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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시므온의 노래 (눅 2:2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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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의 노래 (눅 2:25~32)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우리가 읽은 29절에서 32절은 ‘눈크 디밋띠스(Nunc Dimittis)’라 불리는 시므온의 노래입니다. 눈크 디밋띠스는 라틴어로 ‘주재여 놓아주시는도다’라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지난번에 묵상했던 마리아의 ‘마그니피카트’와 사가랴의 ‘베네딕투스’와 함께 교회사에서 널리 애창되던 찬가입니다. 흔히 하루를 정리하는 마지막 기도로 낭송되었고 루터교에서는 성찬식 후 드리는 찬송으로 불려졌습니다. 여러분도 이 찬양들로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루의 첫 시작은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눅1:68)로 시작하는 사가랴의 베네딕투스로 시작하십시오. 해질 무렵에는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1:46,47)으로 시작하는 마리아의 마그니피카트로 마무리 하십시오.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오늘 읽은 시므온의 눈크 디밋띠스로 평안한 잠자리에 드십시오.

교회의 오래된 전통으로 성무일과라는 것이 있습니다. 성무일과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하는 매일 기도를 말합니다. 시편 119편 164절은 “주의 공의로운 규례를 생각하면서, 내가 하루에도 일곱 번씩 주님을 찬양합니다”고 고백하는데 중세 수도원에서는 이 전례를 좇아 하루에 일곱 번씩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침과 저녁 기도로 축소되었고 이를 위해서 매일기도서를 세계 많은 교단들이 발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새벽기도도 이것을 대신하고 있지만 우리에게 좀더 필요한 것은 저녁기도입니다. 밀레의 만종에서 보듯이 일을 마치며 드리는 기도가 있으면 우리 신앙생활은 더 깊고 풍요로워질 것입니다. 세상에 지치고 혼탁해진 우리 영혼을 저녁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께로 다시 향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마그니피카트나 베네딕투스, 눈크 디밋띠스를 낭송하면 참으로 은혜로울 것입니다.

저도 시므온의 노래를 참 좋아합니다. 특히 29절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는 말씀은 제가 임종을 앞둔 사람에게나 입관 예배시 주로 사용하던 말씀입니다. 장차 제 자신도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시므온과 같은 고백을 하고 주님 품으로 가기를 소원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마지막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그냥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죽기 싫어서 발버둥치는 모습으로 인생의 마지막을 맞겠습니까? 남아 있는 자들이 여러분을 통곡과 절망으로 당신의 죽음을 맞도록 만들겠습니까? 아니면 때가 이른 줄 알고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며 “주재여 이제는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하며 편안한 안식에 들겠습니까? 

인생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이제 그 짐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나그네가 오랜 여행 끝에 자기 집으로 돌아와 모든 짐을 풀고 긴장과 스트레스를 풀고, 사지를 쫙 펴고 편안히 잠자리에 들듯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이런 평화가 있습니다.

‘시므온의 노래’는 렘브란트의 그림으로도 유명합니다. 렘브란트는 ‘시므온의 노래’란 제목의 그림을 그가 죽던 해인 1669년에 그렸습니다. 이 작품은 시므온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렘브란트 특유의 검은 색을 배경으로 시므온은 눈이 먼 듯 거의 감겨진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마에는 깊은 주름살이 베어 있고 대머리가 된 머리에 흰 수염을 날리며 고뇌와 우수가 담긴 듯 형용할 수 없는 표정을 짓고 있습니다. 

이는 인생 노년의 렘브란트를 상징하는 듯합니다. 렘브란트는 청년시절에는 부유하게 지냈지만 노년에는 파산 선고를 당하고 아무도 임종을 지켜보지 못할 정도로 쓸쓸한 죽음을 맞았습니다. 두 아내와 자녀 여섯이 있었지만 아내들뿐만 아니라 다섯 명의 자녀들이 자기보다 먼저 죽는 모습을 본 비운의 화가였습니다. 그런 고뇌가 그 얼굴 표정에는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렘브란트는 젊은 시절에도 ‘성전에 나타나심’ ‘아기 예수의 정결예식’이란 제목으로 시므온을 그린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의 시므온은 클로즈업이 되지 않습니다. 여러 사람들 중에 하나이거나 다른 한쪽을 쳐다보고 있는 옆모습이 그려졌습니다. 전체적으로 밝은 색의 톤을 유지하고 있으며 아기 예수를 힘 있게 안고 있습니다. 그 손은 보통 손보다 더 크고 밝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들은 젊은 시절 렘브란트가 가진 희망과 신앙을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마지막 유작이 된 이 “시므온의 노래”는 나이 들어 늙고 처연하고 고통에 찬 모습의 시므온이 그려집니다. 아기 예수보다는 시므온이 주인공이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인생의 깊이와 신앙의 신비를 더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진 신앙은 ‘그저 믿습니다’ ‘믿으면 됩니다’라는 식의 단순한 신앙이 아닙니다. 오랜 고난과 절망, 어떤 때는 하나님을 부인한 끝에 도달한 신앙입니다. 

육신의 눈이 멀고 나서야 비로소 영혼의 눈이 뜨인 그런 깨달음을 시므온의 얼굴에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림속의 아기 예수님은 눈멀고 주름 진 시므온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빛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이 아기 예수를 시므온은 그 두 손으로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떠받들고 있습니다. 그 손 또한 어두운 색으로 검은 색 배경과 구분이 가지 않지만 매우 거칠고 뼈마디가 돋아 있습니다. 삶과 죽음의 모습이 교차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희망입니다. 육신은 늙고 눈은 보이지 않지만 떠받든 손 안에 아기 예수라는 희망이 들려 있습니다. 이제 그 인생을 평안히 놓아주시기를 간구하는 한 노인의 모습이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그렇습니다. 햇볕만 내리쬐면 그 땅은 사막이 되고 맙니다. 비도 오고 겨울도 있어야 기름진 땅이 됩니다. 나무도 가물 때도 있어야 깊이 뿌리를 내립니다. 그래서 신앙은 세월이 필요합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데 우리 신앙은 얼마나 깊어졌습니까? 눈에 보이는 받은 축복을 세어보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자신이 얼마나 깊어졌는지 헤아려 보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어려움과 고난이 있었지만 그 때문에 내 신앙이 더 깊어지고 하나님을 더욱 의뢰하게 되었다면 그것은 마땅히 감사해야 될 일일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

시므온의 노래는 기다리는 사람들의 노래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랜 세월 동안 자신의 민족을 구원해줄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이스라엘은 BC 586년 바벨론에 망한 이후로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계속해서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바벨론 이후에 페르시아, 헬라, 로마에 이르며 식민통치를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루 세 번씩 기도하는 ‘쉐모네 에쉬레’라는 18개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그 기도문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이스라엘의 구속자 여호와 하나님, 우리의 고난을 보시고 당신의 이름으로 인하여 우리를 구속하소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고, 우리의 흩어진 자를 모으소서. 흩어진 자를 모으시는 여호와 하나님, 찬송받으소서.” 

오늘날 히브리 찬송들에는 이런 기다림의 노래들이 많습니다.

시므온 또한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25절에서 성경은 시므온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무엇이 위로가 되겠습니까? 위로는 이스라엘이 지금 당하고 있는 이방 나라의 압제와 수치로부터의 구원일 것입니다. 시므온은 그 기다림의 보람으로 아기 예수를 보게 되었고 그 아기를 안고 감격에 겨워 오늘 시므온의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스라엘의 구원과 위로를 성취한 메시야로서 오셨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다림은 끝난 것인가? 아닙니다. 우리 기독교인들 또한 여전히 기다립니다. 이번에는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을 붙들고 그분의 재림을 기다립니다. 

초대교회의 마지막 인사는 마라나타(아람어), 곧 “주여 오시옵소서”(고전16:22)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라는 간구로 끝맺고 있습니다. 

우리 삶이 어렵고 고난이 심할수록 기다림의 소원은 더 간절해집니다. 그래서 가끔 하나님은 우리에게 고난을 주셔서 우리 영혼이 땅을 향하지 않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향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에 어려움이 닥칠 때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우시는 소리로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민족을 경제적 위기와 정치적 위기로 흔드시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물론 이것이 이 세상에서 도피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관과 방식, 즐거움에 빠져 있는 우리에게 우리가 추구하고 마땅히 기다려야할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기다리는 자에게 하나님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시므온은 오랜 세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고 그 기다림대로 하나님은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시므온은 그 기다림의 시간 동안 함부로 보내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경건하게 지켰으며 기도로 준비하였습니다. 기다리는 자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의 응답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강철 왕으로 유명한 카네기의 집무실 한 쪽에는 낡고 커다란 그림 한 점이 평생 동안 걸려 있었다고 합니다. 그 그림은 배 한 척이 모래와 진흙 바닥에 처박혀 있는 그림입니다. 노는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는 무척 절망스러운 광경의 그림이었습니다. 이 그림은 유명화가가 그린 것도 아닙니다. 무슨 의도로 카네기는 이 그림을 걸어놓았을까? 이 그림 밑에는 그 이유를 단번에 설명하는 인상적인 글귀가 하나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 

이 그림은 카네기가 젊은 시절에 외판원으로 고생하며 일할 때 방문했던 한 노인의 집에 걸려 있었던 그림이었다고 합니다. 그 밑에 쓰인 글귀,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는 글귀가 하도 마음에 들어 이 노인에게 그 그림을 달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이후 카네기는 자기 인생에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이 그림을 보며 위안을 삼았다고 합니다. 사업의 위기를 맞거나, 절망의 순간이 다가오거나, 여러 일로 지쳐 있을 때 이 그림을 보며 카네기는 “반드시 밀물 때가 온다”며 참고 기다렸다고 합니다. 

여러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밀물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밀물이 밀려오면 진흙에 박혀 있던 배는 둥실 떠오를 것입니다. 그 배는 희망을 안고 먼 바다를 향하여 다시 나아갈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다고 하여 절망하지 마십시오. 밀물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십시오. 때가 되매 다시 멋지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사용하실 것입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는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라고 찬양합니다. 시므온은 바로 자신이 죽기 전에 메시야를 보게 될 것이라는 성령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약속이 실현되어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시므온은 감격에 겨워합니다. 그는 구원을 보았다고 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보는 구원입니다. 보이지 않거나 막연한 희망이 아니라 손에 안고 있으면 눈으로 똑똑히 보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추상적인 진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습니다. 내 안에 예수를 품고 있을 때 그것이 구원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가 살아나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눈이 열려 예수를 보고 예수를 만지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찬식이 그렇습니다. 우리가 성찬식을 올릴 때 그것이 육적인 눈으로 보면 단순히 빵과 포도주에 지나지 않지만 영적인 눈으로 보면 그것은 바로 아기 예수님은 우리 손안에 모시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어거스틴은 성찬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의 보이는 표지이다.”고 하였습니다. 

루터 교에서는 성찬식 후에 시므온의 찬양을 한다고 말씀드렸는데 이렇게 찬양하는 이유중 하나가 “내 눈으로 주의 구원을 보았으니”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은 눈으로 보는 구원입니다.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손에 들고 있을 때 마치 우리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시므온과 같은 은혜를 재현하고 있다 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관념이 아닙니다. 현실이며 경험입니다. 오늘도 이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만지고 보고 느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야 우리 영혼이 삽니다. 

요한복음 4장 2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신령과 진정이라는 말이 마치 우리 온 정성을 다하여 예배하라는 말처럼 오해하기 쉽습니다. 개역 개정판을 이 말씀을 이렇게 다시 번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은 성령을 의미하고,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여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예배여야 합니다. 그 예배 안에 성령의 감동과 충만함이 없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아닙니다. 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지 않는다면 그 예배는 죽은 예배입니다.

예배의 성만찬은 예수님이 2천 년전에 죽으신 분이 아니요, 오늘 바로 이 자리에 다시 임재하고 계심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 듯 오늘 예배를 통하여 예수님을 안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배는 좋은 교훈을 듣거나 좋은 음악이나 분위기나 교제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죽은 예배입니다.  


이방의 빛

시므온의 찬양 중 특징적인 것은 그 구원이 단지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31절을 보세요.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절도 보세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어지는 32절 후반절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는 고백도 실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기에 영광이 된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와 구원은 자신만을 위한 구원이 아닙니다. 이는 타인과 이방 타민족을 위한 구원입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구원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그 구원은 절대 이기적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도 그렇습니다. 단순히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을 만들어 그 민족을 강대한 나라로 만들겠다는 민족주의 개념만 내포되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창세기 12장 2절에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비전을 보여주십니다.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입니다. 복의 근원은 복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이 복이 흘러 넘쳐 주변 이방나라도 복되게 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비전입니다.

이 하나님의 비전의 모습이 이사야 40장 이후에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에서 55장의 예언의 무대는 바벨론 포로기의 상황입니다. 바벨론 포로 된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다시 해방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의 메시지들은 밝고 희망찹니다. 그러나 한 민족의 해방이기에 민족주의로 가득할 것 같은데 오히려 다른 온 민족을 생각하는 사해동포주의로 가득합니다. 

이사야 42장 6절입니다.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49장 6절입니다.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스라엘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 민족이 고난 받는 사건을 통해서 다른 민족에 대한 분노와 복수로 나갈 수도 있습니다. 니체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괴물과 맞서 싸울 때 조심할 것은 자신이 그 괴물을 닮아가는 것이다.” 정말 그렇습니다. 힘과 불법으로 우리를 억압한 세력에 대해서 우리는 동일한 힘과 불법으로 복수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다 우리가 그런 자리에 서게 되면 또하나의 제국주의자가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민족의 고난을 통하여 다른 민족의 고난을 이해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자기 민족의 고난을 다른 민족들의 죄를 대신하는 대속적인 성격도 부여합니다. 

이사야 40-55장에는 4개의 고난 받는 종의 노래들이 나옵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이 이사야 53장 5절의 예수님의 속죄의 죽음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그런데 이 고난받는 종은 메시야에 대한 예언으로 해석되기 전에 먼저 고난받았던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잘못해서 매를 맞기는 하였지만 너무 심하게 맞았다는 것이 이스라엘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들은 이 생각을 발전시켜 그것은 단지 죄 때문에 맞은 것이 아니요, 이방민족들의 죄악도 대속하는 고난이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넘어짐과 다시 일어섬은 단순히 자기 민족만의 부끄러움과 영광이 아니라 이방 민족 또한 구원하려는 주님의 뜻이 담겨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의 고난과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넘어짐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의 고난을 이해하는 도구로 삼습니다. 우리의 일어섬을 통하여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 복을 전하고 그들을 위로합니다. 이것이 이방의 빛 된 삶의 모습입니다.

우리 민족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고난을 주시고 또 구원을 주시는 까닭은 혼자서만 잘살라는 뜻이 아닙니다. 강대한 나라가 되어 다른 나라에 복수하거나 교만하게 뻐기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이방 민족을 복되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통하여 북한이 복을 받고, 동북아시아에 평화가 주어지고 다른 제3세계 민족을 돕고  희망을 품게 하는 것 그것이 우리 민족을 향하신 주님의 뜻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다음과 같은 비전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이방의 빛으로서의 삶이라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은 “나의 소원”이라는 글에서 내가 원하는 우리 나라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富力)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력(强力)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방의 빛으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신 뜻을 따라 우리는 제대로 살아왔는지 돌이켜보아야 합니다. 자기만을 위해서 이기적으로 살며 우리 민족만 잘되면 된다는 민족 이기주의에 사로잡힌 채 살지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방의 빛으로서 이웃과 다른 나라를 복되게 하는 사람, 민족이 되길 원하십니다. 

세계 경제 위기는 이제 인류가 따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고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게 해줍니다. 역으로 우리가 선한 영향력을 이웃과 주변 나라를 향하여 미친다면 그것이 또한 우리 민족에게 복으로 되돌아 올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일수록 다시 한번 하나님의 부르심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방의 빛으로 서서 세상을 향해 제대로 빛을 발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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