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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벽기도 중심의 신앙 (막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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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기도의 신앙 (막 1:35)
 

새해 들어 인터넷 기사에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영국의 어떤 사람이 발표한 것인데, 새해가 돌아와도 아무런 결심을 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입니다. 만일 새해에 새로운 결심을 해 놓고 그것을 실천하지 못할 경우 스트레스가 쌓이게 되고 결국 건강에 해롭다는 것입니다. 

J. S 밀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고 싶다.”고 했는데, 새해가 돌아와도 육신의 건강을 위해서 아무런 계획이나 결심을 하지 말아야 한다면, 어떻게 인간이 성장하고 발전해 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주장은 우리에게 새해를 주시면서 새로운 비상을 하도록 의도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거역하는 지극히 인본주의적인 발상이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새로운 각오와 다짐을 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도록 섭리하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새해 첫 주일에는 “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라는 말씀을 중심해서 ‘소망이 부끄럽지 않으려면’ 말씀에 붙잡혀 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에 붙잡혀 사는 구체적인 생활로 1)금년에 반드시 신구약 성경을 일독하시기 바라고, 2)주일을 성수하시기 바라며 3)온전한 십일조 생활을 하시기 바라고 4)선교 헌금에 동참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바둑이나 수학에 정석이 있듯이, 신앙생활도 꼼수로 하지 말고 정석대로 하여, 여러분의 소망이 결코 부끄럽게 되지 않도록 하자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새 해 두 번째 주일에는 “가정 예배를 드리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가정이 고넬료의 가정처럼 경건한 가정이 되려면 필요불가결한 것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곧 가정 예배라는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 예배도 없고, 그리스도께서 함께 사시는 가정이 아니라, 단순히 명목적인 신자들이 살고 있는 집이 될 때, 그 가정은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할 수 없고, 그러한 가정들로 이루어진 교회라면 오합지졸에 불과한 힘없는 교회가 되고 말 것입니다. 

영국의 대 설교가 스펄전 목사는 말하기를 “가정예배를 그치는 자에겐 화가 있다.”고 경고 했습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그 집은 벧엘 곧 하나님의 집이 되지만, 가정예배가 없는 집은 ‘사람의 집’이 됩니다. 가정예배를 드리면 성전이 되지만, 가정예배가 없으면 극장이 되고, 가정예배가 있으면 교회가 되지만, 가정에 예배가 없으면 여관이 되고, 가정에 예배가 있으면 하나님이 그곳에 거하시지만, 가정에 예배가 없으면 사단이 즐겨 방문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의 가정에서 힘써야할 것은 가정예배라고 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무참히 붕괴되는 이 시대에, 가정 예배를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이 견고해지고, 임마누엘의 은혜를 체험하고, 신앙 부흥이 일어나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감사가 넘치고, 화목하고 성결한 가정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새해 세 번째 주일인 오늘은 ‘새벽기도 중심의 신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사모하고자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기도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기도생활의 중요성, 그리스도도인들이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이미 배워서 잘 아시리라 믿지만, 그러나 그 중요성 때문에 백번 천번 강조해도 부족할 것입니다. 신자들이 왜 기도해야 합니까?


1. 기도는 하나님의 명령이므로

살전 5:17에 “항상 기도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했습니다. 


2. 주님께서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으므로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되는 날 모든 일을 그치고 쉬시면서 친히 본을 보여주신 날입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모세를 통하여 주신 십계명 가운데 4번 째 계명으로 안식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본보기는 기록된 말씀 이상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생활에 대한 예수님의 본보기를 살펴보면

1)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눅 3:21)

2)전도하시기 전에 (막 1:35. 38)

3)제자들을 선택하시기 전에(눅 6:12, 13)

4)중요한 진리들을 가르치시기 전, 예를 들면 제자들에게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것을 미리 알리시면서(눅 9:18, 22)

5)오병이어 같은 큰 이적을 행하신 후(마 14:23)

6)음식을 잡수시기 전(마 14:19)

7)바쁘신 때에도(눅 5:16)

8)피곤하실 때에도(막 6:31, 34)

9)밤에 기도(눅 6:12)

10)새벽에 기도하심(막 1:35)

11)한적한 곳에서 가셔서 기도하심(눅 5:16)

12)산에서 기도하심(막 6:45)

13)십자가를 앞에 두시고(마 26:36)

14)운명하시는 순간에(눅 23:34)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때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땀방울이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생애는 기도의 생애이셨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한 본보기가 어디 있겠습니까?


3.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자고 있는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하셨지만, 계속해서 졸기만 했던 제자들은 결국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하고 말았습니다. 


4. 하나님과 사랑의 교제를 하시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하되 불을 피하듯 비상사태 시에만 기도하면 안 됩니다. 피네론은 그의 친구에게 “하나님의 성호를 빌어 간청하는 바이네. 식물로 그대의 신체를 보양하듯, 기도로 그대의 영혼을 보양하게.”라고 했습니다.


5. 영적 성장을 위해서

A. W 토저는 말하기를 “영적 성장이 더딘 이유는 시간을 드려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 읽고 기도하면 


6. 필요한 것을 공급받기 위해서

마 7:7-11에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 기도의 대부분은 마치 대문을 두드리고 나서 열리기도 전에 이내 돌아가 버리는 소년과 같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주제인 새벽기도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을 ‘새벽 기도의 신앙’이라고 정해보았습니다. 그것은 한국 교회 목사의 아버지로 불리는 박형룡 박사의 아들이신 박아론 박사의 ‘새벽 기도의 신학’이라는 책의 제목이 떠올라서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박아론 박사에 의하면 새벽 기도에 대하여 서설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와 새벽 기도의 역사는 거의 같다고 봐야 할 정도로 새벽가도는 한국 교회 초창기로부터 불가분리적인 것이었고, 그 때문에 새벽 기도는 한국 교회의 체질이이요 생이라고도 할 수 있다. 마치 한국인 하면 김치, 된장찌개를 분리시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새벽기도는 한국 교회와 별도로 생각할 수 없다. 진실로 새벽 기도는 한국 교회가 자기 것으로 세계 교회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신령한 김치요, 된장찌개 같은 것이다.” 라고 말합니다.

새벽 기도와 관련해서 박아론 박사는 두 가지 비유를 들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나라 옛 이름이 조선인데, 조선은 곧 고요한 아침의 나라를 의미합니다. 기독교가 고요한 아침에 기도하는 교회라는 두 사실의 일치를 우연의 일치로 보아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어떤 섭리로 본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우리 민족은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 불리었는데, 이 역시 성경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입장에서 볼 때 흰 옷은 순결과 여광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계 7장에 보면 흰 옷 입은 큰 무리 (2)변화 산상에서 주님의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순결과 영광을 의미합니다. (3)주님의 부활시 무덤에 나타난 두 천사도 흰 옷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그들이 흰 옷을 입었다는 것은 무죄한 천사들의 순결과 영광의 표상인 것입니다.

이렇게 천상적인 순결과 영광의 상징인 흰 옷을 우리 한족으로 하여금 수천 년 전부터 즐겨 입게 하신 것은,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이방인 중의 선민’ ‘극동의 이스라엘’이 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같은 그의 주장이 다 옳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 교회와 새벽 기도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는 말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새벽기도는 1906년 길선주 목사님에 의해 시작되어 오늘에 이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동안 한국 교회는 경이적인 성장을 거듭하여 1천만 기독교인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부흥의 원동력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벽 기도인 것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합니다. 

물론 비판하는 사람도 없지 않습니다. 새벽기도는 1)형식적 경건주의이고 2)적선과 고행 사상이며 3)그래서 새벽기도 무용론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 한국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데 기여한 길선주, 주기철 목사님 같은 순교자, 최봉석 목사님 같은 전도자, 조만식 장로님 같은 애국자 등 역사적, 교회사적 인물들이 모두 새벽기도를 열심히 하는 새벽기도의 종들이었고, 현금의 교회들을 보더라도 새벽기도를 하지 않는 교회치고 개척교회 수준을 넘어서는 교회가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놓고 보더라도, 새벽기도의 열심자들을 격려하고 선망의 눈으로 바라볼지언정 비난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박아론 교수에 의하면 새벽 기도회의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하는데, 1)신비인데, 새벽기도는 참석자로 하여금 지존하신 신의 거룩하심에 압도당하여 죄인으로서의 자기를 발견케 하고, 회개와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서려는 몸부림을 치게 하는 신비한 힘이 있고, 2)고요인데, 새벽기도는 참석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명상케 하고, 그 결과로써 나 같은 죄인을 구속하신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에 감격하며, 그 은혜에 보답하며 살고저하는 결의를 굳히고, 죽기까지 충성하려는 순교 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이며 3)생기인데, 새벽 기도는 참석자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된 자신을 발견하고,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힘 있게 일하는 일꾼이 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박아론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이엠 바운즈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은 일을 한 사람들은 아침 일찍 무릎을 꿇은 사람들이다. 사소한 일로 새벽 시간을 낭비해버리는, 사람은 하루 종일 하나님을 찾는 일에 별 진전을 못 보게 마련이다. 이른 아침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과 노력에 첫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하루 종일 맨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아침 일찍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며, 하나님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일으키고 크게 확장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새벽기도를 반드시 어떤 소원 성취를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하면 아니 될 것입니다. 물론 어떤 소원을 가지고 매일 아침 간절히 기도하는 것을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새벽기도는 아들을 낳게 해주시라든지, 부자가 되게 해주시든지, 아들이 대학에 합격하고 직장에 들어가게 해주시라든지 하는 이기적인 기도보다는,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한 마음에서, 혹은 우리민족이 흰 옷을 사모하였듯이, 순결하고 성결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 복음 전파를 통한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 더 많아져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위대성 가운데 하나는 “기도는 상황을 변하게도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변하여 이스라엘이 되었듯이 기도하는 사람 자신을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에 관심을 갖고 또 거기에 집착하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짓게 하는 것입니다. 새벽 기도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도 있습니다. 오래 동안 기도하는 사람의 신앙 인격에 큰 변화가 없을 때, 남달리 새벽 기도하는 사람이 남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아무리 형편없는 신자라도 그가 믿기 전보다 더 나빠지는 일은 없고, 꼭 같은 이치로 기도하는 신자가 기도하기 이전보다 더 나빠지는 경우도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성자상이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성자 상은 어느 하루아침에 천사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 성도의 성화라는 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점진적인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성자 상은 99번 넘어졌다가도 100번 째 일어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래서 비록 많은 흠이 있을지라도 새벽기도 시간 주님 전에 나와서 “주님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하고 통회자복 하는 신자들을, “나는 비록 새벽 기도는 하지 않지만 아무개보다는 훨씬 낫다”고 자부하는 신자들보다, 먼저 주님께서 세리처럼 의롭다고 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아침마다 진심으로 회개 자복하는 신자들은 아침마다 의롭다 함을 얻을 줄로 믿습니다.

기도에 관한 경구들을 소개합니다. 레나드 레번힐 “기도하지 않는 목사는 장난치는 사람이며, 기도하지 않는 신자는 방황하는 사람이다.” “범죄 하는 자는 기도를 그치고, 기도하는 자는 죄 짓기를 그친다.” “밤마다 텔레비전을 보며 잠이 드는 그리스도인은 두뇌가 죽어 있으며, 심령이 파산 당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를 바라보아도 심상하며, 죄인의 우맹이 자신의 심령을 더 이상 아프게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서 데려가 주십사 기도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박윤선 박사는 “기도를 등한히 하는 것은 죄 중에서도 큰 죄라는 것을 명심할 것이라고 하면서, 기도생활을 등한히 하면 악한 결과가 맺히게 되는데, 1)신앙이 점차 약하여져서 2)하나님과 멀어지고 3)심령상 죄악을 중대시하지 않고, 불신자처럼 육체 생활에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 죄만 근근이 피하는 사람이 되어지며 4)근근이 명칭신자의 체면이나 유지해보려는 바리새인이 되어진다고 경고했습니다.

남보다 더 나으려고 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남보다 공부를 더 잘하려면 남 보다 더 많이 노력을 해야 하고, 남보다 더 우수한 선수가 되려면 남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신앙 세계, 영적인 법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다 나은 신자다운 신자가 되려면 남보다 더 많은 기도 생활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기도원에는 영하 16, 17도나 되는 혹한의 눈밭에서 금식을 하고 단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들이 할일 없어서 그러하겠습니까?

우리는 너무 적당하게 안일하게 신앙생활 하려는 자세를 고쳐야 할 것입니다. 받아서 하십시다. “모든 크고 작은 성공의 이면에는 크고 작은 결단이 있었습니다.” 새벽 기도는 하나의 결단입니다. 세 가지를 박차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이부자리를 박차고, 둘째, 방문을 박차고, 셋째, 대문을 박차야 합니다. 세상일도 결단이 필요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결단력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뜨뜻미지근해가지고야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어떻게 자신을 이기고, 유혹을 이기고, 혈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어떻게 기도 응답을 받고, 어떻게 가정을 구원하고, 어떻게 전도하고, 어떻게 주님께 귀하게 쓰임을 받겠습니까? 

새벽기도의 창시자는 한국의 길선주 목사님이 아니고, 바로 우리 예수님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본보기는 주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집을 나서기 전, 아침마다 새벽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갈망하고, 주님의 형상을 닮고, 성결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기도의 응답을 받고, 말씀에 붙잡혀 살고, 일생 동안 기도하며 살다가, 이 땅에서의 마지막 날 아침에도 새벽기도를 드리고, 숨지는 그 시간도 기도하면서 찬송하면서 마치시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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