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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일곱 번까지 다시 갑시다 (왕상 18:2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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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번까지 다시 갑시다 (왕상 18:20~46)


엘리야가 가뭄을 예언한 후에 사르밧에서 3년을 머문 것은 바알과의 대적에서 승리를 준비하는 기간이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임한 가뭄은 국가적 재난이었습니다(왕상 17:1). 

이스라엘에 가뭄이 임한 것이 신의 진노라는 데는 그 누구도 이의(異意)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신의 진노에 대해 그 원인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아니했습니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볼 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은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섬기는 우상숭배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우상숭배자들은 반대의 견해를 고집했습니다. 

분쟁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견해 때문에 일어나게 됩니다. 민족과 국가 간에 갈등과 분쟁도 각자의 다른 사관(史觀)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마침내 어떤 신이 참 신이냐를 놓고 갈멜산상에서 일대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바알 선지자 450명과 엘리야와의 대결은 불가피했습니다. 결과는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라는 증거로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제물을 태움으로 엘리야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본문 18장 39-40절에 『 모든 백성이 보고 엎드려 말하되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하니 엘리야가 저희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저희를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3년 반 동안이라는 지긋지긋한 가뭄을 체험했습니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라고 했습니다. 

엘리야의 입장에서 볼 때 가뭄의 원인이 제거되었으니 가뭄이 끝이 나고 비가 내리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요구는 하늘에서 불이 떨어진 것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비가 내려서 가뭄이 해결되는 것까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선지자와 백성들과의 차이입니다. 

이것이 엘리야와 백성들의 차이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에게 큰 비의 소리가 있다고 했습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간 뒤에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엎드려 그 얼굴을 무릎사이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사환에게 올라가서 바다 편을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사환이 바다 편을 보고 와서 엘리야에게 아무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사환에게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했습니다. 사환이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paim cloud)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사환에게 올라가서 아합이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 가소서 하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자기 사환을 올려 보낼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의 기도도 일곱 번 한 것입니다.
여기 일곱은 히브리인들의 상징적 의미로 10이 만수라고 하면 7은 하나님의 수이자 완전수입니다. 또 7은 승리의 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는 말은 

Ⅰ. 하나님의 불을 본 사람의 확신에 찬 말입니다. 

본문 18장 38절에 『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고 했습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국적(國敵)으로 간주했습니다. 
본문 18장 17절에 『 엘리야를 볼 때에 저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네냐 』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아합은 가뭄의 원인을 엘리야가 여호와를 섬기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엘리야가 종교적 대세주의에 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말했습니다. 

본문 18장 18절에 『 저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비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좇았음이라 』고 했습니다. 

그리고 바알신과의 한 판 대결을 제의했습니다.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정치적, 경제적 지원을 받고 있는 바알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인을 갈멜산으로 모아 자기에게 오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18:19). 
엘리야의 요구대로 이른바 어용선지자 450명이 모였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나님과 바알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이때 백성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유구무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오랫동안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6장 24절에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차든지 덥든지 결단 하라는 것입니다(계 3:15). 

엘리야는 잠자코 있는 백성들에게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 선지자가 450명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에게 두 송아지를 가져오게 하고 각각 송아지 한 마리씩을 잡아 놓고 불로 응답하는 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니 백성들이 그 말이 옳다고 했습니다(18:24). 

바알 선지자부터 시작했습니다. 저들은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렀으나 응답이 없었습니다(18:26). 오정에 엘리야가 그들을 향하여 바알이 잠이 들었으면 깨워야 할 것이 아니냐고 조롱했습니다(18:27). 
저들은 규례에 따라 큰 소리로 부르고 피가 흐르게 하고 칼과 창으로 그 몸을 상하게 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이 끝났습니다(18:28-29). 그 다음은 엘리야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백성들을 자기 앞으로 가까이 모으고 무너진 여호와의 단을 수축했습니다. 

그리고 야곱의 아들들의 지파의 수효대로 열두 돌을 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하여 돌로 단을 쌓고 단을 돌아가며 곡식 종자 두 세아를 용납할 만한 도랑을 만들었습니다. 나무를 벌리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세 번을 그리하라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간절히 기도하기를 본문 18장 36-37절에 『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라고 했습니다. 

마침내 완전히 젖은 제물 위에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도랑의 물을 핥아 가버렸습니다. 이것을 목격한 모든 백성들은 그 자리에 엎드려서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 여호와 그는 하나님이시로다'라고 했습니다. 갈멜산 결투의 승리로 엘리야와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이 참 신이신 것을 확증 받았습니다.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는 말은 


Ⅱ. 빗소리를 들은 사람의 확신에 찬 말 입니다. 

본문 18장 41-42절에 『 엘리야가 아합에게 이르되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가니라… 』고 했습니다. 

아합이 엘리야의 승리를 목도하고 기가 죽었음은 분명합니다. 엘리야는 아합이 보는 앞에서 어용 종교 지도자들을 잡아 죽였으니 아합은 대세주의를 따르는 거짓 어용 종교의 허구를 똑똑히 목도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갈멜산 가까이에 있는 왕의 임시 장막으로 이동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왕에게 먹고 마시라고 한 것을 보아서 갈멜산상에서 종일토록 긴장해 있었던 왕에게 긴장을 풀고 쉬라는 것입니다. 아합왕의 근심은 가뭄에서 하나 더 생겼습니다. 자신이 엘리야를 향하여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했는데 장차 엘리야와의 관계가 걱정이었을 것입니다. 
아합에게 『 올라가서 먹고 마시소서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라는 말은 아합이 걱정거리 두 가지를 다 해결해 주는 셈이 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가뭄이 끝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있었습니다. 

여기 『 큰 비의 소리가 있나이다 』에서 『 소리 』( , 콜)는 육성, 혹은 목소리를 의미합니다. 엘리야는 믿음의 귀를 가지고 큰 비의 소리를 들은 것이 분명합니다. 
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비를 몰고 오는 구름을 눈으로 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비의 소리를 들었으면 구름을 보는 것은 병행선상에서 요구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비의 소리를 듣고 구름을 보지 않고 비 오기를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의 일반계시(자연계시)를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일반계시(자연계시)와 하나님의 특별계시(구원계시)는 서로 상치되지 아니합니다. 비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비를 몰고 오는 구름이 보이기를 의심 없이 기다립니다. 

아합이 먹고 마시러 올라간 뒤에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 즉 산 정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땅에 꿇어 엎드리고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기도하는 자세입니다. 

야고보서 5장 17-18절에 『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 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고 했습니다. 

기도 응답은 특정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에게 일절 해당된다는 말입니다. 기도 응답은 초인이나 비범한 사람에게 있지 아니하고 범인에게도 공히 적용된다는 말입니다. 

큰 비의 소리를 들었다고 해서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큰 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간절하고 더 깊숙한 자세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간절하지 않습니다. 큰 비의 소리를 듣지 못한 자들은 비는 기다리는데 기도는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큰 비의 소리를 들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입니다. 
하나님 앞에 요구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큰 비의 소리를 들은 사람은 기도하면서 기다립니다. 큰 비의 소리를 듣지 못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 기다리면서 불평만 합니다. 

'일곱 번까지 다시 올라가라'는 말은 


Ⅲ.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에 찬 말입니다. 

본문 18장 44-45절에 『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저가 고하되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나이다 가로되 올라가 아합에게 고하기를 비에 막히지 아니하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가소서 하라 하니라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아합이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가니 』라고 했습니다. 

아무 것도 없다고 하는 사환에게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고 했습니다. 일곱 번째 이르러서는 사환이 엘리야에게 보고하기를 바다에서 사람의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엘리야는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 이스라엘 천지를 홍수로 범람시킬 큰 비가 올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아합에게 비에 막히지 않도록 마차를 갖추고 내려갈 것을 권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멜산 바로 밑에 기손 강이 흐르는데 그 강이 비로 인하여 범람하면 왕래가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고 강이 범람하는 큰 비를 예상한 것입니다. 

이쯤 되면 아합이 엘리야에게 한 말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가 아니고 오히려 아합과 이스라엘을 이렇게 주밀하게, 이롭게 하는 선지자가 아닙니까?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하여지며 마침내 기다리던 큰 비가 내렸습니다. 아합은 마차를 타고 이스르엘로 갔습니다. 여기 이스르엘은 왕의 궁궐이 있는 곳입니다. 

열왕기상 18장 45절에 『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매 저가 허리를 동이고 이스르엘로 들어가는 곳까지 아합 앞에서 달려갔더라 』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했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엘리야에게 있었다'는 뜻입니다. 

엘리야는 아합이 궁궐로 들어가는 곳까지 빗속을 앞에서 달렸습니다. 아합이 축복의 비를 맞으며 흐뭇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엘리야 때문에 기가 죽은 것은 예측가능한 일입니다. 엘리야가 아합왕 앞에서 달리므로 아합은 그가 자신을 호위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갈멜산 전투에서부터 큰 비가 오기까지 여호와 하나님의 신이 참 신이신 것을 아합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보여주는 일종의 승리자의 행진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향해 아무런 칭찬이나 하나님 앞에 회개나 맹세가 없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일종의 엘리야의 시위라고 보아야 합니다. 결과적으로 엘리야는 아합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신이 참 신인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선지자 엘리야는 왕과 백성들 앞에 만용을 부리거나 공갈을 치지 아니했습니다. '일곱 번까지 다시 가라'는 말은 그가 불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가 믿음의 귀로 큰 비의 소리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된다는 확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자는 불 받은 사람입니다. 불세례(성령세례)를 받은 자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날마다 큰 비의 소리를 듣는 자입니다. 엘리야는 단신으로 이세벨이 주는 정치적 지원과 경제적 지원을 받아가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어용 종교지도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했습니다. 

엘리야의 승리는 아합이 자신을 향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망언에 보복하면서 하나님의 원수를 갚는 데 까지 갔습니다. 여러분은 큰 비의 소리를 매일 매일 듣고 있습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큰비의 소리입니다. 성령이 자신의 기록한 것을 목사가 그 말씀에 붙잡히게 하시고 성령께서 목사의 전 인격을 통해서 말하게 하는 설교는 큰 비의 소리입니다. 사도행전 18장 5절에 『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로서 내려오매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 밝히 증거하니 』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13절에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고 했습니다. 

큰 비의 소리를 들었으면 기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일곱 번까지 기다린 끝에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조금 후에 큰 비를 몰고 오는 비구름입니다. 일곱 번까지 가라는 말은 보일 때까지 다시 가라는 말입니다. 보일 때까지 목 놓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 기도해야 합니다. 윌리엄 호벳은 "단 한번의 도약으로 정상에 오르려는 헛된 욕심 탓에 그토록 많은 비극이 이 세상에 탄생되었다"고 했습니다. 

듣기는 들었는데 무엇이 안보입니까? 보일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손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고 큰 비가 내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손만한 작은 것이 무엇입니까? 자식입니까? 직장입니까? 사업입니까? 우리가 가진 유형무형의 것은 비교할수록 작은 것에 불과 합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그것이 손만한 작은 구름이 아니라 큰 비구름인 줄 믿기를 바랍니다. 성년 20주년을 앞에 둔 우리 교회는 손만한 작은 구름을 보았습니다. 이 구름이 큰 비가 되고 홍수가 되고 메마른 대지를 넉넉히 적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손만한 작은 구름을 강이 범람하여 길이 막히게 되는 홍수로, 개연성의 통로를 뚫어내는 비전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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