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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지금은 이웃을 사랑할 때 입니다 (요 13:3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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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이웃을 사랑할 때 입니다 (요 13:34~35)


1. 힘들 때 필요한 것은?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공지영씨는 “삶이 힘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와 용기보다 유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최근에 웃음을 중시한 첫 번째 소설을 발표했다고 했습니다. 

또 최근에 사망한 일본의 대표적인 여성 가수 가운데 한 사람인 ‘사카이 이즈미’는 “가장 힘들 때 필요한” 것은 “노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알고 있니? … 노래는 가장 행복할 때가 아니라 가장 힘들 때 필요하다는 것을. 행복해서가 아니라 행복하기 위해 부르는 것이 노래라는 것을.” 어떤 분은 삶이 고달프고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여행”, 그것도 고향으로의 여행이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분은 인생이 힘들고 어려울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친구”라고 했습니다. 이 분처럼 힘들고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이 친구 혹 사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서울에 보호관찰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인 <어깨동무>라는 것이 있는데요. 이 “어깨동무”라는 프로그램의 효과가 아주 대단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의 모토 역시 지금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 때 필요한 것은 내 손을 잡아 줄 사람이 아니라 지친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 줄 사람이다.” 인터넷에 소개된 “이복남”이라는 분의 다음의 글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가 내리면 우산이 필요하지요. 그러나 그보다 더 절실한 것은 내리는 비를 함께 맞으며 걸어 줄 사람입니다. 사는 게 지쳐 힘들 때 가장 필요한 것은 함께 울어 줄 사람입니다. … 괴로울 때나 슬플 때나 함께 울고 함께 웃어 줄 사람 있다면 그것은 축복입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이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여러분 주변에서 지금 힘들어 하는 분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성경은 그것이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2. 위기의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

1) 최악의 위기

❶ 요한복음의 전반부인 1장부터 12장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한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곱 가지 이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명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부분인 13장부터 17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수난을 앞두시고 가르치신 내용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부분은 앞과는 다른 뚜렷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는데요, 그것은 전반부의 주 대상이 “무리들”, 즉 모든 사람들이었다면 여기에 와서는 주님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부분인 18장부터 21장은 십자가 직전에 제자들을 위로하시고, 그들과 교회를 위하여 중보기도하신 일, 그리고 체포-심문-죽음-부활 사건과 그 이후에 된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❷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13장은 두 번째 부분의 시작입니다. 많은 무리 가운데서 제자로, 그 가운데서도 사도로 선택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일종의 고별 설교라고 할 수 있는 소위 “다락방 강화”라는 것을 하셨는데, 그것이 13장부터 16장까지이고, 17장은 중보 기도를 하신 내용입니다. 

먼저 13장 1절부터 20절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과 이와 관련하여 섬김의 교훈을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은 자신이 피 흘려 죽으심으로 제자들과 온 세상의 죄를 씻기실 것을 미리 보여주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더불어 성도는 서로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온 세상을 섬기는 자임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21절부터 30절은 가룟 유다의 배반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31절부터 35절은 성도의 삶은 오직 사랑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할 것을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아마 여러분은 저의 설명을 들으시면서 감을 잡으셨을 것입니다. 요한복음 13장의 기록은 아주 분명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 다시 한 번 보실까요? 예수님께서 체포되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실 것인데, 이것은 제자들로서는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최고의 위기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이 체포되시고 고난당하시고 죽는 일, 그 자체도 충격이겠지만, 그 후폭풍으로 제자들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동안 하나처럼 움직이던 제자들 사이에도 전에 없었던 문제가 생길 것입니다. 제자단 내부의 문제는 무엇보다 가룟 유다가 주님을 배반하여 유대 지도층과 로마 총독부에 돈을 받고 팔아넘기는 파렴치한 짓을 할 것이라는 점, 그 다음에는 그것도 모자라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모두 다가 믿었던 베드로가 공적인 자리에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씩이나 부인하는 일도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중요성은 바로 이러한 사건들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즉 바로 그 날 밤이면 제자들에게 최고의 위기가 닥칠 것인데, 그 위기를 내다보신 주님께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미리 주시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곧 닥칠 제자단의 최대의 위기 상황에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2) 사랑하라

❶ 사랑하라

그 날 밤, 유월절 만찬을 드시기 위하여 다락방에 모이신 예수님과 제자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이것은 ‘주종관계’와 같았던 그 당시 ‘스승과 제자 관계’에서 볼 때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떡을 떼시고 포도주를 나누시면서 ‘이것은 나의 살이고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라고 말씀하시면서 성찬을 행하셨습니다. 그 날 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긴 일과 성찬은 같은 메시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살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사 제자들과 온 세상의 죄를 씻기실 것, 즉 구원의 사건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성찬을 나누신 후, 바로 오늘 본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34).” 

“사랑하라”는 계명은 지금까지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들을 요약한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것이 마태복음 22장 35절에서 40절까지에 나옵니다. 

“그 중에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율법을 전문적으로 공부해 율법에 대한 어떤 토론이나 논쟁에도 자신이 있었던 어느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떤 계명이 가장 크냐’고 질문했습니다. 그의 질문에 예수님은 신명기 6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어떤 교리나 율법보다 크고, 어떤 사상이나 철학과도 비교할 수 없는 최우선의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율법”, 혹 “구약성경”의 핵심은 단 두 마디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이 정말 많고, 또 성도들이 할 일도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대한 순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것은 스스로 만족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도 자신을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배하고, 성경공부하며, 기도하는 모든 것은 오직 이 두 가지를 위함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해서, 둘째는 사람을 사랑해서 라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고 친히 보여주신 사랑보다 더 높은 사상이 없고, 더 큰 철학이 없으며, 더 높은 가치도 없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본성이며, 성도가 무조건적으로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요한일서 4장 7, 8절에서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 사랑이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다양한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며, 또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러분의 내면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사랑의 그림자마저 찾기 힘들 정도로 각박해져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이기적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사랑이 충만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❷ 사랑은 새 계명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그것이 “새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랑이 “새 계명”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시 34절 말씀을 봅시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사랑하되 여러분의 방식대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대로, 여러분이 좋아하는 대로 사랑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정의해 주신 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지요. 사실 그 동안 우리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동안 사랑을 실천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스타일대로, 우리의 생각대로 사랑한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이 그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도 그러지 않았습니까? 교회에 오고 싶으면 오고, 이런 저런 사정을 핑계로 오지 않으면서도 교회 다닌다고 말했습니다. 헌금하고 싶으면 하고 싫으면 하지 않으면서, 그리고 자기 마음대로 결정하고 행동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사람을,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도 마찬가지였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의 취향대로 사랑하는 것은 새 계명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도 아닌 스스로의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랑의 기준은 오직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인 것이죠. 

또한 예수님의 “사랑하라”는 계명이 새 계명인 이유는 구약과 비교해 볼 때 다음 세 가지의 의미가 더 있습니다.

첫째는 사랑의 대상에 있어서 구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랑의 대상은 이방인이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끼리 사랑하는 것이었지요. 즉 구약의 사랑은 선택받은 동족끼리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새 계명은 대상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모든 민족을 포함해, 지혜자나 어리석은 자, 노인이나 젊은이, 신분, 성별, 언어 등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장애물을 뛰어 넘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랑의 한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구약의 사랑은 용서와 더불어 채찍과 징계라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사랑은 한계가 없습니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리는 사랑입니다.

셋째는 사랑의 방법에 한계가 없어진 것입니다. 구약의 사랑의 방법은 율법과 명령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사랑은 의무적이거나 율법적이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방법은 먼저 본을 보이신 것입니다. 우리는 주로 손가락으로 사랑을 나타내지요. ‘이것 하라, 저것 하라’고 손가락으로 지시하는 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로 입으로 사랑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먼저 무릎을 꿇는 것이고, 자신의 손으로 씻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랑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옛 사랑에 빠져 있는 분은 없습니까? 사랑할 대상과 미워할 대상을 구분하는 옛 사랑, 한계를 분명히 두는 옛 사랑, 손이나 발보다는 말이 더 우선하는 옛 사랑! 오늘 주님은 그런 방식으로 사랑하지 말라는 뜻에서 “새 계명”을 주고 있습니다.


❸ 사랑은 제자의 표시

본문 35절에 의하면, 이렇게 사랑해야만 진정한 성도라고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여기서 교인과 진정한 성도인 제자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교인이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아 교회에 다니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제자란 제자 훈련을 받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것같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는 것을 확인하고 증명하는 것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 받는 데 있지 않습니다.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하나가 되는 것에서 예수님의 제자임이 증명됩니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면서 서로 싸우고 분열하며 미워한다면 그는 주님의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성도는 사랑으로 자신이 성도임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어느 교회의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기 전에 그 날 그 교회를 방문한 한 노인을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설교하기 전에 그 노인이 잠시 간증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강단에 올라가게 된 노인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하루는 그 아들과 아들의 친구가 바닷가에서 놀다가 그만 둘 다 바다에 빠져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즉시 그들을 구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장면을 목격한 아버지의 손에는 오직 한 개의 구명동의(life jacket, 구명조끼) 밖에 없어서, 단 한 사람만을 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는 그 절박한 상황에서 누구에게 구명동의를 던질 것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 순간 그의 마음에는 정말 많은 생각들이 오고 갔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죽이고 아들의 친구를 살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들의 친구를 죽게 놔둘 수도 없고 …. 

그때 아버지의 마음에 순간적으로 스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자기 아들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죽으면 천국에 갈 것이고 그래서 다시 만날 수 있지만, 아들의 친구는 불신자라서 영원히 지옥에 가게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순간 아버지는 아들을 향하여 '아들아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외치고, 아들의 친구에게 구명동의를 던졌습니다. 결국 아들은 죽고 아들의 친구는 살아났습니다. 

여러분, 이와 같이 하나님도 자신의 독자를 죽이고 여러분을 살리셨습니다. 이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는 목사님의 설교가 이어졌습니다. 예배가 끝난 후, 교인들이 목사님과 그 노인을 찾아와 “아까 그 이야기는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론적으로는 몰라도 세상에 실제로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노인이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목사님이 바로 그 친구였고, 죽은 것은 내 아들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본문은 이제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사랑하라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자신, 여러분의 목숨,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것, 혹은 여러분이 가장 아끼는 것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지금처럼 이렇게 어려울 때 필요한 것도 바로 이런 사랑입니다.


3) 지식보다 사랑이 필요한 때

어느 날, 한 가족이 놀러가다 교통사고를 당해 일곱 살 된 아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응급수술에 급히 피가 필요했는데, 아들과 같은 혈액형은 딸밖에 없었습니다. 다급한 아빠가 다섯 살 된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오빠가 급히 피가 필요한데 네 피를 좀 줄 수 없겠니?” 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눈물을 머금고는 곧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들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수술 후에 아빠가 침대에 누운 딸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 덕분에 오빠가 살았다!” 그 말을 들은 딸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말했습니다. “아빠! 저는 언제쯤 죽나요?” 아빠가 놀라서 “무슨 소리냐?”고 물었습니다. 알고 보니까 딸은 피를 뽑으면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잠시 머뭇거린 이유가 그것이었지요. 딸은 자신이 죽는 줄 알면서도 오빠에게 피를 준 것입니다. 

여러분, 이 어린 딸은 분명히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지식은 부족했지만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 있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경제의 잣대, 이념의 잣대, 지식의 잣대를 대는 것이 아니라, 당장 필요한 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국립묘지 옆에서 꽃다발을 파는 꽃가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한 분이 그 옆 길거리에서 역시 꽃다발을 팔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꽃가게 주인의 아들이 보니까, 그 노인이 파는 꽃다발은 바로 자기 가게에서 판 것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국립묘지를 돌면서 참배객들이 묘지 앞에 놓아둔 꽃다발들을 다시 모아 와서는 그것을 되팔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된 아들은 너무나 어이가 없고 분개하여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노인을 그대로 두실 거예요? 당장 고발해서 못하게 하세요. 유족들이 묘지에 갖다 둔 꽃다발을 갖다가 다시 파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겨울, 눈이 엄청나게 왔습니다. 그래서 산소를 찾는 이들의 발길이 뚝 끊어졌습니다. 그러니 그 할아버지의 수입도 전혀 없게 되었지요. 그때 꽃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이 가게의 꽃다발을 한 아름 안고는 산소로 갔습니다. 그러고는 그것을 묘지 이곳저곳에 뿌려 놓고 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노인이 느린 걸음으로 그 꽃다발을 줍기 위해 묘지로 가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꽃 가게 주인은 기분 좋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를 본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하여 울어 버렸습니다. <우리 마음을 아름답게 하는 103 가지 이야기>


3.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사랑!

가수 변진섭이 부른 “우리의 사랑이 필요한거죠”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그대 어깨 위에 놓인 짐이 너무 힘에 겨워서 길을 걷다 멈춰진 그 길가에서 마냥 울고 싶어질 때
아주 작고 약한 힘이지만 나의 손을 잡아요. 따뜻함을 느끼게 할 수 있도록 어루만져 줄게요.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때론 내가 혼자 뿐이라고 느낀 적이 있었죠. 생각하면 그 어느 순간에서도 하늘만은 같이 있죠.
아주 작고 약한 힘이라도 내겐 큰 힘 되지요. 내가 울 땐 그대 따뜻한 위로가 필요했던 것처럼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앞서가는 사람들과 뒤에서 오는 사람들 모두 다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우리가 저마다 힘에 겨운 인생의 무게로 넘어질 때 그 순간이 바로 우리들의 사랑이 필요한 거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려운 때입니다. 많이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로 지금이 여러분의 사랑이 필요한 때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 사상가인 C. S. 루이스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인류를 사랑한다고 하는 거창한 타이틀을 들고 나오는 사람들은 대개가 …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교회를 사랑합니다.’ 라든지, ‘모든 성도를 사랑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말은 지금 자기 곁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랑은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데 있는 사람, 지금 여러분의 곁에 앉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하십시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대로 사랑하십시오. 아니 차라리 그를 예수님이라고 여기고 예수님을 대하듯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시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처럼 어려울 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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