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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평생의 하나님 은총 (시 3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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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의 하나님 은총 (시 30:1~5)
  

2008년도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교우님들의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과 평강이 넘치시길 기원합니다.  

<마지막>이란 단어가 붙은 때가 되면 누구나 마음이 숙연해집니다. 마지막 주일, 오늘 같은 날은 우리네 인생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기 좋은 시기입니다. 

어느 신문에 올해의 인물이라고 해서 한 해 동안 성공신화를 일구어 온 사람들의 얼굴이 크게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계통 신문에도 인생에 큰 족적을 남긴 사람들의 이야기가 실리곤 합니다. 그렇다면 일반 신문에서 언급되는 인물들과 기독교 계통 신문에서 언급되는 인물들의 인생 스토리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주어의 차이라고 할 것입니다. 일반 신문의 이야기는 <그 사람>에게 초점을 맞춥니다. 성공 신화를 쓴 주역은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계통 신문에서는 그를 통하여 일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단지 <하나님께 적극적인 응답을 한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적극적 응답을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그 모델을 요셉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성경의 가장 대표적인 성공 신화의 주인공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가나안 땅의 평범한 유목민의 아들이었는데, 후에 거대 제국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을 조각으로 뜯어서 보면 형편없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는 13년 동안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꿈 많던 열 일곱 살 소년이 어느 날 갑자기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는 언어도, 풍속도 다른 애굽 땅의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하늘 아래 그가 가장 비천한 존재였습니다. 더구나 그를 견딜 수 없게 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형님들에 의해 팔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그로 하여금 견딜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의하여 절벽 밑으로 던져진 것입니다. 두 번째 도무지 희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노예이면 평생 노예입니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사는 존재인데, 아무 희망이 없다면 이 얼마나 비극적입니까? 게다가 나중에 그는 너무도 억울하게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강간미수죄>의 누명을 덮어쓰고 감옥에까지 떨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의 요셉은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를 생각할 때면 노예 요셉을 생각하는 게 아니라, 총리 요셉을 떠올립니다. 그는 위대한 인물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요셉을 흠모하는 것은 그가 총리가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믿음의 선배로 소중히 여기는 이유는 <그가 연극의 1막도 채 끝나기 전에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하면서 일어서서 나가는 성급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이상 보고 있기 힘들 정도의 1막을 끝까지 보았습니다. 그리고 2막을 기대했고, 3막까지 끝까지 앉아 있었습니다. 그 연극의 제목은 <인생들>입니다. 그 연극의 대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분은 하나님입니다. 처음엔 그 연극이 너무도 가슴 아팠습니다. 그래서 당장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여러 번 느꼈습니다. 그러나 견디고 앉아 2막을 보니, 위대한 반전이 이루어졌습니다. 2막에서 요셉은 노예의 자리에서 벗어나 총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3막에서는 굶어죽을 위기에 봉착한 애굽 백성들을 먹여 살리는 생명 사역자로 등장하였습니다. <끝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끝까지 바라본다!>, 이게 하나님께 대한 적극적 응답입니다.  

2008년도에는 하나님의 작품이 아직 끝이 나기 전에 <더 볼 것 없다>고 하면서 자리를 뜬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많은 유명인들이 스스로 생명을 끊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인생의 2막과 3막을 어떻게 펼쳐 주실 것인지 기대하지 않고, 그냥 자리를 떴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네 인생의 1막만 주관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 전체를 엮어 가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평생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드라마는 끝까지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위해 만드시는 드라마는 <평생 드라마>입니다.

인생을 표현하는 말 중에 <일생(一生)>이란 말이 있습니다. <일생>이란 <생이 하나>란 의미입니다. 생은 두 번도 아니고, 세 번도 아닙니다. 우리 인생은 단 한번뿐입니다. 그래서 인생은 이생도 아니고, 삼생도 아니고, 일생인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인생은 연습도 없고, 반복도 없습니다. 단 한번뿐인 삶, 일생을 잘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

또 인생을 표현하는 용어 중에 <평생(平生)>이란 말도 있습니다. 평생이란 글자 그대로 하면 평편한 생이란 의미인데, 그 속뜻은 인생이란 조각, 조각으로 떨어져 있지 않고 전체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이란 조각 조각으로 나눌 수 없고, 그 전체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인생은 전체로서 하나가 있을 뿐이지, 그것을 분해하여 여러 개가 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을 평생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필요한 몇 년 동안 거래하고 헤어지는 사업 파트너가 아닙니다. 그 분은 아플 때만 찾아가서 진료를 받는 의사 선생님이 아닙니다. 그 분은 평생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평생을 하나님께 맡깁니다. 1막만 맡겨보고, 맘에 들지 않는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인생 전체의 막이 내리는 그 순간까지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 와도 끝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인생이란 전체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인생을 조각을 내어 그 하나 하나를 보면서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잘 압니다. 

오늘의 본문 시편 30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도 요셉처럼 하나님께 자신의 평생을 맡길 줄 알았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늘 격무와 전쟁에 시달리던 다윗은 모처럼 집에서 시간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평온은 없었습니다. 그 날 밤 사울 왕이 보낸 자객들이 그의 집을 덮쳤습니다. 이 위급한 시간에 그의 아내 미갈은 사울 왕의 딸인데,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 사이에서 갈등하다가 남편을 피신시키기로 작정합니다. 미갈은 창문으로 다윗을 피신시켰습니다. 얼마나 다급한 상황인지 짐작이 되시지요?

그 당시 그에게는 아무런 희망이 없었습니다. 왕이 자신을 죽이려는 마당에 도망할 곳도 없었습니다. 꼼짝없이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그런 세월을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편안히 잠드는 밤이 없었고, 날마다 생명의 위협 속에서 살았습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차라리 스스로 인생의 무대에서 내려 왔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객을 피해 도망하여 생명을 건지던 그 날의 일을 본문 1절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은 주께서 나를 끌어 내사 내 원수로 하여금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못하게 하심이니이다> 

또 3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여 주께서 내 영혼을 스올에서 끌어내어 나를 살리사 무덤으로 내려가지 아니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 죽음의 자리에서, 스올에서 끌어내셨습니다. 이런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위기를 통과할 때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여호와여 내가 주를 높일 것>이라고 말하면서 찬양하고 있습니다.   

또 다윗은 질병 때문에 고통받을 때도 있었습니다. 시편 39편 12-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도합니다. <여호와여 나의 기도를 들으시며 나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소서 내가 눈물 흘릴 때에 잠잠하지 마옵소서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심각한 질병, 죽음을 각오해야 할 질병이 그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도 그는 절망하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를 건지셨습니다. 본문 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매 나를 고치셨나이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고친다>는 것은 <라파>입니다. 여호와라파, <여호와는 우리를 고치는 분, 우리의 치료자>인 줄 믿습니다.

남들이 포기할 상황, 더 이상 볼 것 없다고 말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상황,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말하는 그 상황에서도 다윗은 기다렸습니다. 그에게 하나님은 <평생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시편 23편 6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성도 여러분, 인생을 조각 조각으로 보면, 그 한 조각, 한 조각은 우리를 너무도 힘들게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살 용기를 잃게 만듭니다. 그러나 인생은 전체가 하나입니다. 조각으로 보면 실패처럼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그 실패를 디디고 일어서게 만드십니다. 하나님은 평생의 하나님입니다. 

오늘 우리는 2008년도의 마지막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2008년도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해 보면 얼마나 많은 좌절이 있었습니까? 슬픈 일은 또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러나 2008년의 아픔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2막과 3막을 끝까지 보아야 합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이런 기대감으로 가득한 믿음을 5절에서 멋지게 고백하였습니다. 다같이 읽겠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할렐루야!

여기서 <잠깐>이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눈을 한 번 깜빡하는 시간, 찰라, 순간>을 말합니다.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노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은 눈 깜빡할 정도로 순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은총은 평생>이라고 했는데, 여기 평생이란 <하이>라는 말로서, <생명>, <살아있는 것>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총은 우리의 생명이 붙어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평생의 은총입니다. 

또 <저녁에는 울음이 깃든다>고 했는데, <깃든다>는 단어의 원 뜻은 <밤새도록 머문다>입니다. 원수가 스토커와 같이 계속 따라다닙니다.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도저히 떼 낼 수가 없습니다. 울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실패와 고통이 다가오고, 그로 인해 울음이 오는데, 그게 아무리 떨쳐 버리려고 해도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절망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을 보세요.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도저히 떨어질 것 같지 않는 고통도 사라질 때가 있습니다. 울음을 그치고 기뻐할 때가 옵니다. 아무리 밤이 깊어도 밤은 가고 새벽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사울 왕의 추격이 영원할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시고, 다윗을 그 자리에 앉게 하셨습니다. 아침이 온 것입니다. 더 이상 울지 않고 웃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까지 하나님의 드라마를 지켜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평생 그 분을 의지하고 따르면 언젠가는 그런 위대한 승리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결코 소망을 버리지 마시길 바랍니다. 김교신 선생은 일제 시대의 우리 민족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후 1927년 6월에 <성서조선>이란 잡지를 선물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서와 조선이란 나라는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잡지는 1942년 3월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되었습니다. 이 잡지의 가장 열정적 독자 중 한 사람이 <성산 장기려 박사>입니다.

이 잡지가 폐간된 이유는 잡지에 실린 <권두언> 때문이었습니다. 그 권두언의 제목은 <조와(弔蛙)>, 즉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것입니다. 그 전문은 짧습니다. 

<작년 늦은 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 하나 담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天成)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석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 좌우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 속에서 암색(岩色)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에 대변사(大變事)나 생겼다는 표정으로 신래(新來)의 객(客)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들, 때로는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潭上)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들의 기동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하기 무릇 수개월이여! 

봄 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 속을 구부려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 꼬리에 부유(浮遊)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혹한(酷寒)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붙은 까닭인 듯. 동사(凍死)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底)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全滅)은 면했나 보다! >

일본 총독부는 이 글의 끄트머리를 문제삼았습니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게 일본의 지배를 받는 조선인들에게 불순한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겨울에 물이 얼어 개구리가 다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아직 두어 마리는 살아 있다, 위대한 희망의 노래입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혹한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12월말은 계절적으로도 혹한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경제 한파가 몰아치고 있습니다. 다 얼어 죽을 것처럼 보입니다. 절망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이 힘들 때 연말을 맞이하면서 후회스러운 것도, 걱정스러운 것도 많지만, 희망을 버리지 마십시오. 2008년도 한 해만을 떼어 생각하면서 슬퍼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평생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펼쳐 주실 2막을 기대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 독일 신학자 본 훼퍼는 <옥중 서간>이란 작품에서 인생의 모습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떠한 인생의 과정도 거침없이 조용하게 흐르는 일이란 없다. 둑에 부딪치고, 우회하고, 혹은 자기의 맑은 수면에 돌을 던지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각자의 인생에는 늘 어떤 일이 일어나는 법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에는 늘 어떤 일이 일어나, 맑은 물을 흐리게 만듭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할 일이 무엇일까요? 

본 훼퍼 목사님은 계속 말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마음을 써야 할 것은 자기 인생의 수면을 다시 맑게 하여 하늘과 땅이 거기에 비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수면을 맑게 하는 것, 다시 영혼을 맑게 하여 하늘과 땅이 비치게 하는 것, 거기 하나님의 손길이 보이게 하는 것, 그것이 성도가 할 일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겸손히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기도는 긍정적인 삶을 사는데 반드시 필요하다. 조용히 하나님을 바라보면 부정적인 목소리들이 작아진다. 하나님의 도우심, 능력, 인도하심을 구하면 기대감이 부풀어오르면서 희망이 생겨난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에 문제를 많이 맡기면 맡길수록 도할 때 그만큼 마음의 평화가 커진다> 도저 캠벨의 <부정적인 세상을 긍정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 중에 한 구절입니다.

시편 30편은 성전 낙성가란 표제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성전을 드리면서 이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성전 수전절>이 될 때마다 불렀습니다. 주전 167년 헬라의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의 군대가 성전 제사장들을 학살하고, 그 안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를 잡아 제사하여 성전을 모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다 끝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들은 이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저는 2008년도를 마치시는 교우님들에게 이 말씀을 선물로 드립니다. 
평생의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어려움을 이기고 우뚝 서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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