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미 말씀하셨군요. 그렇다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더욱 이루어지기만 원합니다.”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무슨 문제가 발생했을 때, ‘하나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느냐?’는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고가 났습니까? 병이 들었습니까? 자녀에게 문제가 있습니까? 큰 손해를 봤습니까? 하나님이 관여하시는 중에 발생한 일입니다. 적어도 하나님은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계시다는 것을 믿으면 기도는 달라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제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제게 하시려는 일이 무엇입니까?” 

제가 어느 중소기업에 가서 매주 예배를 드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업이 몇 년 동안 부도위기에 몰려있었습니다. 사장인 집사님이 어느 날 말했습니다. ”저는 그동안에 나름대로 기도한다고 했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오는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저는 사업만을 위하여 기도하였습니다. 이제야 저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더 원하시는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바뀌고 회사의 운명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 전에는 두려운 마음과 염려때문에 회사 일을 처리하는데 하나님 뜻대로 하지 못했던 일이 많았답니다. 그런데 기도가 바뀌면서 두려움도 사라지고 염려도 사라지고 회사의 모든 일을 결정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방법으로만 했더니 의외로 회사의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입니다. 

감리교 목회자 기도 모임에서 한 목사님이 애통함으로 고백을 하였습니다. “저는 주의 종이면서 주님의 기쁨은 생각치 않고, 나의 기쁨만 구하고 있었습니다. 종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필요하신 곳 주님이 안타까와 하시는 곳에 있어야 함을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종이 기쁜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야 합니다!‘ 내가 기뻐할 것이 아니라 주님이 기뻐하시면 된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하니 모든 것이 달리 보였습니다.“ 

여러분, 기도가 제대로 나오기 시작하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 구하면 나는 어떻게 됩니까? 이것은 정말 모르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내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자가 가장 놀라운 복을 받은 자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자아가 죽지만 않으면 우리는 시작부터 끝까지 달라고 기도하게 됩니다. 실컷 구하고 나서도 “못 다 구한 것까지 주실 줄 믿습니다!”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도처럼 불쌍한 기도는 없습니다. 응답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 소원보다 훨씬 놀라운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3장 2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모든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라고 했습니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기도와 간구에 응답하지 않으심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학생 때 결혼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였던 여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녀와 결혼하지 않은 것을 너무나 기뻐합니다. 저는 여러 번 생각하였습니다.‘하나님, 지금쯤은 그것을 응답 받아야 합니다.’라고. 그러나 뒤를 돌아보면, 저는 그때 그것을 응답 받아서는 안되었습니다. 만약 제가 그것을 그때 받았더라면 저에겐 말할 수 없는 손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다렸기 때문에 그 응답은 너무나 크고 좋았습니다.”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무엇을 줄까?”라고 물으셨을 때 자기를 위한 것들을 구하지 않아서 엄청난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왕상 3:10-13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종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하지 않는다 해도 하나님은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에 구경꾼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는 우리의 기도는 사실 하나님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한 기도입니다. 우리 자신을 위한 최상의 간구입니다. 

캐나다 토론토에 있는 The People's Church 목사 오스왈드 스미스는 30세 되던 생일에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평생 이 기도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그가 구하지도 않은 당대 유명하고 존경받는 목사이며, 그가 목회했던 교회는 한때 세계 최대의 교회로 부흥되었던 것입니다.

제가 처음 나를 위한 기도를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을 때가 장애인이 될 위기 때 군인병원 수술 대기실에서 드렸던 기도였습니다. 저는 그날 예수님을 나의 생명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역사가 일어나려면 기도가 바뀌어야 합니다. 오른쪽 다리를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두 다리 멀쩡한 채로 사는 것 보다 비교할 수없이 좋은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내 종아 수고하였다.” 하는 말씀 한 마디를 듣는 것이었습니다. 오직 그것만이 소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나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다른 어떤 기도가 필요하겠습니까? 
“오직 주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그것 밖에 없습니다. 그 속에 다 있습니다. 놀라운 기적이 있습니다. 환란과 어려움이 우리 눈 앞에 와도 우리의 기도는 오직 하나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주의 복음이 증거되고 예수의 이름으로 기사와 표적이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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