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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송년] 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답게 (골 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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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택함받은 사람답게 (골 3:12~17)


[그러므로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 받는 거룩한 사람답게, 동정심과 친절함과 겸손함과 온유함과 오래 참음을 옷 입듯이 입으십시오. 누가 누구에게 불평할 일이 있더라도, 서로 용납하여 주고, 서로 용서하여 주십시오. 주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과 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십시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입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지배하게 하십시오. 이 평화를 누리도록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여러분은 감사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 풍성히 살아 있게 하십시오. 온갖 지혜로 서로 가르치고 권고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으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여러분의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십시오. 그리고 말이든 행동이든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분에게서 힘을 얻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 한 해의 결산

2008년의 마지막 주일 아침, 우리의 발걸음을 지금까지 인도하신 에벤에셀의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한 해를 결산하는 마음이 허허롭기만 합니다. 엄벙덤벙 보내온 세월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공과 실패로 갈무리하기엔 우리 삶이 무척 다채롭습니다. 기쁨과 슬픔, 고통과 위안, 평안과 불안이 갈마들던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돌아보니 고마운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우리 삶은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 남긴 흔적으로 구성된다는 데, 매주 만나면서 생을 나눠온 이들이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언젠가 저는 기독교인들의 별명이 '덕분네'가 되면 좋겠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사는 것은 000덕분입니다'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을 보면 참 좋습니다. 그 겸허함 속에 깃든 하나님의 은총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함으로 한 해를 돌아보다가 이철수 화백의 글과 만났습니다. 

"날씨 차가워서 뜰에 내린 눈이 오래 그 자리에 있다. 마음에 생긴 상처를 보는듯하다. 한 오십년씩 살고나면 마음이 상처투성이겠지? 양지의 눈은 쉬 녹고 음지의 눈은 오래 가듯, 마음도 그럴 거라! 집에서는 가장이라고, 직장에서는 상사라고, 속내를 드러내 하소연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인생이 대부분일 거라! 마음의 뜰에서 녹아내리지 않는 눈밭이 만만찮게 넓다고 느끼는 오십대의 송년이다…기쁘고 슬픈 일 아프고 보람 있고 행복했던 것 두루 우리 재산이라고 생각해야, 연말 손익계산이나 인생 결산이 허탈해지지 않을 것 같은데?"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 <<자고 깨어나면 늘 아침>>)

화가는 양지의 눈은 쉬 녹고 음지의 눈은 녹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그늘을 떠올립니다. 누구에게나 저 사람은 괜찮거니 하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그늘이 있습니다. 목사라고 그늘이 없겠으며, 장로님이라고 그늘이 없겠습니까? 그런데 화가는 우리가 겪어낸 모든 일들을 우리 인생의 재산으로 간주하자고 말합니다. 그래야 허탈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지요. 참 공감이 많이 가는 말입니다. 

이맘때면 사람들은 망년회로 분주합니다. '잊을 忘' 망년회가 아니라 '망령될 妄' 망년회가 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시간을 새롭게 하기 위해서는 뭔가 정리가 필요하다고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허허로울수록 근본을 돌이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옛 항해자들이 북극성을 보며 방위를 잡은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골로새서의 본문은 그런 의미에서 우리 삶을 돌아보도록 도와주는 좋은 거울이 됩니다.


• 거룩한 사람

사도는 지금 성도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사랑받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일컫고 있습니다. '사람'이라는 단어에 걸리는 세 가지의 형용어구가 눈에 띕니다. '택하심을 입은', '사랑받는', '거룩한'이 그것입니다. 성도는 먼저 택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택하셨습니다. 택함을 받을 만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도권으로 이루어진 일이기에, 택함을 받았다는 것은 은총이고 신비입니다. 택함 속에 이미 내포된 것이지만,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김용택 시인의 시 구절 '당신이 나를 너무도 소중히 여겨/나는 귀한 사람이 되었답니다'라는 말과 같이,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받아 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스스로 저버리지 않는 한 세상의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바로 이 사실이 우리 든든함의 뿌리입니다. 물론 주님의 택하심을 입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우리들이지만 생의 시련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가 겪어내야 할 모든 어려움을 제거해주는 사랑이 아니라, 그 어려움을 능히 이겨낼 수 있도록 우리 속에 검질긴 마음을 심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의존만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성숙한 자유인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도는 성도를 가리켜 '거룩한 사람'이라 말합니다. 이 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합니다. 우리 삶의 실상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주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하신 것처럼, 사도는 지금 우리를 가리켜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 현실에 대한 서술이라기보다는 소명이라고 보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그런데 대체 거룩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지요? 사도는 그것을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의 삶을 특징짓는 것은 동정심, 친절함, 겸손함, 온유함, 오래 참음이랍니다. 누구를 대하든 그의 허물을 먼저 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장점과 가능성, 그리고 그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면서 그에게 공감해줄 줄 아는 사람, 상대방의 허물조차 감싸안아주는 넉넉한 마음의 사람, 누구를 만나도 중뿔나게 자기를 앞세우거나 심판자의 태도를 취하지 않는 사람, 사랑에 찬 인내로 기어이 다른 이들의 마음에 꽃이 피어날 수 있도록 해주는 사람, 바로 이런 사람이 거룩한 사람입니다.

• 함께 사는 사람

또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함을 아시기 때문에 어깨를 겯고 진리의 선한 싸움을 싸울 동료를 주셨습니다. 70년대, 80년대에 시위에 나갈 때면 두렵기도 했지만 어깨를 겯고 있는 동료들이 있어 마음 든든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다보면 알게 모르게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으며 삽니다. 우정에 금이 가기도 하고, 신선했던 사이가 진부해지기도 합니다. 결혼생활도 그렇고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늘 만나는 이들이 늘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무덤덤한 관계가 지속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대방에게서 용납하기 어려운 모습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한 공동체가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납'과 '용서'입니다.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오늘 그가 저지른 잘못을 내일 내가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심판자의 자세로 남을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형제자매의 잘못을 그 사람 자신과 동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용서는 누군가의 잘못을 눈감아 준다거나, 갈등을 무마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는 말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니오"(갈6:1). 

용서의 전문가는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초보자들입니다. 하지만 용납과 용서는 잘못을 저지른 이를 죄책감에서 풀어주는 일이기도 하지만, 부당하게 상처받고 피해를 입었다는 생각에서 우리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사도는 용납하고 용서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거기에 사랑을 더하라고 말합니다. 사랑은 완전하게 묶는 띠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철봉에 거꾸로 매달려 바라보면 늘 그렇던 세상이 새롭게 보이곤 했습니다. 시선을 바꾸면 세상은 새로운 얼굴로 다가옵니다. 산에서도 그렇습니다. 늘 다니던 길이라 해도 반대쪽에서 출발하면 새로운 경치와 만나게 됩니다. 용납과 용서에 사랑을 더할 때 우리는 새로운 세상과 만납니다. 정진규 시인의 <옹알이>라는 시를 들어보십시오. 

"아기 천사께서 옹알이를 시작하신 아침 나와 모든 것들의 사이가 한결 좋아졌다 無事通過다 옹알이는 의미도 무의미도 다 통한다 하느님은 그것만 가르쳐 보내셨다 나의 말씀들을 잠시 반납했다"

시인은 이 시의 아랫단에 "우리 집엔 지금 天使 한 분이 와 계시다. 딸이 아기를 낳았다"라고 적어놓았습니다. 아기에 대한 절대적 사랑 속에서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과 사이가 좋아졌다고 말합니다. 아기의 옹알이를 들으며 시인은 언어를 넘어서는 소통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은 이처럼 사람들을 통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 평화의 사람

성도는 또한 평화의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면 지금 내 마음을 지배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면 됩니다.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경제위기에 대해 말합니다. 앞이 내다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난감해 합니다. 옛 사람은 인생을 고통의 바다라고 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하나의 큰 파도를 가까스로 피하고 나면, 숨을 돌릴 겨를도 없이 또 다른 파도가 우리를 삼킬 듯 몰려옵니다. 세상은 마치 염려와 근심 없는 삶은 없다는 사실을 가르치려는 듯 우리를 몰아댑니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사회, 종교…어디를 보아도 한숨만 나옵니다. 

그런데도 사도는 '그리스도의 평화가 마음을 지배하게 하라'고 말합니다. 인생의 고단함을 모르는 철부지의 권고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초대교회 교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온갖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안팎의 시련이 그들을 죄어치던 상황이었습니다. 극심한 가난, 그리고 외부로부터 오는 박해로 그들은 숨 돌릴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숨 고르기가 필요했습니다. 깊이 심호흡을 하면서 들숨과 날숨에 주목하다 보면 어느새 마음이 고요해집니다. 칭얼거린다고, 조바심친다고 삶이 편안해지지는 않습니다.

나는 성경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골방에 숨은 제자들을 찾아오시는 장면을 참 좋아합니다. 문이 닫혀 있었지만 주님은 그들 가운데 스며들듯 들어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어떻게라고는 묻지 마십시오.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닫힌 마음을 열고 들어오셔서 평안을 빌어주고 계십니다. 주님은 막힌 담이나 닫힌 문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바람처럼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평화의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리고 숨을 내쉬시며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삶은 물론 힘겹습니다. 애굽 땅에 드리웠던 불길하고 음습한 검은 그림자가 지금 우리 마음을 옥죄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닙니다. 함께입니다. 내 등불이 꺼지면 불씨를 나눠주고, 넘어지면 다가와 부축해 주고, 때로는 기다려주고 때로는 이끌어주는 동료가 있는 한 우리는 낙심할 수 없습니다.

조바심만 버려도 인생은 한결 수월해집니다. 개학을 하루 앞둔 아이가 태평으로 놀고 있어 부모는 걱정입니다. 방학 숙제를 다했냐고 물으니까 천연덕스럽게 '아니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노냐고 다그치자 아이는 "내일 일은 내일이 걱정할 거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는데 왜 미리 걱정을 해요?" 하고 대꾸합니다. 아이가 잘했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느긋함이 부럽습니다. 그래요, 내일 일은 내일이 알아서 걱정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은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성도는 '다 잘 될 거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살아있음의 신비를 자각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 감사하는 사람

이제는 이야기를 간략하게 해야 하겠습니다. 사도는 우리에게 '감사하는 사람이 되라'고 말합니다. 남 탓하는 사람처럼 불쌍한 사람이 없습니다. 저는 사람을 미워하지는 않지만 간혹 고개를 돌이고 싶은 이들은 있습니다. 남 탓하는 사람, 칭얼거리는 사람이 그들입니다. 감사의 렌즈로 세상을 보면 참 편안합니다. '말씀이 풍성히 살아 있게 하라'. 

히브리의 시인은 주님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밤낮으로 율법을 묵상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길로 삼아 사는 사람에게 인생의 불황은 없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 우리 인생을 결정짓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 인생도 풍성해집니다. 성도들은 모두 사랑의 빚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은사나 깨달음은 공동체를 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합니다. 깨달음을 나누고, 서로의 지체가 되어줄 때 공동체는 든든하게 서 갈 것입니다. 

성도들은 말이든 행동이든 주님의 이름으로 해야 합니다. 이 말은 마치 주님이 하시듯 하라는 말입니다. 원주의 큰 스승인 장일순 선생님은 산란한 마음을 가지고 당신을 찾아오는 이들에게 늘 "애덕으로 해. 그러면 돼" 하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사랑과 덕으로 하라는 말입니다. 그는 말로만이 아니라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라 해도 그는 판관이 되어 그를 꾸짖지 않았습니다. 그냥 동료가 되어 주었을 뿐입니다. 그렇기에 그분과 함께 있다 보면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새 밝아지고 맑아졌다고 합니다. "그분 덕에 내가 사람이 됐어. 아주 고단수지. 마냥 따뜻할 뿐 찬 데가 없어. 늘 그래. 결국 그 안에서 녹았지, 내 망아지가!" 새 사람 된 이의 고백입니다.

송년 주일에 성도다운 삶의 근본을 돌아본 까닭은, 시간의 매듭을 잘 짓는 사람이라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너무 크게 자책하지 마십시오. 스스로를 용납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손짓에 응답하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신뢰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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