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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요나와 하나님의 마음 (욘 4: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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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와 하나님의 마음 (욘 4:1~11)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서울을 가던 길이었습니다. 그 전철에 어떤 엄마가 3살 정도 된 어린아이를 데리고 탔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뭐가 맘에 안 드는지 계속 칭얼대며 엄마를 힘들게 합니다. 

엄마가 승객들에게 미안하니 고만하라고 야단을 칩니다. 그러자 이 아이가 난폭하게 변합니다. 씩씩거리며 자기 엄마를 때리고 머리카락을 잡아당기고 합니다. 

제가 옆에서 도저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야단을 쳤습니다. 

“떼끼 이놈, 아저씨가 침 준다.” 했더니 나를 향해 “이~씨”하고 손을 들고 덥벼 듭니다.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엄마가 야단을 치니 더 난리를 치고 자기 엄마를 향해 욕설을 합니다. 결국 그 엄마는 창피해서인지 몇 정거장 못가서 아이를 데리고 내렸습니다. 

제가 거기서 아이 엄마를 보면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왜 아이들을 저렇게 기를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래도 좋게 보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러다가 한편으로는 ‘엄마기에 그럴 수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엄마는 자식이 아무리 못되었어도 다 받아 줍니다.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짓도 용납합니다. 그게 엄마입니다. 

너도 어릴 적에 저렇게 컸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어린아이가 가정교육에 문제가 있어서 그럴 수도 있으나 엄마의 사랑이 모든 것을 받아 주기에 그 아이가 그럴 수 있겠구나 생각을 해봅니다. 부모의 사랑 속성 중 가장 위대한 것은 커다란 기대 속에서 모든 것을 용납하시고 그리고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고 인내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속성 중 가장 위대한 속성은 ‘사랑’이고 그 사랑의 실천으로 ‘용서와 용납’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인물들이 상당수 됩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짓을 합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이상하리만큼 용납합니다. 

하나님의 그 위대한 사랑이 구약성경 호세아에 나타납니다. 호세아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보여 주는 성경입니다. 호세아의 부인이 집을 나가 아이를 배서 들어옵니다. 그래도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 것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한도 끝도 없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십니다. 

또 다윗 왕을 용서하시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기꾼인 야곱을 축복하시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탕자의 비유에서 둘째 아들을 받아 주시는 장면과 첫째 아들을 설득하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장면은 오늘 봉독한 요나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가 심하게 토라졌습니다. 
1절을 보세요.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내며”라고 했습니다.  

왜 이렇게 토라졌는가요? 요나가 지금 성내고 토라질 상황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단단히 토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전혀 합당치 않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 입장에서는 요나가 화를 내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큰소리치며 화를 냅니다. 심지어 3절에 보면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라고 히며 큰소리를 칩니다.  

어쩌다 요나가 이 모양이 되었을까요? 그런데 더 놀랄 만한 것은 하나님은 요나가 어린 아이같이 투정부리고 난리를 치는데도 그대로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요나를 어르고 달래며 설득하십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요나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1. 요나의 마음은 어떤 것일까요? 

요나는 왜 그렇게 토라졌을까요?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못마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요나의 말대로 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셨습니다. 그리고 심판을 취소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요나가 토라질 일인가요? 요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주 못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왜요? 

1) 자기 체면을 구겼다는 것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이 전하라고 한 대로 가서 외쳤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발적으로 간 것은 아닙니다. 물고기 뱃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회개는 했으나 자원해서 가진 못하고 마지못해 간 것입니다. 

어떻든 그는 니느웨로 갔습니다. 가서 외쳤습니다. “40일이 지나면 무너지리라” 외쳤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니느웨 사람들이 그 외침을 듣고 대대적으로 회개합니다. 심지어는 왕도 왕복을 벗고 잿더미 위에 앉아 회개합니다. 

백성들에게 조서를 내리게 해서 전국적으로 모든 백성과 짐승들도 회개운동에 동참시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는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합니다. 자기같이 못난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 것을 찬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요나는 정반대 모습입니다. 어찌합니까? 
매우 싫어하고 성을 냅니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합니다.  

왜일까요? 자기 체면이 구겨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약속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인 선지자라는 직분을 가지고 외쳤는데 하나님이 그 체면을 구겨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화딱지가 난 것입니다. 안가겠다는 사람 억지로 가서 외쳤는데 하나님은 자기가 외친 말대로 이루어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고 싶다고 떼를 쓰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나는 다른 사람의 영혼보다는 자기 체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상관없습니다. 자기 명예, 자기 체면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성도가 있습니다. 
남이야 예수를 믿든 말든 나는 체면구기는 전도는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를 못합니다. 

그래서 전도를 아예 나가질 못합니다. 어쩌다 한번 전도하다가 욕을 한번 얻어먹으면 식식거리며 화를 냅니다. 그러나 내가 욕을 먹을지라도 내 체면과 자존심이 구겨질지라도 영혼이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으로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5:11~12을 아시지요? 
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아멘?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주의 일을 하다가 욕을 먹으면 견디기 힘이 듭니다. 누가 뭐라 한마디 비판하면 분하여 잠이 오질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십니다. 하늘의 상이 크다고 하십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에 자존심과 체면을 내버려야 합니다. 다 내려놓으시기를 바랍니다. 교회 와서는 세상 직분과 배경도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만약 그런 것 가지고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가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용서가 맘에 안 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불의를 심판하시고 공의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저 불의한 니느웨 사람들을 심판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마땅히 심판 받을 놈들인데 왜 용서하시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는 이것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불의한 자를 심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기도 하지만 반면에 죄를 회개한 자를 한없는 사랑으로 용서하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사랑과 공의가 공존합니다. 

어떤 분은 그렇게 말합니다. “구약의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고 신약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라고 하지만 그것은 잘못 본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신약에서도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만약에 하나님에게 공의만 존재한다면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 아무도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만이라면 그 사랑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만난 곳입니다. 죄를 향해 무서운 심판을 향하시는 하나님의 공의, 그러나 또한 죄인을 독생자를 버리시면서 까지 용서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십자가에 있습니다. 

그 공의와 사랑이 여러분에게도 임해 있음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요나는 이 사랑의 하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해 감히 성을 내는 어린아이 같은 짓을 하는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 만이었다면 요나는 벌써 바다 속에 수장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바다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도망치려고 일어서는 그 순간 능지처참 되었을 것입니다.  

그것도 모르고 하나님의 공의만을 주장하며 화를 내고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결국 요나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것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하나님에게 화도내고 죽여 달라고 떼를 쓰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깊이 알아 하나님의 깊은 뜻을 헤아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마음은 어떤 것인가요? 

왜 하나님은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를 하자 뜻을 돌이키신 것일까요? 

그리고 요나가 하나님을 향해 화를 내고 어찌하나 보자 하실 때 그를 그냥 두시는 것일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고귀하신 마음이 있습니다.  

1) 회개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인간의 고통과 아픔은 무엇 때문일까요? 죄 때문이라 합니다. 그 죄 때문에 사람들은 온갖 고통을 겪고 결국은 망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인간의 문제의 배경에는 죄가 있습니다. 그래서 심판이 찾아 온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보세요. 

인간의 문제는 죄 자체가 아닙니다. 그 죄를 알고도 회개치 않음이 문제요,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회개치 않음이 문제입니다.  

창세기를 보세요.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한 이후 그들을 그냥 쫓아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찾아 오셔서 묻습니다. 왜요?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유감스럽게도 그 기회를 놓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며 책임을 전가합니다. 

하와도 그랬습니다.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그들은 회개를 하지 않고 책임을 전가함으로 기회를 놓치고 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초대교회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의 감동으로 땅을 팔아 바치려 합니다. 그런데 돈을 손에 넣고 보니 욕심이 생겨 일부를 감추고 일부로 전부인 것처럼 바칩니다. 그도 베드로가 질문할 때 회개할 기회를 놓치고 결국 베드로 앞에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이유는 죄 때문이라기보다는 죄를 회개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차이점도 여기에 있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잡은 베드로는 위대한 사도가 되지만 놓친 가롯 유다는 지옥에 들어갑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든지 회개하면 용서하십니다. 그러기에 다윗 같은 이도 회개함으로 그 엄청난 죄를 해결 받은 곳입니다. 

죄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죄 가운데 태어났고 죄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그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그를 대신 십자가에 죽이셨습니다. 

그러기에 죄를 깨닫고 돌이키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용서하십니다. 회개하면 됩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니느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요나가 치를 떨 정도로 악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고 그들에게 내리기로 작정하셨던 심판의 뜻을 돌이키신 것입니다.   

여기에는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상관없습니다. 아무리 악한 강도도 회개하면 받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회개한 영혼을 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시기도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을 아주 소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믿는 영혼 한사람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2) 못난이 요나를 설득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도 철이 없고 앞뒤가 꽉 막힌 요나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오히려 인내하시며 설득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마치 아비가 철모르는 어린 자식을 설득하고 자상하게 설명하는 것 같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설득 장면을 자세히 보세요. 
먼저는, 요나의 성냄의 부당함을 설명하십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하시니라,” 9절에도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넝쿨로 말미암아 성내는 것이 어찌 옳으냐” 하십니다.  

두 번씩 부당함을 지적하십니다. 
요나는 니느웨가 어찌되나 니느웨 동편에 언덕에 올라가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요나의 움막에 박넝쿨을 준비하셔서 그늘을 지게 합니다. 그러다가 벌레를 준비하셔서 넝쿨을 갉아 먹게 합니다. 그리고는 뜨거운 동풍을 불게하여 그 넝쿨을 말리십니다. 그러자 요나가 성질을 냅니다. 그때 하나님이 “네가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하시며 요나의 성냄의 부당함을 이해시킵니다. 

요나는 박넝쿨을 위하여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심는 수고도 하지 않았고 배양도 안했고 물도 한방을 주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준비하셨고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하룻밤에 속성으로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요나가 성질을 내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는 화를 내고 하나님께 대듭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요나가 성을 낸 기준은 자기 기분입니다. 자기 주관적 기분에 맞으면 옳고 기분에 안 맞으면 스트레스를 받아 성질을 부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성냄이 자기 기분에 의하지 않고 하나님 중심적인 기준을 가져야만 하나님 앞에 합당한 것입니다. 
   

둘째로 요나의 가치관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은 요나의 아끼는 것과 하나님이 아끼는 것의 비교하여 교훈하십니다. 
요나는 하룻밤에 나왔다 하룻밤에 망한 박 넝쿨을 아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좌우를 분별치 못하는 12만 명이 살고 있는 니느웨 성과 백성을 아꼈습니다. 

여러분의 가치관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요나 같이, 자기를 위한 물질, 잠시 있다가 없어지는 무가치한 식물을 아꼈던 그런 모습으로 가치를 부여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요나의 문제점은 잘못된 가치판단입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더 소중하게 여기고 계십니까? 잠깐의 것입니까? 영원한 것입니까? 

잘못된 가치관을 가지면 그것이 우리를 힘들게 하고 그것이 우리를 세상에 매이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축원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하나님의 관심사처럼 영혼에 가치관을 두고 영혼구원을 위해 살아가는 성도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니느웨에 있었고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우리도 영혼구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주님의 지상의 삶과 섬김은 죄인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나를 잠시 잠간 즐겁게 하는 물질보다 하나님이 귀히 여기는 영혼을 위해 우리의 몸과 마음과 시간을 사용하시기를 축원합니다. 


3) 요나를 하나님의 종으로 만들어 가시는 마음을 보게 됩니다. 

본문의 요나는 철없는 어린 아이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하시려고 열심을 내십니다. 

요나서를 보면 하나님은 요나 한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하시어 일 하십니다. 1장에서는 大風(대풍)을 준비하시고 2장에서는 大魚(대어)를 준비하시고 3장에서는 大城(대성)를 준비하십니다. 그리고 4장에서는 大草(대초), 즉 큰 박 넝쿨도 준비하십니다. 그 외에도 벌레도 준비하시고 동풍의 뜨거운 바람도 불게 하십니다. 요나 한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적이 뭡니까? 요나가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못난이 요나를 쉽게 버리지 않고 열심을 가지고 만들어 가십니다. 아브라함도 만들어 가시고 요셉도 만들어 가시고 모세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쓰셨습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나는 부족하여 쓰임 받을 수 없다고 느낍니까?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이 들어 쓰신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노아는 술 취한 사람이었습니다. 술을 먹고 옷을 벗어 자식으로 범죄하게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너무 노쇠하였습니다. 야곱은 거짓말 장이였고 레아는 못생겼습니다.
 
또 요셉은 형들에게 버림받은 외톨이였고 모세는 말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삼손은 긴 머리에 바람둥이였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이었던 다윗은 간음자요, 살인자였습니다. 솔로몬은 남에게 빼앗은 부인에서 낳은 자식이었습니다. 

신약에서도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였고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목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디모데는 너무 어렸었고 막달라 마리아는 귀신이 들렸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교회를 대적하던 자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흠투성이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변화시켜 쓰셨습니다. 하나님의 열심은 아무도 당할 자가 없습니다. 

나는 안된다. 나는 못한다고요? 하나님이 하십니다. 어쩌면 약하기 때문에 쓰일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고 믿기에 하나님은 그런 자를 더 열심히 만들어 쓰시는 것일지 모릅니다. 따라서 합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만들어 쓰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요나의 마음은 차원이 다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고 그 영혼을 위하여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시며 일하시는 아버지의 그 사랑이 여러분에게 느껴  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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