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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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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백성을 위로하라 (사 40:1~11)


1. 한창 성공 가도를 달리던 잘 생긴 한 남자가 가족과 함께 여름휴가를 갔다가 찬물에 빠져 하반신 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39세 때입니다. 휠체어에 의지하지 않고는 도무지 생활할 수 없었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사랑하는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보, 아직도 날 사랑하오?”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난,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의 인격과 삶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아내의 사랑과 위로의 말에 힘을 얻은 그는 하반신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에 출마하여 당선되었습니다. 바로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입니다. 

그는 1933년 미국 대공황의 어려움 속에서 대롱령에 당선되어 뉴딜정책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였고 그 업적으로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기까지 네 번이나 연속으로 대통령에 당선한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으로 성공하기까지, 그의 아내 엘리너(Anna Eleanor Roosevelt)의 내조가 절대적이었습니다. 부인 엘리너는 항상 낙관적인 사고방식과 밝은 표정으로 남편을 즐겁게 하였다고 합니다. 

열 살때 고아가 된 그녀는 얼마나 힘들고 가난한 생활을 하였는지 돈을 가리켜 "engraved paper"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땀과 눈물로 조각된 종이” 라고 말입니다. 그녀는 루즈벨트와 스무살에 결혼하여,  6남매를 두었는데 한 아이가 자신의 눈앞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때 자신을 위로하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들이 아직도 다섯명이나 있어"
하면서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하였다고 합니다.

여러분, 옆에 누가 있느냐 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보고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그런 친구들이 몇이나 있습니까?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을 친구는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을 함께 볼 가족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되고 성공하였을 때, 그 기쁨을 함께 나눌 친구들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실패하였을 때, 진정으로 여러분을 찾아와서 따뜻한 위로의 말이라도 한 마디 해줄 수 있는 친구가 몇이나 됩니까? 
나아가서 여러분의 마음 속 깊은 아픔과 슬픔, 여러분의 맺힌 한, 여러분의 마음 속의 비밀스런 고통을 함께 나눌 사람이 몇이나 있습니까?
의외로 몇이 없습니다. 아니 거의 없는지도 모릅니다. 요즘 사회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 위로도 잠시 잠깐 뿐입니다. 곧 떠나갑니다. 영원한 위로가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경 전도서 4:1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여러분, 진정한 위로자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그분은 잠시 잠간 우리곁에 오셔서 위로하고 떠나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여러분 곁에 서서 여러분과 함께 계시며 여러분을 위로하고 계십니다.  


2. 오늘 이사야 40장에서는 하나님께서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이스라엘 백성이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할 때 하나님께서 주신 메시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백성이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백성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기고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그렇게 받고 있는데도 왜 하나님을 떠나 살까? 구약성경을 읽으면서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부분이지만, 오늘 내 모습을 보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녀이지만, 나도 모르게 이 세상에 살다보니까, 좀 더 좋은 것을 갖고 싶고, 좀 더 유명해지고 싶고, 좀 더 잘 살려고 하다보니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며 살아오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범죄한 우리 조상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죄의 본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은 범죄한 결과 하나님의 벌을 받아 나라가 망하여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것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남의 나라에서 노예살이하는 그 백성의 마음을 이해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노예로 고통당하는 자기 백성을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몸이 안 좋아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선생님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집에서 좀 쉬시면 곧 낫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한 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시는 위로의 말씀이 이것입니다. 
2절 “너희는 정다이 예루살렘에 말하며 그것에게 외쳐 고하라.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그 모든 죄를 인하여 여호와의 손에서 배나 받았느니라 할찌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포로생활하는 것을 복역이라고 했습니다. 감옥에 갇힌 것처럼 표현했습니다. 그 복역의 때가 이제 끝났다, 그 죄값을 다 치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고통의 세월이 끝난다는 것, 이것이 실질적인 위로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진정한 위로는 용서받을 때 옵니다. 

우리가 오늘날 힘들어 하는 원인은 여러 가지 있을 수 있습니다. 
사회경제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금융위기의 한파가 몰려 왔기 때문에 우리가 모두 힘듭니다. 주위 사람들 때문에 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내가 잘못해서 고생하는 경우 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가 지은 죄 때문에 당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어떤 형태로든, 분명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에 오는 고통입니다. 나의 죄이든, 다른 사람의 죄악이든, 그것 때문에 인류는 고통당합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마땅히 내가 감당해야지만,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은 내가 져야 할 십자가 인 것입니다. 

저는 어제 밤에 꿈을 꾸었는데, 이 꿈은 보통 꿈이 아니라 소위 영몽이었습니다. 제가 그 꿈을 꾸고는 깨어서 도무지 잠을 계속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 꿈이 워낙 충격적이라 이리 저리 아파하고 고민하다 일어나서 이제 그 꿈을 받아 적어봐야 하겠다고 생각했는데 알람이 울렸습니다. 새벽 4시였습니다. 즉시 일어나 교회로 나와 꿈 내용을 적어보았습니다. 

제가 교복을 입고 교실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교실이 소위 문제를 일으킨 학생들만 모아놓은 교실이었습니다. 알고 보니 세 번 교칙을 어기면 이 교실에서 일정기간 동안 공부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벌 받는 것이지요. 저는 너무 충격적이었습니다. ‘난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언제 세 번이나 죄를 지었나.’
저는 늘 스스로 모범생이라 생각했습니다. 학교에서도 말 잘 듣는 학생이었습니다. 부모님 속 썩인 일도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교회도 잘 다녔습니다. 그리고 벌 받는 그 교실에서도 제 가슴에 훈장 같은 것이 달려 있었습니다. 그 훈장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이 훈장을 달고 벌을 받고 있다니. 
그런데 이미 그 교실에 와 있는 아이들을 보니까 다들 잘 난 친구들이었습니다. 공부도 잘 하고, 얼굴도 잘 생겼고, 재능도 많은 친구들, 부잣집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거기에 와 있는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거기에서도 그들은 깔깔 웃으면서, 농담도 하면서 있는 것입니다. 

꿈에서 깨어나 뒤척이면서 내가 뭘 잘못했나 생각하는데, 제 머리에 떠오른 것이 교만이었습니다. ‘잘 났다고 생각하는 교만, 나는 남들처럼 그런 죄를 짓지 않는다는 교만, 나는 착하다는 교만.’ 교만의 뿔이 여러 개 나 있었던 것입니다. 나도 모르게 잘못한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이 모르지만 나 혼자 지은 죄들이 생각났습니다. 

목양실에서 정리하면서 “주님, 죄인입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의 교만을 용서하옵소서. 저의 더러운 죄를 씻어 주옵소서. 용서하옵소서. 주님. 용서하옵소서. 주님.”
울면서 기도하고 설교 원고를 타이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당신은 죄인이요” 하는 말입니다. 믿는 우리도 가장 듣기 싫어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듣기 싫어하는 죄를 위하여, 저와 여러분을 대신하여 십자가 형벌을 받고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그 복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의 사함을 입었느니라.”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절의 의미입니다. 

헤밍웨이의 단편 중 <The Capitol of the World(세속의 신전)> 이 있습니다. 스페인을 배경으로 한 소설입니다. 어느 엄한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는 십대의 아들과 사사건건 충돌을 합니다. 아버지의 시각으로 볼 때에 그 아들이 하는 일은 뭐든지 못마땅합니다. 계속 충돌한 나머지 아들은 집을 나가 버립니다. 아들이 가출하고나서 아버지는 몹시 괴롭습니다. 아들을 용서하지 못한 아버지는 절대로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집나간 아들을 용서하고 아들과 화해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찾아 전국을 헤매다가 마지막 휴양지 마드리드에서 지방지 신문에 광고를 냈습니다. 
"파코! 화요일 정오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예정한 시간, 화요일 정오에 호텔에 가보았더니 무려 800명이나 되는 젊은이들이 모였더랍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기다리는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아빠의 용서를 기다리는 파코라는 이름을 가진 젊은이들이 이렇게 많았습니다. 

'아빠는 너를 용서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여기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여기 무슨 시비가 있습니까? 무슨 이유가 있고…. 아무 변론이 없습니다. 거저 용서했다. 내 사랑으로 너를 용서한다. 내가 너를 다 용서했다. 돌아오라.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께 용서받을 때, 우리에게 참된 위로가 임하는 것입니다. 
다 용서했으니 돌아오라, 이것이 우리에게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용서받음으로 우리는 밝은 얼굴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3. 용서하러 오시는 주님, 그분의 용서를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너희는 광야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주님이 오시는 길을 예비하는 것입니다.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예비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길을 평탄케 하는 것입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높은 마음, 교만한 마음은 낮추어야 합니다. 

6-8절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론같은 이 땅의 교만한 자를 낮추십니다. 그 풀이 마르고 아름다운 영광은 시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골짜기처럼 자신을 비하하며 열등감 속에 사로잡혀오신 분들,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라며 자존감을 잃은 분들이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당신을 무조건 사랑한다는 사실, 현재 모습 그대로 용서해준다는 사실, 그만큼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아들이요 딸, 지극히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자존감을 회복하십시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긍지를 가지십시오. 그리하여 평탄하게 하는 것, 이것이 성탄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교만을 낮추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존감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9절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

너희 하나님을 보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러 오시는 하나님을 보십시오. 그분은 앞으로 강한 자로 다스릴 것입니다. 그분께는 상급이 있고 보응이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양무리같이 먹이시고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이 모습은 바벨론에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들을 데리고 그들을 품에 안고 고국으로 돌아오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상력을 동원하여 그린 것입니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해방시켜 광야를 거쳐 가나안으로 돌아오게 하신 것을 다시 생각나게 해줍니다. 

신1:31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안아주십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우리를 안고 건너가십니다. 

사46:3-4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찌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너희가 노년에 이르기까지 내가 그리하겠고, 백발이 되기까지 내가 너희를 품을 것이라. 내가 지었은즉 안을 것이요, 품을 것이요, 구하여 내리라.”

주님 오심을 준비하는 대림절, 성탄을 앞둔 이 시기에 고통당하는 우리, 상처입은 우리, 실패한 우리를 안으시는 하나님, 품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사랑, 위로를 받아들입시다. 

어느 중년 남자가 일주일동안 해외여행을 갔습니다. 해외 출장을 갔는데 갈 때 생각은 아침저녁으로 전화를 걸어서 아내에게 문안을 해야겠다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도착하자마자 '잘 왔습니다' 한마디 해놓고는 그만 이래저래 출장 간 일이 바빠서 전화를 한 번도 못 걸었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다가 이제 내일이면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니까 좀 미안한 마음도 있고 해서 전화기를 손에 들고 생각하기를 '당신이 보고 싶었소. 여보,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렇게 말하리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수화기를 딱 들고는 하는 말이 "집에 아무 일도 없어? 애들은 다 잘 있소? 강아지도 잘 있고? 난초에 물은 주었소?" 여기까지 얘기를 했어요. 잠시 후에 아내는 "당신, 해도 너무합니다!" 울먹이면서 전화를 끊었습니다. 

여러분, 이 부인이 듣고 싶은 말이 무엇입니까? 
강아지, 난초까지 챙기면서 제 부인은 챙기지 못한 겁니다. 다 챙기면서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이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왜 힘듭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것입니까? 
사랑을 잃어버렸습니다. 따뜻한 위로를 잃어버렸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신 여러분, 이제 옆의 분들에게, 이웃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십시오. 그들을 위로하십시오. 안아주십시오. 안아주면서 “사랑합니다” 라고 말씀하십시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아이는 안아주면 건강하게 자라고 어른은 안아주면 위로와 평안을 누린다고 합니다. 옆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십시오. 
안아줄 때,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을 통하여 옆 사람에게 전달될 것입니다. 
(오재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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