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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대림절] 예수님을 대망하며 삽시다 (눅 2:2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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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대망하며 삽시다 (눅 2:25~35)

  
12월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리는 성탄절이 있는 달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성탄일 전 4주간을 대림절이라고 부릅니다. 대림절은 주후 4세기경 초대교회에서 지켜지기 시작하였는데, 성탄절 4주 전부터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입니다. 그런데 7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초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서의 의미가 추가되었습니다.  
  
대림절을 뜻하는 '애드벤트(Advent)라는 말은 '오다' '도착하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원래 이 말은 로마 제국에서 신적인 명예가 주어진 황제가 즉위한 후에 여러 도시들과 지역을 방문할 때, 황제의 방문을 '그분의 방문' (His Advent)이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우리의 주님이요, 진정한 황제라고 생각한 초대교회 교인들은 이 말을 '구세주의 오심' 이라는 의미로 바꾸어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대림절에는 두 가지의 중요한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대림절은 그리스도께서 과거에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에게 오신 은총을 감사하는 절기입니다.  
둘째로, 대림절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고 기다리는 소망의 절기입니다.   

대림절은 소망의 절기이며, 이 기간 동안 우리는 다시 오셔서 온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당신의 통치를 세우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대하고 우리의 삶을 새롭게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누가복음의 처음 몇 페이지는 기다리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 마리아와 요셉, 시므온과 안나는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저 수동적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인 것처럼 매일 매일 하나님께 적극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시므온은 절망에 이끌리지 않고 성전으로 들어가게 하신 성령에 의해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가 약속된 메시아인 아기 예수를 보았을 때 드린 찬양은 하나님께 대한 끈기 있는 소망을 보여주는 한 예로 울려 퍼집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눅 2:30-32).

여러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주가가 오르기를 기다립니까? 자녀들이 빨리 성장해 주기를 기다립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립니까?  기다림이 없는 사람은 참으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기다릴 것이 없으므로 쉽게 절망하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행복은 대체로 미래 지향적인 대망에 관계합니다. 인생에 있어 오늘 당장 어떻게 살고 있느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내일 어떻게 살게 되느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래에 대한 소망을 품고 기다릴 것이 있느냐,  약속이 있느냐, 즉 미래에 대한 보증이 있느냐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합니다.
  
그런에 문제는 약속이  있기는 하나 진실한 약속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더 허무한 일입니다. 이것을 성취라고 합니다. 약속에는 성취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다림에는 현실로 나타나는 사건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없다면  전부가 거짓이 되고 맙니다. 성취없는 약속을 기다렸던 사람들에게는 절망과 낙심을 안겨 줄 뿐입니다. 비없는 구름같고, 어린아이들이 무지개를 따라가는 것처럼 성취가 불가능하다면 그 약속과 기대와  소망은 무효가 되고 맙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약속이 성취되고 축복이 현실로 나타났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성취와 축복이 내게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만일에 내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전히  허탈과 절망 중에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내게 주신 약속이 오늘 여기서 성취된 것을 믿지 않는다면 이것 역시 의미가 없고 여전히 좌절 속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메시아와 메시아 나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그들이 경험한 모진 고난을 다 이길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그리고 메시아는 지금 유대 땅에  오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저들은 몰랐습니다. 그리고선 좌절합니다. 또  어떤 때는 메시아를 보았습니다.  그리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니 때로는 믿었습니다. 큰  기적이 나타날 때마다 아! 굉장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권고하셨다고 감사하며, 찬양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곧  그 믿음을 저버리고 맙니다.  

왜 메시아를 믿을 수 없는 것입니까?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왜 그들이 예수를 알 수가 없었느냐 하면 그들은  자기 사랑에 도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대로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자기 사랑과 자기 교만에 취해 있었기 때문에 예수를 알아볼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어떠합니까? 때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신앙으로 감격하여 모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기뻐하며 찬양합니다. 그러나  곧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가 아니면 나를 버리셨는가 하며 믿음을 저버리며 원망을 합니다. 꼭 종이장을  뒤집듯이 변덕이 심합니다. 왜 이렇게 시원찮은, 휘청거리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누가복음 2장을 읽으며  왜 많은 사람들중에서 시므온에게만 아기 예수를 안아보는 기회를 주셨을까? 하고 생각이 모아집니다. 모든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기다렸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만났어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크게 기뻐했습니다. 하나님께 인정받았습니다. 우리는 시므온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의롭고 경건하게 기다려야 합니다.
  
아담 이후 구약 시대에  경건한 믿음의 성도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메시아를  자기 생전에 맞이하는 축복을 소원하였는데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과 다윗을  비롯한 기라성 같은 믿음의 선진들도 그같은 축복을 멀리서 바라보고 믿음으로 기다리기만 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누구든지 약속하신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큰 영광과 축복을 받은 사람임에 틀림이  없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아기 예수를 성전에서 영접한 나이 많은 노인 시므온이라는 성도입니다.
  
시므온은 침례 요한의 아버지와 같은 제사장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그 가문이 어떠하며 배운 지식과 소유가 어떠한지 전혀 알길이 없는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아니한 무명의 평신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상고한 성경 말씀에서 인류의 구세주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결부되어 메시아를 영접한  사람들의 공통점 중에 하나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비롯하여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모두 하나님앞에서 의로운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시므온도 역시 예외가 아니었으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눅2:25)라는 말씀과 같이 의롭고 경건한 믿음의 소유자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앞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의롭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법인데 구약  시대에 때때로 의로운 사람이라고 일컬음을 받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전혀 죄가 없고 완벽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1) 이웃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믿음안에서 의롭게  살고자 소원하며 힘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2) 하나님앞에서는 믿음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소원하며 힘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같은 마음들을 다 가지고 있으면서도 문제는 그러한 삶이 일평생 동안 지속되지 못하고 도중 하차하는 경우가 많다는것인데 시므온은 나이 많아  늙도록 변함이 없이 하나님앞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살고자 힘썼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제사장이었기 때문에 마땅히 일평생 늙도록 변함없이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시므온은 무명의  사람으로 책임감때문에 마지  못해서가 아니라 참된 믿음에서 우러나온 것이었기에 더욱 귀한 믿음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된  축복은 인생 말년까지 물질적으로  어렵지 않게 살아가며 건강하게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시므온처럼 믿음으로 의롭고 경건하게 사는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시므온처럼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왔다면 비록 가난하다할지라도 그보다 더 귀한 축복이 없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바로 의롭고 경건한 노인들에게는 백발이  인생의 허무함만을 더해주는 서리가 아니라 젊은이들조차 부러워 해야만 할 영광의 면류관이 될 것입니다.

  
2.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려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스라엘 땅에 오실 당시 이스라엘은 여러가지 점에서 최악의 상태였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로마 제국에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로 헤롯왕의 무자비한 독재 때문에 백성들은 더욱 경제적으로 빈핍하였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바리새인들을 비롯하여 형식화 된 율법주의가 외식을 낳고  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사두개파, 엣센파로 갈갈이 찢겨져 백성들은 영적으로 심히 피폐한 상태에 있었으며  하늘에서 기적이 일어나지 아니하는 한 영육간에  해결 할 수 없는 깊은 딜렘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같은 상황에서 유일한  위로와 소망이 있다면 그것은  구약 시대 오래전부터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세주를 기다리고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너희  하나님이 가라사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사40:1)고 한 말씀과 같이 오직 메시아가  오시면 어둠은 빛으로 바뀌며, 슬픔은 기쁨이 되고 절망은 소망이  될 것을 기대하고 믿음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참된 구원과 위로가 되시는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으니 나이 많은 시므온도 바로 그중에 한  사람으로 역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 이 위로는 곧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구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참 영원한 자유를 가져다 줄 약속하신 메시아를 기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며 상처를 받을 일들이 참 많습니다. 온갖 어려움을 만나게 되고 잘 극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위로받기를 기대하지만 실망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고통을 만날 때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만날 때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조용히 성령님께 자신을 맡겨 어루만져 주시기를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3. 성령의 감동에 민감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형식화 된 종교 의식을 준행하면서 하나님께 절기를 지키며 누구보다  잘 믿는 사람들처럼 보였으나 진정 초림의 메시아를 영접한  시므온이나 안나와 같은 사람은  일평생 동안을 하루같이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구원할 메시아 오시기를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헤롯왕이나 당시 제사장들이나  바리새인들은 이같은 축복을 받지 못하였고 오히려  사단의 편에서 오히려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를 대적하는 일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자신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을 잘 믿는 줄로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결코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처럼 외적인 종교 의식의  준행으로 평가하려고 하지 말고 내적인 경건과 재림의 주님을 간절히 대망하는 기다림의 믿음이 있는지 돌이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이처럼 나이 늙도록 변함없는 믿음으로 살다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전 인류의  구원과 위로와 소망이 되시는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는 축복에 참여할 수 있게된 가장 근원적인 비결은 무엇일까요?
  
인간의 능력이나 한계는 사람마다 다소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근본적으로 다른 사람은 없는데  시므온과 안나가 이처럼 나이  늙도록 일평생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었던 근원적인 신앙의 원동력은 시므온이 남달리 특별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 비결은 바로 
  
1) 시므온이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하)는 말씀처럼  성령이  지속적으로 함게 하셨으며
2) 시므온 자기 멋대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26하)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라는 말씀처럼 성령의 지시를 받고
3)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눅2:27상)라는 말씀과 같이 성령의 감동을 소멸치 아니하고 성전 중심으로 살아간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같은 시므온의 모습을 통해 배워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믿음의 성도는 자신이 하나님앞에서 무슨 직분을 받았느냐하는 책임과 의무감이 아니라 시므온처럼 성령의 임재하심안에서  살아갈 수 있기를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림의 주님을 영접한 시므온처럼 재림의 주님을 기다리며 의롭고 경건하게 오늘을 살아가기 바랍니다.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며 주님을 만나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특별히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심을 확신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며 특별히 성령의 감동을 충만히 받는 성령의 사람들이 다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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