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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세속적인 믿음을 버리자 (요 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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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믿음을 버리자 (요 2:23~25)


얼마 전, 20년 만에 특별한 제목을 붙여 대학원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함께 모인 적이 있습니다. 함께 예배하고(설교를 맡은 친구가 설교자로서 신실하게 제대로 말씀을 준비해 왔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지한 목회 이야기, 점심 먹기, 기독교상담연구소를 하고 있는 친구목사의 특강(기독교인 자살의 목회적 이해) 등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벌써 은퇴하신 목사님도 계시고, 60고개를 훌쩍 넘긴 목사님들도 계십니다. 상형님 벌 되시는 목사님 한 분이, 20년 지나온 당신의 목회여정을 말씀하시면서, 결론은 하나였습니다. 아우님들 보기에 부끄럽다, 나같이 목회하면 안 된다는 것, 말해주려고 용기내서 왔노라(목회에 전념하지 않았다, 목회를 아르바이트처럼 했다, 부끄럽지만 그렇게 목회하면 안 된다는 것 말하고 싶어서 왔노라). 요즘 자꾸 꿈을 꾸신답니다. 기도하며 몸부림치는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교회 개척을 해 보고 싶으시답니다. 크든 작든 풀타임 목회, 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그 모임 중에 조용하게 하나님께서 제 마음에 주신 한 가지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은, 우리들을 그저 쉽게 믿어 주시고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내 기준, 내 생각 딴에는 괜찮다 할지는 모르지만, 예수님도 그렇게 생각하실까? 그게 아니라는 말씀 말입니다(착각多). 

어느 시인의 시에, 이런 시구가 있습니다. 

교회 뾰죽한 종탑 위에 세운 십자가는 
하늘을 손짓하며 발돋움하고 서 있고
깨진 뚝배기 두드리듯 종탑
그 밑 교회 마루에 엎드려
아바 아바지 찾는 무리들이사
고의나 치마로 꼬리 감춘 각종 여우들

작가가 기독교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시인이 평가하는 교회와 교인들에 대한 이미지는 그리 좋아 보이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이 시인의 눈에 보기에는 교회 다닌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왜 그는 깨진 뚝배기 두드리듯이 종탑 밑, 교회 마루에 엎드려 하나님 아버지를 찾는 남녀 무리들을 ‘꼬리 감춘 각종 여우들’이라고 했을까요? 


[믿음이라고 다 인정받는 믿음이 아니다]

본문 23 말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유월절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유월절 내내, 예루살렘에 머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머무시는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무슨, 표적을 행하셨을까요? 유월절은 유대인이 지키는 최대의 명절입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각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Diaspora)도 예루살렘에 올라왔습니다. Diaspora들만 올라온 것 아닙니다. 헬라인 중 개종한 자들, 심지어는 이방인 순례자들도 올라왔습니다. 말 그대로 人山人海를 이룹니다. 숙박업소를 잡거나, 민박을 하거나, 그러지 못하면 텐트를 치고 지내면서 유월절을 지켰습니다.

그 많은 인파들 틈바구니에서 예수님께서 무리들에게 표적을 행하셨던 모양입니다. 무슨 표적을 행하셨는지는 본문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이야,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는 일이 아니고 또 다른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유대인의 전통이나, 율법주의적인 신앙으로는 꿈도 꿀 수 없고, 볼 수도 없고, 이루어질 수도 없는 일들이, 예수님의 표적에서 나타난 것이 틀림없습니다(우리가 보는 예수님의 표적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표적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표적 자체에는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도리어 전혀 다른 문제에 그의 관심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23 보십시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끝말이 심상찮습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었으나” 무슨 말씀입니까? 표적을 보고 예수님의 이름을 믿게 된 무리들이 많았지만, 그들의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은 냉담하셨다는 것입니다.

참 이상한 예수님이십니다. 실망스럽습니다. 어찌 자기 이름을 믿는 많은 사람들의 믿음을 인정해 주시지 않으신단 말입니까? 예수님의 냉담에 사도 요한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4 말씀을 또 보십시오. 냉담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행동하셨는지, 그 속마음까지 샅샅이 전해줍니다.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공동번역은 이 말씀을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마음을 주지 않으셨다”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25 말씀에서도 예수님께서 냉담하신 이유를 한층 더 강화시킵니다.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믿는 의도)을 아셨음이니라.” 예수님은 이미, 자기를 믿노라하는 그 사람들의 의도를 간파하셨다는 것입니다. 


[자기 욕심에 맞아 떨어지니 믿어주는 사람들의 믿음이었기 때문]

표적을 보고 예수를 믿노라고 고백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마음조차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음을 주지 않으신 이유가 뭘까요? 사람들이 예수를 믿은 것은 그저,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이 자기들의 욕심과 맞아 떨어졌을 뿐이기 때문입니다(뿐이고).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받아주셨을 리가 있겠습니까? 여러분 같으시면, 욕심 때문에 알랑거리고, 간까지 다 빼주는 시늉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라도 기꺼이 받아주시겠습니까? 시원찮은 사람의 눈으로 봐도 속이 다 들여다보이는 데, 어디 예수님을 속입니까?

은퇴하신 우리교단 목사님 중, 엄두섭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목사님은 은퇴하신 후, 당신의 목회를 자책하는 맘으로 경기도에, 개신교隱聖修道院을 설립하신 분입니다. 당신이 손수 일구어 놓은 그 수도원을 장로회신학대학교 영성수련원으로 쓸 수 있도록 터를 닦으셨던 목사님이십니다(신학생들 영성훈련/유럽 개신교수도원 多). 엄 목사님께서 수도원에 계실 때, 종종 가서 기도하고 지내다 온 적이 있는데, 한 번은 새벽기도회 시간에 그런 말씀하셨습니다.

바리새인 종교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바리새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지만,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너희는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시면서, 바리새인 종교를 형식만 남고, 율법의 정신과 얼이 빠져버린 외식주의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신앙은 오늘 기독교인들이 그림은 위엄스런 호랑이를 그리지만 살아 번뜻이는 호랑이 눈은 그려 넣지 못한 것과 같다 했습니다. 시퍼런 기백과 투철한 정신과 예수님의 “얼”이 들어있지 못한 기독교인들을 “얼빠진 교인”, “얼뜨기 교인”, “얼간이 예수쟁이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 8, 9에서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표적이 자기들의 욕심과 맞아떨어지니까, 저도 예수 믿겠습니다고 하는 무리들의 마음을, 예수님께서 받아주지 않으셨다는 말씀 아닙니까? 사도 요한이 집중하였던 예수님의 냉담이, 우리들의 믿음에 대한 예수님의 태도는 아니실까요?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마음을 읽으시는 데 관심이 집중 되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께서 우리가 말로 믿습니다,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대충 우리를 믿어 주시겠습니까? 결코 그러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바꾸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의 바꾸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의 믿음에 대하여, 의심이 많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의심이 많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중심을 살피시기 때문에, 거짓이 통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쉽게 믿어주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75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란을 떠나 800km나 되는 가나안 땅까지 이주하여 왔지만, 하나님은 그를 완전히 믿어 주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심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언제까지 온전하게 믿지 못하였습니까?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 그를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기까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진정성을 믿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지금 나의 믿음을 대단한 믿음이라고 나무 자부하지 마십시오. 아직도 하나님의 마음 얻기에 부족한 것이 너무 많다는 것 기억하십시다. 물론, 믿음에는 수십 수백 가지 과정이 있고, 단계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다 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내 믿음 부족합니다, 보잘 것 없습니다는 겸허한 마음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22, 12 말씀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아들을 잡으려하는 바로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내가 여기 있나이다”,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敬畏하는 줄을 아노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완전하게 믿어주시기까지는 무려 50년이 더 걸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스라엘 백성 중 최초로, 하나님께 100%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까지는 50년이라는 세월이 더 걸렸습니다. 믿음의 정상에 처음으로 오른 사람,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그냥 된 것이 결코 아닙니다.

쉽게, 예수 믿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고 고백한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내 믿음, 마음 다 받아주시는 것 아닙니다. 내 믿음에 대하여 냉담하실 수도 있습니다. 왜 입니까?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2009년도부터,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까지 얻는 데 집중해 보십시다]

사람들 눈치 보지 맙시다. 체면, 자존심, 다 내려놓으십시다. 내 경력, 자랑하지 맙시다. 우리가 아브라함 정도라도 되는 것입니까? 사도바울처럼, 다 내려놓기라도 했습니까? 로마시민권도,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학벌도, 바리새인이라는 특권의식도, 가정도, 손수 장막을 만들면서 전도하며 주님을 따르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기로 작정이라도 해 보셨습니까? 프란치스코처럼 자기를 욕하고 저주한 나병환자를 찾아가서 따뜻한 물에 향초를 넣어 친히 자기 손으로 나병환자를 목욕시켜 주면서, 자기 손이 나병환자의 피부에 닿을 때, 그 감촉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체감이라도 해 보셨습니까?

마하트마 간디는 기독교인 제자들이 기독교를 믿으라고 전도하면 그랬답니다. 그대들 기독교인들은 왜 자꾸 선전만 하는가? 기독교를 좋다고 선전할 필요가 있는가? 여기 책상 위의 꽃병에 꽂혀 있는 장미꽃을 아름답다고, 향기난다고 선전할 필요가 있는가? 누구나 보면 아름답고 냄새 맡으면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전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2009년부터, 우리가 기도하고 힘써야 할 것 있습니다. 더 이상은,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였던 무리들과 같은, 무리교회가 되지 맙시다. 무리교인 되지 맙시다. 분위기 교인되지 맙시다. 감성적인 교인 되지 맙시다. 감동교인에 머물지 맙시다. 분위기 띄우고, 분위기에 웃고 우는 교회 되지 맙시다. 예수님은 첨부터 사람을 보실 때, 인간의 내면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꿰뚫어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빌립과 나다나엘의 대화를 듣고 계셨던 예수님이십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나사렛 예수님을 전하자, 나다나엘이 빌립에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그러자 빌립이 와서 보라” 합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자 그를 가리켜 말씀합니다. “보라,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 보았노라.” 우리의 속마음 뿐 아니라, 내 삶의 자리, 있는 자리까지 다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그 때, 나다나엘이 고백합니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고백합니다. 

성경 좀 남보다 많이 읽었다고 자랑할 것 없습니다. 성경공부 좀 많이 했다고 자랑할 것 없습니다. 봉사 경력 좀 된다고 자랑할 것 없습니다. 성경은 알면 알수록 축복의 책도 되지만, 두려운 책이기도 합니다. 성경을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고, 마음으로 읽고, 몸으로 읽고, 생활로 읽고, 그 복음의 능력이 선한 영향력이 되어야 합니다. 활자로 읽는 것, 주석으로 읽는 것, 의미 없습니다. 뜻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과 얼로 깨닫고, 소화해야, 예수님의 마음을 얻는데 집중해야 합니다. 덮어놓고 믿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어 놓고, 고민하면서 읽으면서 예수님의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銳利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리라”(히 4, 12-13).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을 인용하신 마가복음 7, 6-7의 말씀을 결론의 말씀으로 드립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기도]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고 아시는 주님, 우리는 그 동안 주님을 믿노라 하였지만, 주님의 마음을 얻는데 실패한 자들일 때가 많았습니다. 아직도, 내 육신의 욕망과 이익을 좇아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세속적인 믿음, 이제는 버리게 하옵소서. 주님의 마음과 정신과 얼, 복음으로 체화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며 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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