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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탄절] 구주 탄생을 기뻐할 이유 (고전 15:4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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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 1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 예수 (고전 15:45~49)
 

메시아

오늘은 성탄절을 앞두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지 살펴봄으로써 성탄절을 맞이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자세를 새롭게 하기를 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합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로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선지자나 제사장을 세울 때 그 머리에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후대로 내려오면서 메시아는 구세주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습니다. 그리스어로는 ‘크리스토스’ 인데, 우리 성경에는 ‘그리스도’라고 음역이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미는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뜻입니다. 곧 예수는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구세주가 필요한 이유

구세주가 필요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구세주(救世主)를 필요로 합니다. 온 인류에게 구세주가 필요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들이 죄와 사망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실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보면 죄의 영향력을 심대하게 받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이 같은 사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창세기 6장 5절에 보면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 대하여 ‘사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하였고, 로마서 3장에 보니 “10)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이 세상에는 법 없이도 살 수 있는 선량한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보면 때 묻은 죄인에 불과합니다. 이에 대하여 선지자 이사야는 이르기를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라고 했습니다. 선량한 자나 사악한 자나 하나님의 기준에 대어보면 오십보백보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기독교는 죄에 대하여 너무 집착한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죄의 심각성을 잘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성경이 죄의 문제를 그토록 진지하게 다루는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를 해결할 방도를 제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의사가 환자를 고치려면 먼저 그 환자가 무슨 병에 걸렸는지를 파악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병명을 정확하게 밝혀내야 거기에 맞는 치료를 행할 수가 있지, 병명도 제대로 모르고서는 제대로 된 치료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 인간의 구원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온 인류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 아래 놓여 있는 실상을 올바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죄인인 사실은 우리 자신의 생각과 행위를 보아서도 알 수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인 사실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죄인인 사실은 앞에서 말씀한 대로, 하나님의 기준에 의한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율법에 비추어 보면 죄인인 사실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윤동주 시인이 지은 서시(序詩)에 보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입새에 이는 바람에도 / 나는 괴로워했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인이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다만,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만약에 누구든 자기는 죽는 날까지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살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죄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옳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불 꽃 같으신 눈앞에는 모든 추악함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윤동주 시인과 같은 분은 천성이 선량해서 양심적으로 살려고 힘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선량한 사람도 죄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더 근원적인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첫 사람 아담의 타락

창세기를 보면, 처음 지음 받았을 때 아담은 죄가 없는 순수한 상태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모양과 형상대로 아담을 지으셨으니 그럴 수밖에요. 하나님께서는 상함도 없고 해함도 없는 아름답고 살기 좋은 에덴동산에 아담을 두어 살게 하셨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한 가지 언약을 세우셨는데,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창 2:16-17)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간교한 뱀이 아담의 아내인 하와에게 다가와서 말을 건넸습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기를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너희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 하셨느니라” 

그러자 뱀이 말하기를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었더라도, 아담은 그 죄에 동참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나님처럼 된다는 말에 그만 넘어가서 하와가 건네주는 실과를 받아먹고 말았습니다. 그러고 나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고, 하나님의 낯을 피해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로 인해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으며, 아담은 평생 이마에 땀을 흘리며 수고하며 살게 되었고, 하와는 해산의 고통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인해 땅이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온갖 질병이 생기고, 삶에 저주가 임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는 죽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결과는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단절된 것입니다. 아직도 지구상에 우상숭배가 만연한 것은 범죄로 인해 사람들이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 그 원인입니다. 

 
아담의 범죄가 후손들에게 가져다 준 결과

그리고 아담의 타락은 그에게서 태어난 후손들에게도 심각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속담과 같이, 인류의 조상 아담이 죄인이었기 때문에 그의 후손들도 다 죄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아담은 개인이면서 동시에 인류의 대표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타락은 그에게서 태어난 모든 사람의 타락과 동일시되는 것입니다. 죄가 아담으로부터 그 자손들에게로 단순히 전가된 정도가 아니라 유전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사람은 나면서부터 타락한 본성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억제력이 강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서 악행을 덜 합니다. 또한 국가의 형벌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악한 성향이 표출되지 못하도록 억제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양심과 법의 억제력만 가지고는 인간의 죄성(罪性)을 다스릴 수 없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신앙심이 좋고 정직하고 선량한 왕입니다. 백성들은 그를 성군(聖君) 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한 다윗이 중년에 큰 죄를 지었는데, 그것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은폐하기 위해 우리아를 전장의 최 일선에 보내어 죽게 한 것입니다. 얼마나 추하고 야비한 행위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다윗과 같은 경건한 인물이 어떻게 이처럼 추악한 죄를 저질렀는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다윗이 회개하지 않고 시치미를 떼고 예전과 다름없이 지냈다는 것입니다. 양심에 가책을 느꼈을 것 같은데도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그러자 그 일이 있은 지 일 년 쯤 되었을 무렵, 하나님께서 선견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냈습니다. 

나단은 다윗을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했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매우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같은 잔으로 마시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 왔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은 잡기가 아까와서, 그 가난한 집 새끼양을 빼앗아 손님 대접을 했다고 합니다."

나단의 말을 들은 다윗은 화가 나서 소리쳤습니다. “저런 죽일 놈이 있나!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나단이 말하기를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 때 다윗은 겸손히 낮아져서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고 자백했습니다. 다윗은 눈물로 요를 적시면서 회개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 때 그가 지은 시가 시편 51편인데, 거기 5절에서 그는 말하기를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는 그가 저지른 악행이 어쩌다 저지른 실수가 아니라 그가 타고난 타락한 본성이 드러난 결과하는 말입니다. 신학적으로 이와 같은 태생적인 죄성을 일컬어 원죄라고 합니다. 

아담의 범죄가 온 인류에게 미친 영향에 대하여 성경은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고 말씀합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해서 모든 사람이 죄인되었고, 그 결과 죽음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경우를 가리켜서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다’(고전 15:22)고 말씀합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한 죽음은 단지 육신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죽음과 영원한 죽음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적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단절을 의미하고, 영원한 죽음이란 지옥 형벌을 가리킵니다. 이렇게 볼 때, 죄의 결과가 얼마나 심각하고 중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언약

자,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언약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였을 때, 죽음의 형벌을 내리신 것으로 아담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마신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한 아담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죄는 미워하시나 범죄한 인간은 여전히 사랑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의 운명에 처한 인간들을 위해 살 길을 열어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하나님께서 하와를 꾄 뱀을 저주하신 말씀 속에 계시되어 있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메시아에 대한 최초의 약속으로서, 여기 언급한 ‘여자의 후손’은 메시아를 가리키고, 뱀은 사단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약속은 장차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이 땅에 메시아를 보내실 터인데, 그가 와서 사단을 멸하고 인생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담은 비록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수고로운 삶을 살게 되었지만, 메시아에 대한 약속을 믿고 소망 가운데 살았을 것입니다. 첫 아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을 때에도 아담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기대감으로 슬픔과 절망을 이겨냈을 것입니다. 아담은 장차 메시아가 오셔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목숨을 희생하실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은 이 메시아 신앙을 아벨에게 전수해 주었습니다. 이는 아벨이 어린양을 잡아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 것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아버지 아담의 가르침을 비웃고 저 좋은 대로 땅의 소산을 제물로 바쳤다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을 당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전수된 메시아 신앙은 노아에게까지 계승되었는데, 이는 홍수 심판 후에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하나님을 위하여 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과 정결한 새를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린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창 8:20). 선민의 조상 아브라함도 마찬가지로 짐승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짐승을 제물로 바쳤다는 것은 곧 피의 제사를 드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에 짐승의 피가 반드시 포함되었던 것은 메시아의 대속을 상징한 것입니다. 
 

언약의 성취

그리고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메시아로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능력으로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셨으므로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땅에 오신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으로 잉태되셔서 탄생하신 이유는, 타락한 아담의 본성과 상관없는 무죄한 인성을 취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인은 구세주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완전한 신성과 완전한 인성을 아울러 가지신 분이십니다. 다시 말해서,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완전하신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여자의 후손’이라고 한 것은 예수님의 인성을 중시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범죄한 인류를 대속하실 메시아는 죄 없는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그의 인성이 고난을 받으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온 인류를 대신해서 죄 값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 사함을 받아 의인의 자격을 얻고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되어 영생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인류의 대표이신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의 죽음으로 인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타락 시에 적용되었던 원칙이 똑같이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같이 말씀합니다. 

“17)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노릇 하리로다 18)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7-19)

아담이 인류의 대표인 것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인류의 대표로 오셨습니다. 이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 이르기를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 보면, 아담을 첫 사람이라고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합니다.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은 첫 아담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마지막 아담입니다. 두 분 다 인류를 대표합니다. 

그러나 역할이 정반대로 다릅니다. 첫 사람 아담은 타락해서 그의 후손들을 모두 다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믿는 모든 사람을 죽음에서 살려내셨습니다. 첫 사람 아담은 단지 살아있는 영적 존재에 불과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을 살려주시는 영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새로운 피조물

자연인은 누구나 본디부터 아담에게 속한 죄인이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이제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자가 아니라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가 되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인류의 조상이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듭난 성도들의 조상이 되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다름이 없지만, 영적으로 볼 때에는 천양지차가 있습니다. 이 둘은 본질적으로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이르기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한 것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했습니다. 낡은 집을 리모델링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부수고 다시 지은 것과 같습니다. 녹슬고 부서진 놋그릇을 용광로에 넣고 녹여서 새 그릇을 만들어낸 것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비유로도 새로운 피조물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합니다. 그것은 낡은 집이나 새 집이나 본질이 같고, 깨진 놋그릇이나 새로 만든 놋그릇이나 본질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이 된 성도들은 이전의 자신과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하여 고린도전서 15장 46절 이하에 보니, 첫 사람 아담은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이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신령한 자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지만, 둘째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나셨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누구의 자손이 되느냐에 따라서 육에 속한 자냐, 신령한 자냐가 결정됩니다. 누구에게 속했느냐에 따라서 흙에 속한 자냐, 하늘에 속한 자냐가 결정됩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 속한 사람은 결국 죽어 흙으로 돌아가고 말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속한 자 곧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처럼 장차 성도들도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구주 탄생을 기뻐할 이유

사랑하는 성도님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 곧 메시아이십니다. 성탄절이 기쁘고 즐거운 이유는, 아담으로부터 수천 년 동안 인류가 고대하던 구세주가 오신 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생명의 빛을 비추어 주시고, 마귀에게 매여 종살이하는 인생들을 풀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책에 눌려 있는 인생들을 해방시켜 의롭게 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 모든 은총을 받아 누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처럼 큰 행복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살이에 바빠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신령한 축복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을 그 즈음에,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경건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평생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살아왔는데, 요셉과 마리아가 결례를 행하려고 아기 예수를 안고 성전에 들어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시므온은 성령의 감동으로 그 아기가 고대하던 메시아이심을 알아보고는 다가와 아기를 품에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29)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구세주가 오신 것을 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시므온보다 더 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것은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 사역을 보지 못하고 죽었으나, 우리는 주님께서 이루신 구원에 대하여 소상히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시므온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한 마디도 듣지 못했으나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서 주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알고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목적을 잘못 알고 있는 신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 믿고 구원 받는 것보다는 이 땅에서 받는 축복을 더 갈망합니다. 그러나 성도님들께서는 물질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말씀한 바와 같이 영혼의 구원을 비롯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누리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 시므온처럼 큰 기쁨과 감격으로 이번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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