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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1) (딤후 2: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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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정받는 일꾼(1) (딤후 2:14~15)


물가에 노니는 오리를 보면 먹이를 주워 먹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물속에 처박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실은 깊은 곳에 더 풍부한 먹을 것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머리만 처박고 얕은 곳에 있는 먹이만 주워 먹는답니다. 오리들이 다이빙의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물속 깊이 다이빙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더 깊은 곳에 더 좋은 먹이가 있고 깊이 다이빙할 수 있는 능력도 있지만 대부분의 오리들이 수면에서만 먹이를 찾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는 사실은 참 아이러니합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도 그 신앙생활의 행태를 보면 날마다 피상적으로만 먹이를 찾는 사람이 많습니다. 모든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임에도 불구하고 자기에게 좋은 설교라고 생각하는 것만 받아먹고, 유명한 지도자들이 하는 기독교 방송을 들으며 요기나 하려고 하는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사실은 우리도 좀 더 깊은 세계로 다이빙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겉에서만 맴돌고 맙니다. 뿐만 아니라 교회생활에도 깊이 들어와서 봉사하고 헌신하는 즐거움 속에서 공동체의 아름다움과 사랑의 교제 속에서 신앙의 성숙을 경험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왔다 갔다 언제나 그 자리만 밟고 지나다닐 뿐입니다. 

2008년말 기준으로 개신교인의 수가 860여만 명 정도로 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숫자의 그리스도인들이 저마다의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크게 교단마다 차이가 나고, 교회마다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작게는 한 교회 안에서도 서로 다른 신앙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한번 재미있게 나눠보겠습니다. 대략 열 가지 정도 되는데 나는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첫째로, 감투교인이 있습니다. 워낙 감투 쓰는 것을 참 좋아해서 교회에서 직분을 받게 되면 열심을 내는 척하다가 직분을 잃으면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을 감투교인이라고 부릅니다. 

둘째로, 만유인력교인이 있습니다. 여간해서는 주일 날 교회 잘 안 나옵니다. 분명히 등록은 되어 있는데 매 주마다 구역장이나 교역자들이 찾아가거나 전화를 해야만 마지못해서 끌려오는 만유인력 교인입니다. 

셋째로, 핑계교인입니다. 매 주일 예배를 참석하지 않는 핑계가 다양합니다."바빠서 못 나왔습니다. 아파서 못 나왔습니다. 아이들 때문에 못 나왔습니다. 교회 가려고 하는데 손님이 와서 못 갔습니다."다양한 핑계거리가 항상 준비되어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핑계교인이라고 합니다. 이러다가 나중에는 아무 일 없는 날에도 아예 교회 안 갈 핑계 거리가 없나 먼저 생각하게 됩니다.

넷째로, 오락교인이 있습니다. 교회에 오는 목적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도 모여서 친목을 도모하는 일에 더 열심인 사람입니다. 예배는 시간에 맞춰서 대충 때우고 끼리끼리 모여서 노는 즐거움에 심취되어서 교회 나오는 사람입니다. 

다섯 번째, 시험면접관 교인입니다. 교회에 오자마자“이 사람은 이렇고, 저 사람은 저렇고 저 여자는 화장을 했으니 좀 부지런하고 저 남자는 머리도 안 감았으니 게을러 터졌구만!”하면서 점수 매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도 채점하듯 합니다."오늘은 쓸데없이 길군! 오늘은 한 것도 없이 짧군! 오늘은 꽤 재미있는데! 설교가 왜 이리 딱딱해!"하면서 비판하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이렇게 보면 압니다."아, 저 사람은 지금 채점하고 있구나!" 

여섯 번째, 벙어리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을 이야기 하는지 아십니까? 교회를 오랫동안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시키면 쩔쩔 매는 사람입니다. 심지어는 이렇게 말하시는 분도 있습니다."목사님, 저 그런 것 시키면 교회 안 나가요."참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서 벙어리교인이라고 합니다. 

일곱 번째, 유랑교인입니다. 한 교회에 정을 두지 못하고 이번 주는 이 교회에 갔다가, 다음 주는 저 교회에 갔다가하면서 유랑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체로 설교에 은혜를 받는다든지 성도들이 사랑이 넘친다든지 하는 본질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어느 교회 점심이 잘 나오나, 혹은 어느 교회가 간섭받지 않고 내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교회인가를 생각합니다. 

여덟 번째, 광고교인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자기의 사업을 광고하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입니다. 대체로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교회를 찾아다니는 사람들이죠. 몇 년에 한번 씩은 정치하는 사람들이 이런 장삿속으로 교회에 다니는 경우를 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얼마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다음 사업장을 찾아 떠나는 믿지 못할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아홉 번째, 여인숙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교회를 여인숙처럼 생각하고 잠자러 오시는 분입니다. 집에서는 아무리 자려고해도 도무지 불면증처럼 잠이 오지 않다가도 교회에 와서 앉기만 하면 아주 편안하게 잠이 옵니다. 한편으로는 이럼 사람 환영합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겨서 편히 쉬는 것을 누가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자더라도 교회 와서 자는 것은 뭐라 안합니다. 제 심정으로는 차라리 이런 여인숙교인이라도 되었으면 싶은 사람도 참 많습니다. 

열 번째가 재미있는데요, 바로 국회의원교인입니다. 국회의원을 부를 때 국민의 대표라 부릅니다. 그런 것처럼 한 가족 전체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 아니고, 대표로 혼자서만 나오는 사람을 가리켜서 국회의원교인이라고 합니다. 내가 교회 나가니까 온 가족이 다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지요. 가정의 대장인 내가 믿으니까 아들, 며느리, 손자는 자연적으로 혜택을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주씩 번갈아 가면서“오늘은 내가, 다음 주는 네가 대표로 갔다 오자.”그럽니다. 그리고 내가 하는 헌금만으로도 아들네나, 손자네 몫까지 다 냈다고 생각합니다. 성미도 시집 장가가서 따로 사는 아들 딸 몫까지 떴으니까 따로 안 해도 된다고 가르칩니다. 얼마나 우스운 이야기입니까? 신앙생활도 대표자처럼 하는 이런 사람을 국회의원교인이라 합니다.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기준과 성격으로 신앙생활을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일하시던 당시에도 예수님의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까? 그러나 그 많은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을 따르는 참된 제자는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각자의 형편과 처지에 따라 이루고자 하는 욕망이 그렇게 다를 수가 없었습니다.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여 굶주림을 면하러 온 사람들, 혹은 병 고침을 얻기 위해서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심지어 예수님을 책잡기 위해서 온 사람도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모두가 예수님 곁에 서 있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나라의 비밀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갖가지 다른 자기욕망들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시쳇말로 수틀리면 언제든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갈 길로 갈 사람들에 불과했다는 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만 무리에 지나지 않는 사람들이었을 뿐이지 제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예수님께는 무리도 필요했지만 진정으로 필요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제자처럼 살기를 원했을 것입니다. 그 생각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하나님의 생각이고요. 하나님은 우리들이 단순히 하나님을 따르는 무리가 아니라 제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무리와 제자를 구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 목적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무리>는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추구하는바 이익이 있고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나온 사람들이 무리입니다. 바로 예수님 곁에서 제자를 위장하고 어디든 따라다녔던 그 사람들입니다. 

그러나<제자>들은 다릅니다. 어떠한 사람들입니까? 그 삶의 중심이 예수님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를 희생할 수 있고, 기꺼이 주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제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배도 버려두고, 그물도 버려두고, 부모와 친척들마저도 버릴 만큼의 자기결단이 있는 자들만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정한 일군은 많지 않다고들 합니다.<무리>는 많은데 진정한<제자>가 없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내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교회 생활을 잘하는데 하나님과 그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고 바치라고 하면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우리들을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진정한 일꾼이라고 인정 하실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사랑하는 영적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 하는 오늘 본문에서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일꾼이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당시 디모데가 목회하던 에베소교회에는 온갖 이단들이 들어와 복음을 변질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있던 곳입니다. 교회로까지 침투해 와서 어지럽히던 때에 그들과 말다툼하는 것조차도 무익한 변론이 될 수 있으니 차라리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고 묵상하여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할 수 있도록 하며 말씀에 굳게 서서 넘어지지 않는 부끄러움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받는 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떠한 이단사설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과 형편에라도 넘어지거나 실패하지 않고 능히 이겨내어 그 신앙이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는 일꾼이 되어야 함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늘나라요,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그 궁극을 향하여 나아갈 때 이 땅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을 많이 합니다. 고백처럼 거듭거듭 말합니다. 그러나 목숨을 걸고 사랑하겠느냐는 질문 앞에서는 부끄러운 우리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도 주님의 나라와 주 계신 성전과 피 흘려 사신 교회를 늘 사랑한다고 입술로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작 부끄럽지 않은 일꾼 되는 데에는 게으릅니다. 확신이 없습니다. 인정받지 못한 상태로 사랑한다고 아무리 고백해 봐도 헛것입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이미 일꾼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결국은 크게 구분해 보면 부끄러운 일꾼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인정받고 살아갈 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09년도에는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부끄럽지 않은 일꾼이 되기를 노력하십시오. 일을 하고도 욕먹는 부끄러운 일꾼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지나 간 자리에 언제나 칭찬과 존경이 머무를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부끄럽지 않은 일꾼으로 살아가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일인자냐 이인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부끄럽지 않은 일꾼 되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도 단순한 무리의 인생을 살지 마시고 제자 된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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