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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2) (딤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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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2) (딤후 2:15)


젊은 부부가 사는 옆집에 어느 날 신혼부부가 이사를 왔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새댁이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었는데 그 부인이 봤더니 얼룩얼룩한 때가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아무리 새댁이라도 그렇지 빨래도 제대로 못하냐!’고 생각하면서 넘어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도 그렇고 또 그 다음날도 빨래를 해서 널기만 하면 이상하게 얼룩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인이 남편에게 말합니다.

“아니, 옆집 여자는 빨래하는 법도 안 배우고 시집왔나봐! 나는 새댁 때 저러지 않았는데 저 집 남편은 참 불쌍하다. 당신은 나 같은 부인 만난 것을 복으로 아세요.”그럽니다.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옆집에 널어놓은 빨래에 윤기가 나는 것입니다. 부인이 깜짝 놀라서 남편에게 쫓아와서 말합니다.“여보, 참 희한한 일이네 옆집 빨래가 깨끗해 졌어, 새댁이 우리 얘기 들었나봐!” 그러자 남편이 한심하다는 듯이 웃으면서“우리 집 베란다 유리 닦았어!” 하더랍니다.

사람이 어디에 관심을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 그의 삶이 달라집니다. 어떤 사람은 늘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삽니다. 다른 사람의 단점, 다른 사람의 약점,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먼저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다른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문제가 있고 그 사람의 잘못으로 이 지경이 되었다라고 생각합니다. 

그런가 하면 모든 것을 자신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먼저 보고 남을 봅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훌륭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먼저 생각했더니 그 사람의 장점이 보입니다. 겸손해 졌더니 존경이 우러나옵니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했더니 해결점이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삶으로 본다면 후자가 훨씬 인격적이고 훌륭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중요한 삶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은 자신도 아니요, 타인도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이 내 삶의 기준이요, 내 삶의 방향이요, 목적입니다. 말씀에 기준하여 생각하고, 말씀을 따라 행동하고, 말씀이 나를 이끌어 가시는 대로 살아갑니다.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았더니 되는데 말씀을 떠나 살았더니 안 됩니다. 

그래서 잠시라도 말씀을 벗어나서는 갈길 몰라 하는 이런 사람을 신학적 용어로 <영주도적인 사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말씀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영 주도적인 사람>이 될 때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인정받는 일꾼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우리가 <영주도적인 사람>이 되기를 원하며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자세가 필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딤후 2:15중에"너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 하라"는 말씀이 곧 그 말씀입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우선은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올 해에는 모든 예배에 빠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최소한 주일 예배, 주일찬양예배, 삼일기도회는 참석해야합니다. 특히 제직들은 공식적인 이 예배들만큼은 지키시기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서 말씀을 들어야 신앙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서 성숙된 신앙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글렌 힐슨(Glann Hinson)]이라고 하는 현대 영성학자는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가까이 귀담아 듣지 못하는 이유가 두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가 너무 바쁘다는 것입니다. 바쁜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정당하게 바빠야 합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게 바빠야 합니다. 일 자체에 몰두하고 성과주의에 빠져서 성공이 무엇인지 생각하지도 못합니다. 성공의 의미도 깊이도 없이 그저 뛰고만 있는 것입니다. 생각하고 뛰는 것이 아니고 뛰면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뛰고 바쁜데 왜 바쁜 지도 모르겠고 이 바쁨의 결과가 무엇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너무 산만하다고 했습니다. 지금은 볼거리도 많고 들을 거리도 많습니다.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골라 보고, 골라 들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런데 그만큼 산만합니다. 무언가 정리되지 못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교회에 있어야 할 시간에 어딘가 정처 없이 떠돌고 있는가하면 심지어는 예배 시간마저도 잊어먹고 삽니다, 이 상황이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지 못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깊은 묵상도 깊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냥 바쁜 세상과 맞물려 시끄럽게 돌아가는 속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글렌 힐슨]은 이렇게 두 가지를 이야기 합니다만 여가에 또 하나를 덧붙이고 싶습니다. 그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교만입니다. 이 교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게 하거나 혹은 듣지 못하게 합니다. 여러분이 때때로 말씀이 들리지 않거든 그때는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구나 생각하시면 됩니다. 교만한 채로 기도하고 성경 보고 심령이 가난해지지 않은 교만한 마음으로 설교를 들을 때 나의 마음에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지 않는 것은 이미 현재적으로 심판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멸망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멸망하게 하는 교만을 즐기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성경이 말하기를"교만은 멸망의 선봉"이라 그랬습니다. 이 말씀을 알기는 합니다만 묘하게도 멸망은 싫어하면서도 교만을 즐긴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시는데 앞에서 어떤 권사님이 고개를 수그리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설교하시다 말고 강대상을 툭툭 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권사님, 눈 좀 뜨세요! 왜 교회 와서 예배시간에 자꾸 조세요. 다음 주에 올 때는 고춧가루를 준비해 와서 졸릴 때마다 눈에 고춧가루를 좀 뿌리시기 바랍니다. "그랬더니 권사님이 중얼중얼 거리면서 혼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내 눈에 고춧가루를 뿌리려고 하지 마시고, 목사님 설교에다 고춧가루를 좀 치십시오. 목사님 설교가 너무 싱거워서 좁니다." 그러면서 또 눈을 감아버리더랍니다. 목사는 교인이 존다고 야단치고, 교인은 목사의 설교가 싱겁다고 야단이니 이런 교회가 부흥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설교하실 때도 들은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은혜를 받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서 적개심을 품은 사람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돌로 예수님을 치려고 했습니다. 결국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한 그들이 예수님의 설교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도 말씀을 듣는 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무엇보다도 말씀을 듣는 것을 즐겨해야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설교를 하면서 감사하고 보람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게 언제냐 하면 누군가가 대화를 하는 중에"목사님이 언제 설교 하셨던 것처럼"이라고 하면서 제 설교의 내용을 인용 할 때입니다. 그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만 그 때가 한 주간씩 애를 쓰면서 준비하여 선포한 설교에 대한 말할 수 없는 감격을 얻는 시간입니다. 그때는 책임감과 함께 땀을 흘리며 고민한 보람에 감사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야기하다 보면 속으로"내가 저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나! 도대체 예배시간에 설교를 듣긴 들었나!"싶을 정도로 설교한 나 자신이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때는 하루 종일 괴롭습니다. 

[아치발트 하트]라는 심리학자가<마음의 습관>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사람에게는 행동의 습관이 있듯이 마음에도 습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과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그 마음의 습관이란 명백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곧, 교만과 겸손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말씀은 나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감사하게 만듭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음성이 마음으로 들려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마음으로 듣지 않기에 순종이 없습니다. 설교는 철학 강의도 아니고 성경풀이도 아닙니다. 설교는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말씀이요, 실천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독일에 있는<뤼벡교회>의 낡은 벽에 있는 작자미상의 시가 한 수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주는 우리에게 말씀 하신다>라는 제목의 그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슬기라 부르면서 배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깨끗하다 부르면서 사랑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부하다 부르면서 내게 구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어질다 부르면서 오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부르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부르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듣지 않으면 실천이 없고 들었다면 실천해야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란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늘 듣는 사람이요, 말씀대로 행할 때에 인정받는 일꾼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에서 성경을 통독하는 행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어찌나 지루하던지 건너뛰면서 한 절씩 봅니다. 그리고 말씀이 시키는 대로해야지 결심합니다. 

아무 데나 딱 펼쳐 봅니다. "예수께서 가시니라"-"그래, 오늘은 그만 읽고 나도 가야지" 첫 날은 그냥 집에 갔습니다. 둘째 날 역시 성경책을 아무데나 펼쳤습니다."예수께서 주무시니라"-"나도 주무셔야지"하고 종일 잠만 잤습니다. 

그러던 셋째 날, 아침에 성경을 딱 펼쳐놓고 보았더니 마27:5절이 나왔습니다.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영 찝찝한 기분이 들은 이 사람이 아무래도 한 절을 더 봐야겠다 싶어 또다시 성경을 펴보았더니 눅 10:37절의 마지막 부분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더 곤란해진 사람은 다시 한 번 성경을 펴보았습니다. 

이번에는 요13:27절의 마지막 부분입니다."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이 사람이 게을렀던 것을 회개했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때 그때 내 합리화를 위해 존재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배 때마다 들려지는 말씀 자체가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진리의 말씀 앞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거북이신자>란 말이 있습니다. 새는 먹지 않고 9일을 산다고 합니다. 개는 먹지 않고 20일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먹지 않고 자그마치 500일을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거북이 신자>란 매일 영의 양식인 말씀을 먹지 않고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말씀에 대한 열망도 없습니다. 깨달음으로 먹으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은혜도 없습니다. 이게 거북이 신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는 정치문제도 중요하고 경제문제도 중요합니다. 교육이나 사회 전반의 문제가 큰 관심사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문제들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해답을 줄 수 없다는 데 고민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빈자리를 정치, 경제, 철학이 채워 줄 수 없습니다. 결국은 말씀 앞에 서야합니다. 이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지혜가 여러분에게 충만하여 인정받는 일꾼으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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