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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년] 하나님의 가족을 찾아라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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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가족을 찾아라 (눅 15:11~32)


I. 무관심의 질병

2차 대전 당시 일본군 후방기지 병원에 로데라는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미군 포로들의 인체를 실험하는 일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오장육부 중 얼마를 잘라내면, 즉 허파 얼마를 제거했을 때 얼마 동안 살 수 있는가? 간의 얼마를 남겼을 때 얼마를 살 수 있는가? 하는 잔인한 실험을 매일같이 계속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로데는 미쳐버리고 맙니다. 양심의 가책 때문에 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토록 끔찍한 실험을 매일 반복하는 가운데 양심의 고통을 잃어버려가고 거기서 오히려 묘한 쾌감과 재미를 느껴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미쳐버리는 것입니다. 그의 절규는 "내 양심의 고통을 돌려 주세요" 였습니다.

엔도 슈사꾸의 단편 "바다와 독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작가는 현대인들의 무관심의 질병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한편 생명의 소중함을 망각한 잔인한 인간성을 나무라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 신앙생활에도 엔도 슈사꾸의 독약 - 즉, 무관심의 독약, 영혼의 소중함을 잃고 살아가는 독약이 있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정말 중요한 것을 잃고, 자칫 껍데기만 붙들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입니다. 내 곁에서 영혼이 죽어 가는데도 아무런 관심이 없고 내 교회의 엄청난 사역과 물결에도 관심이 없는 것 이것이 질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가장 소중한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첫째, 주님의 신부된 교회는 가족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두 가족입니다. 셀 목장은 가족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미래의 교인인 나의 VIP - 태신자들도 확장된 가족입니다.

둘째, 잃은 가족을 찾아 구원하는 일은 그리스도인들 모두의 지상과제입니다.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사명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40일 캠페인」입니다. 
두 번째 주간 주제는 「함께 전도하면 풍성해 집니다」입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하나님의 가족-VIP를 찾아라」입니다.


II. 정관사(The)의 사랑

누가복음 15장에는 유명한 비유 셋이 나옵니다. 

일찍이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신구약 성경 가운데 단 한 장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누가복음 15장을 선택하겠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5장만 있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돈의 비유, 잃은 아들의 비유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잃은 양은 무지해서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잃은 돈은 환경 때문에 잃게 되었습니다. 잃은 아들은 자기 판단과 결단에 의해 집을 나갔습니다. 

1. 그러나 성경은 세 가지 중 어떤 경우도 반역자나 배신자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잃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죄악된 세상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안목이 있습니다. 돌아오면 용서하겠다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용서해 놓고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자녀들을 양육하다 보면 어느날 자녀들이 어버이의 속을 썩입니다. 그것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면 부모는 결심을 합니다. "내가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러나 용서하지 않기에는 너무나 큰 사랑이 이미 부모의 가슴 속에는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용서하지 않을 래야 용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2. 성경은 늘 손해보는 하나님의 짝사랑 이야기입니다. 

본문에서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을 다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벌입니다. 바보 같은 양 한 마리 찾아 놓고 멀쩡한 양 몇 마리 죽입니다. 이런 손해보는 장사가 어디 있습니까? 동전 하나 찾고나서 벗들을 불러 모아 잔치를 벌입니다. 동전 하나 찾고 동전 몇 닢은 사용했을 겁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영혼을 찾는 일,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 신앙 생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주판알 굴려서 하는 것 아니다. 손익계산을 따질 일이 아니다. 전자계산기 두드려서 하는 일 아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온 천하에 사랑할 대상이라고는 나 하나밖에 없는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엄청난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의 그 무엇 - 심지어 아버지에게 그 유비를 찾는 것조차 불가능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가출한 청소년을 상담하게 되었습니다. 소년에게 탕자 비유를 들어 설명했습니다. 이제라도 아버지에게 돌아가면 신발을 사주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아 환영해 주실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몇 주 후 그 소년을 만났습니다. "얘, 아버지에게로 돌아갔구나." "예." "그래 신발을 사 주시든?" "아니요. 발바닥이 터지도록 맞았는데요." "금가락지를 끼워주셨겠지?" "아뇨. 지갑까지 다 빼앗겼는걸요." "송아지를 잡아 주셨겠구나." "아뇨. 송아지를 잡아 제게 주시는게 아니라 나를 잡아 송아지에게 먹이려고 하시던데요."

인간의 사랑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엔 한계도 끝도 제한도 없습니다. 내 허물보다 하나님의 사랑은 더 크고, 내 실수보다 하나님의 용서는 더 크고, 내 죄악보다 하나님의 구속의 보자기는 더 큽니다.

아들이 집을 나갈 때와는 달리 거지꼴을 하고 터덜터덜 힘없이 걸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한눈에 그 아들이 자기 아들임을 알아보는 것이지요. 밤낮없이 아들을 애타게 기다렸기 때문에 먼발치의 희미한 모습을 보고도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식이 아버지를 불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집나간 자식이 아버지를 먼저 알아보았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아버지가 먼저 아들을 알아보았습니다. 그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불러주셨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 아버지의 자비의 눈이 아들의 회개의 마음보다 빨랐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용서의 가슴이 달려오는 우리의 발걸음보다 더 빠르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아버지는 모든 것을 보고 계셨습니다. 

실패와 고통으로 지새우는 수 많은 밤을 아버지의 눈은 보고 있었습니다. 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방황하던 아들을 아버지의 눈은 뒤쫓고 있었습니다. 돼지우리에 앉아서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절망 속에 빠졌던 그 모습을 아버지는 보고 계셨습니다. '돌아가야지, 아니야 돌아가도 용서하지 아니 할거야' 망설이는 그 모습을 아버지는 지켜보고 계셨습니다. 충혈된 눈과 굶주린 창자를 보고 계셨습니다. 이 사랑은 인류전체를 향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를 향한 사랑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오늘 본문의 이 사랑은 정관사의 사랑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정관사의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잃은 양, 잃은 돈, 잃은 아들 그 앞에 정관사 the가 붙어 있습니다. 

동전을 찾습니다. 건초더미에서 잃어버린 동전 대신 아무 동전이나 채워놓고 열 개 채웠다 그럴 수 없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남기고 떠난 그 돈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찾는 것이 여인의 마음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시장에서 양 한마리 사다 놓고 백마리 됐다 할 수 없는 것이 목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아침 저녁으로 이름을 부르던 그 양, 상처났을 때 어루만지던 그 양, 젖을 짜던 바로 그 양을 찾을 때까지!

아들 하나가 집을 나갔습니다. 고아원에서 나이가 비슷한 아이 하나 데려다 놓고 이제 두 아이 됐다 그러면서 웃을 수 없는게 부모의 마음입니다. 내 핏줄을 타고난 그 아들, 옹아리와 걸음마를 할 때 내게 기쁨을 주던 그 아들을 찾을 때까지 끝까지 대문을 닫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어버이의 마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얼마나 귀하게 사랑하시는지, 예수님은 자기 생명과 우리 자신을 맞바꾸셨습니다. 예수의 피로 산 양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입니까? 한 생명을 살리기 위해 달리는 앰블런스와 같은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앰블런스가 엥엥거리고 달려 갈 때에 다른 모든 차가 길을 비켜 줍니다. 교회가 복음을 위하여 헌신하는 일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가족-나의 VIP를 살리는 일이라고 하면, 영혼을 건지는 일이라고 하면 교회 모든 프로그램은 길을 비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 정신이요, 복음 목회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 주님의 심장입니다. 


3. 세 비유에는 공통단어가 있습니다. "휴레카" I found it. "내가 찾았다"하는 단어입니다. 성경이 기록될 당시 '휴레카' I found it 이라고 하는 단어는 너무나도 유명한 단어였습니다. 

임금이 순금 왕관을 하나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순금인지 아닌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르키메데스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던 아르키메데스가 너무 골치가 아파서 시라큐스 공중 목욕탕에 갔습니다. 물이 철렁 철렁 흘러 넘치고 있는데 사람들이 마침 아무도 없습니다. 풍덩! 몸을 던졌습니다. 물이 출렁하고 넘칩니다. '아! 물이 흘러 넘친 만큼 부피가 되겠구나' '그만큼 무게가 가벼워지는 것이구나' 
I found it. 
휴레카! 휴레카! 옷 입는 것도 까맣게 잃어버리고 길거리로 뛰쳐나가 휴레카! 휴레카! 내가 알았다를 외쳤던 것입니다. 

바로 이 유명한 단어를 오늘 본문에 기록함으로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다. 이것이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의 마음이 되어야 한다고, 이것이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최고의 축제가 있다면 바로 하나님의 가족 VIP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III. 주인공 추적

이 사실을 좀더 분명히 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5장의 주인공을 우리가 추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별히 탕자의 비유로 알려진 이 본문의 주인공을 우리가 알아야 될 필요성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둘째 아들을 이 본문의 주인공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그렇게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 - 3절에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이때 바리새인들이 문을 열고 들어옵니다. 그러면서 비판했습니다. 예수님은 꼭 놀아도 저런 것들하고 논다고. 그때 예수님께서 몸을 돌려 저희에게 비유로 일러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을 들어야 될 일차적인 청중은 바로 바리새인이다 하는 것입니다. 맏아들입니다. 

우리가 소설 한 권, 영화 한 편 만화책 한 권을 읽어도 주인공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합니다. 칼이 한 번 쓱 지나가도 엑스트라들은 몇 십명씩 죽습니다. 그런데 주인공은 총을 몇방씩 맞아도 언덕으로 굴러 떨어져 누군가에 의해 구조되고 치료받아 회복함으로 끝까지 살아남고 마침내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15장 24절로 둘째 아들의 얘기는 깨끗이 막을 내립니다. 25-32절 가운데 둘째 아들의 얘기가 한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맏아들과 아버지의 대화로 이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막이 내려집니다. 맏아들이 주인공이다 하는 것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오늘 본문은 교회의 타성을 책망하는 메시지입니다. 신앙생활하면서도 습관의 감격과 감사를 잃어버린 못난 신앙을 나무라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상실한 교회를 향한 책망입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끼리만 교제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바리새인들끼리만 교제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무시했습니다. 교회 안에 성도들끼리 교제하면서도 세상 밖에는 무관심한, 나보다 못나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복음을 전할 마음이 없는 강퍅한 신앙인들을 책망하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결론은 전도에 무관심한 교회를 나무라는 말씀입니다. 
이동성장 - 양 뺏기에만 관심을 가지면 한국교회는 망합니다. 비신자 전도에 온교회, 온 성도가 나서야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을 가장 많이 닮은 신구약 성경의 인물을 찾아본다고 하면 틀림없이 바리새인일 것입니다. 내가 바리새인이다. 네가 바리새인일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바뀌어야 한다. 맏아들이 바뀌기 전까지는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 하는 메시지입니다.


IV. 맏아들은 무엇을 잃었나?

기실 맏아들이 진짜 탕자입니다. 맏아들이 무엇을 잃어버렸기에 -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맏아들은 하나님의 가족 - 잃은 동생을 찾을 열정을 잃어버렸습니다.

1. 그보다 먼저 아버지를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가 왜 맛있는 반찬을 드시면서 눈물을 흘려야 하시는지. 따뜻한 이불을 덮고 주무시면서도 왜 추워하시는지. 왜 대문을 걸어 잠글 수 없는지 아버지의 고통을 전혀 외면하고 살았던 못난 자식이 맏아들이었습니다. 동생이 돌아왔을 때 잔치를 벌이고 너무나도 기뻐하는 아버지의 기쁨을 짓밟아 버린, 잔치집 분위기를 망가뜨린, 가정의 행복을 꺾어버린 자식이 맏아들이었습니다. 맏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렸습니다. 

2. 그 다음 동생을 잃어버렸습니다. 

밭에 있다가 돌아와 보니 집안에 잔치집 분위기가 무르익었습니다. 집에 달려들어가지 못하고 담장 너머에서 종을 부릅니다. 이 무슨 일인가? 종이 소중한 것을 가르쳐 줍니다. 'Your brother.' 당신이 사랑해야 될 동생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 맏아들은 한번도 자기 동생을 향하여 '내 동생'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달려나와 다시 깨우쳐 줍니다. 'Your brother.'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지 않았느냐? 'Your brother.' 그러나 끝까지 이 아들은 자기 동생이란 말을 한번도 하지 않습니다. 

'이 아들'이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this son of yours.' '당신의 이 아들'이라고 합니다. 한 번도 내 동생이란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생각하기를 이 둘째 아들은 창기와 함께 탕진하며 살았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둘째 아들이 '아버지 내가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렸습니다.' 그렇게 고백했습니까? 아니요.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동네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습니까? 친구들 중에 그렇게 증언해 준 사람이 있습니까? 종들이 그렇게 얘기했습니까? 아니요. 이 아들이 사업을 하다가 부도를 만났는지? 큰 빌딩을 지었는데 홍수에 날라갔는지? 아니면 사기를 당했는지 알 길이 없지요. 

본문의 '허랑방탕'이란 말은 "구원의 삶에 합당하지 않게"라는 뜻입니다. "창기와 함께 먹어 버렸다"는 말은 맏아들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유일하게 이 맏아들이 자기동생을 비난하기를 창기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날린 이 아들이라고 혹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비난이었습니다. 사실이 아닐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어찌 그 아픈면 만을 과장하여 얘기할 수 있더란 말입니까? 사랑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비신자들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면 그들은 돌아오고 싶어합니다. 저들은 모두 세상과 쥐엄 열매에 이제 지쳐 있습니다. 세상은 저들에게 배부르게 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7-20).

당신이 품은 VIP-태신자 그도 우리 천국의 가족입니다. 그도 우리 형제입니다. 그도 구원받아야 할 사람입니다. VIP-태신자가 없는 사람은 소중한 천국가족을 버린 사람입니다. 그가 본문의 맏아들입니다. 그가 탕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가장 중요한 일이 하나님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이요 우리의 VIP-미래의 가족을 하나님의 품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복음전도를 그래서 위대한 명령이라고 합니다.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이 될 수밖에 없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 복음전도는 하나님의 가족,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맡겨주신 사명입니다. 

"천사도 흠모하겠네" 이게 복음전도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의 가족을 세워가기 위해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가족은 영원히 함께 살면서 서로 사랑할 가족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가족을 이 도시 구석구석 전세계 열방 모든 곳에 세우시길 원하십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고 우리에게 이 사역을 맡기셨습니다. "너희가 이 사역, 이 사명을 완성해 주길 바란다."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던 마지막날 하나님과 천사가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하나님, 앞으로 태어나게 될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여 우리의 가족으로 삼는 일은 누구에게 맡기실 생각입니까?" "내 자녀들에게 맡길 것이다. 저들이 구원받았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하게 할 것이다." 또 천사가 묻습니다. "저들이 하나님의 부탁,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어떻게 하실 것입니까? 다른 계획이 뭐죠?" 하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No, Plan! 다른 계획은 없다. 이 일은 가장 소중한 일이요, 가장 소중한 복이기에 오직 소중한 내 자녀들에게만 맡긴다!"

2.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두 번째 이유는,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도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유일한 크리스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만큼 신뢰하십니다. 내가 전하지 아니하면 그들은 멸망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네가 복음을 전하지 아니해서 그들이 멸망하면 그들은 그들의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 죽음에 대한 피 값을 네게 물을 것이다"(겔3:18)

문제는 교회에 오랫동안 다닌 사람은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삶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것인지, 얼마나 무섭고 절망적인 것인지를 잊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모든 사람에게 가장 긴급하고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것보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행복과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원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 소식이 나를 통해 죽은 영혼들에게 전해진다는 사실은 정말 가슴 설레이는 일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기쁨입니다.

3.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세 번째 이유는, 복음전도는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내 삶의 여러 목적 가운데 천국에 가서는 할 수 없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내가 할 수 있는 긴급한 사명입니다. 내가 살아 있어도 그가 죽으면 끝나버리는 사명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찬송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예배하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의 가족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친밀한 교제를 나누며 살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하고 섬기며 살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전도는 이 땅에서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중생하지 못한 사람을 구원해 내는 일은 오직 이 땅에 사는 동안에만 감당할 수 있는 사명입니다. 만약 여기서 기회를 놓치면 영원히 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이 얼마나 긴박하고 중요한 일입니까?

4. 복음전도가 위대한 명령, 위대한 기쁨인 네 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사명은 영원한 중요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복음전도는 다른 사람들의 영원한 운명에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복음 전도의 결과는 영원히 남게 됩니다. 때문에 내 이웃이 하나님과 영원한 관계를 맺도록 도와주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이 사명보다 서둘러 감당해야 할 어떤 일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루를 살고 나면 이 사명을 수행할 시간 하루가 줄어든 것입니다. 일년을 살고 나면 일년이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루도 지체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한 영혼이라도 당신이 주께 돌아오도록 도왔다면 그와 더불어 영원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5. 뿐만 아니라 이 맏아들은 자기 자신을 잃어버렸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잃어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덤비면서 하는 얘기가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거늘" 과연 이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습니까? 신구약 성경에 보면 아버지의 명령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하나님 사랑입니다. 두 번째, 내 이웃을 사랑하는 겁니다. 

내 이웃을 사랑하는 메시지도 두 가지입니다. 첫째, 네 동생 찾아와. 날이면 날마다 "얘야 네 동생이 집을 나간지 며칠이 지났구나. 동생 좀 찾아 보려무나." 그러나 한 번도 찾아 나선적이 없습니다. 두 번째, "네 동생을 사랑해라. 네가 찾아 나서지 않다고 하면 돌아오는 그 동생이라도 사랑해라." 그러나 사랑한 흔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계명을 어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웃을 찾아 나서라고 하는 엄청난 지상명령을 어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네 가족들을 사랑하며 살라고 하는 사랑의 계명을 어기고 살면서도 나는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다고 자신만만하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V. 내가 기록하는 33절

오늘 본문은 32절로 막이 내려지고 있습니다. 완성되지 않은 채로 끝나버립니다. 33절이 기록되어야만 완성됩니다. 

33절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버지에게로 달려가 '아버지 아버지와 더불어 살기를 원합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맛난 음식을 드시면서도 왜 우셔야 했는지 나는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밝은 달이면 언덕에 올라 먼 산을 왜 쳐다보시는지 나는 몰랐습니다. 아버지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품에 덥석 안겨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33절이 가능합니다. 또 다른 33절, 둘째 아들이 돌아왔는데 아버지 가슴에 못질하고 다시 집을 떠나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먼 길을 떠나는 33절이 가능합니다. 

왜 33절은 기록하지 않았을까요? 그 33절을 우리가 기록해야 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어떤 33절을 기록하느냐? 여러분이 어떤 33절을 기록하느냐 여하에 따라서 주님 앞에 서는 심판의 보상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33절을 기록하고 있습니까? 이제 복음을 위해 살기로 다짐하십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해 살기로 작정하십니까? 그 분 한 분 때문에 행복하기로 작정하십니까? 그분과 더불어서 살다가 그분과 함께 죽기로 각오하십니까?

1) 누가복음 15:33을 기록하는 마음으로 나눠드린 VIP 카드를 기도하면서 한 주간 동안 기록하시기 바랍니다. 

2) 새벽기도회나 개인기도회 - 특별히 목장모임 시간마다 VIP카드를 손에 들고 기도하십시요. 나의 VIP뿐만 아니라 목원들의 VIP를 위해서도 중보기도 하십시요. 성령님이 도와 주셔야 전도가 가능합니다. 

3) VIP들과 공동관심사를 찾아보십시요. 그들의 필요와 요구를 찾아 보십시요. 그리고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사랑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4) 자신감을 가지고 그들에게 다가 가십시요.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소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요 예수님입니다. 당신은 그 예수 소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5) 그들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과 교회를 자랑하십시요. 예배와 목사님을 자랑하십시요. 그리고 당신이 하나님을 만나 변화된 이야기들을 들려 주십시요.

6) 만날 때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고 "내가 무엇을 위해 어떻게 기도해 드릴까요?"라고 물어보십시요.

7) 어느 정도 무르익었다 싶으면 목장으로 또 알파코스로 초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위대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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