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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추수할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 (마 9:3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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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할 일꾼을 부르시는 주님 (마 9:35~38)


가르치고 고치고 전파하심

35절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의 모습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매주 묵상했던 말씀들의 요약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사역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이었고, 둘째는 복음전파의 사역, 셋째는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사역이었습니다. 가르치심의 사역은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 말씀이라 할 것입니다. 치유사역은 8장과 9장의 10가지 기적을 중심으로 한 사역이었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역은 이 두 과정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고치시고 가르치시고 전파하시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공생애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된 우리에게서 예수님이 기대하는 것도, 또 우리가 힘써야 할 것도 바로 이 세 가지입니다. 그 모습은 10장에서 제자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마10:1)고는 그들에게 이렇게 명령을 내린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10:7-8) 우리들의 모습을 이 말씀에 비추어 보십시오. 가르치는 사역, 고치는 사역, 전파하는 사역 이 세 가지 중에서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첫째는 가르치는 사역입니다. 주님은 산상수훈 말씀을 가르침으로써 무엇을 가르치고 순종해야 할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달리 윤리적 삶이라 할 것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은 단순히 말로 가르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실천하라는 뜻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실천함으로 세상 사람들을 가르칩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에 지치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 올바른 삶의 방향을 가르쳐 주어야 할 곳이 교회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주님은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지켜 행하라 그리함은 열국 앞에 너희의 지혜요 너희의 지식이라 그들이 이 모든 규례를 듣고 이르기를 이 큰 나라 사람은 과연 지혜와 지식이 있는 백성이로다 하리라”(신4:6)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가르쳐 온 세계가 그 말씀을 따르도록 하려 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천국 율법을 지켜 행하게 함으로써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려 합니다. 교회는 세상 윤리의 바로미터입니다. 

둘째는 고치는 사역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능력의 사람들입니다. 그 능력은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 곧 악마의 능력보다 더 큰 능력입니다. 일찍이 영국의 앤 여왕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 존 낙스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1만 군대보다 존 낙스의 기도가 더 무섭다” 존 낙스는 또 “기도하는 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는 한 민족보다 강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신앙인들은 능력의 사람들로 부르심을 받았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그 능력의 근원입니다.  

또한 이는 제자들의 삶의 태도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병원이 아니라 훈련소입니다. 일단 올 때는 병든 사람으로 왔지만 나갈 때는 의사가 되어 나가는 곳입니다. 교회는 단지 위로받는 곳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리는 곳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시기 전에 주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14:16)고 요청하셨습니다. 우리는 자기 몫의 분량으로 만족해야 될 사람들이 아닙니다. 세상을 살리고 먹여야 할 존재들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에게 단순히 복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혼자만 복 받는 존재가 아니라 세상을 복되게 만드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느 곳을 가든 축복을 빌어주십시오.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연약하여 쓰러진 자가 있으면 위로하고 용기를 주십시오. 병든 자가 있으면 낫기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희망과 감사를 나누십시오. 예수의 제자들이 있는 곳에는 생기와 희망이 넘쳐야 합니다.

셋째는 전파하는 사역입니다. 주님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에게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28:19)는 지상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선교는 우리처럼 예수를 믿게 하는 것이고, 예수님처럼 산상수훈을 순종하는 제자들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회처럼 다종교 사회이면서 복음이 이미 많이 전파된 곳에서는 예전처럼 입으로 전하는 것이 쉽지 않고 반발 또한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의를 갖추되 기회가 되는 대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합니다. 특히 제자를 삼으라는 데 주목해야 합니다. 단순히 믿는 신자를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예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제자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이는 마태복음 28장 19, 20절의 지상 위임령의 후반부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분부한 모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산상수훈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산상수훈을 가르쳐 지키는 제자들을 원하십니다.

한국교회는 제자를 만드는 사역에서 실패하고 있습니다. 지난 번에 기독교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조사한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과가 참담하기만 합니다. 한국교회를 신뢰한다는 의견은 불과 18%에 지나지 않았고, 48.3%는 불신한다고 하였습니다. 한마디로 한국교회는 믿을만하지 못하다고 평가를 내린 것입니다. 종교 호감도나 신뢰도는 가톨릭과 불교 다음으로 3위였습니다.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서 바꾸어야 할 것으로 1위가 교회지도자들과 교인들이 언행일치 면에서 나아져야 한다고 응답했습니다. 그 뒤를 이어 타종교에 대한 관용, 사회봉사, 재정 사용의 투명성, 교회의 성장제일주의, 강압적인 전도 차례였습니다. 일반인들에 대한 오해도 있지만 결국 이 모든 모습은 제자됨의 실패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양적 팽창만 꿈꾸어 신자들만 많이 만들어내었지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제자 삼는 사역에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교회 또한 전도 대상입니다. 그 전도는 신자에서 제자로 만드는 전도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다

주님이 이처럼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시며 이런 사역들을 행하신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기독교 교세를 확장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니면 자신의 정치적인 목적이나 인기를 위해서입니까? 그 답이 36절에 나와 있습니다. “무리를 보고 민망히 여기시니” 여기 민망히 여기셨다는 말은 불쌍히 여기셨다는 말입니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스프랑크니조마이입니다. 스프랑크논이 내장, 창자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 말로 애달다는 말이 있는데 애, 곧 창자가 아플 정도로 안쓰러운 마음입니다. 주님의 행동 동기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시작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나옵니다. 

마태복음 12장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며” 상한 갈대, 꺼져가는 심지와 같은 존재가 바로 우리 인간들입니다.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아 보이지만 그 속사정을 들어보면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심지어 살인마라도 그 사정을 들어보면 불쌍합니다. 가난해서, 어릴 적 상처가 많아서, 세상에 대한 분노가 쌓여서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 것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눈에 이들이 불쌍하게 생각되었던 이유는 마치 목자 없는 양같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양은 무기가 없습니다. 양의 운명은 목자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목자 없는 양은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선 무리들을 보며 예수님은 목자를 찾아서 해매고 있는 양들의 모습을 본 것입니다. 주님은 이처럼 목자 없는 양 같은 무리들에 대해서는 불쌍히 여겼지만, 그들을 방치한 목자들에 대해서는 혹독한 욕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소위 영적 지도자라 하는 바리새인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아”(마12:34)라고 “외식하는 위선자들아”하고 책망하셨습니다. 헤롯 왕을 향하여는 “저 여우”(눅13:32)라고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영적인 지도자나 정치적인 지도자가 잘 다스리면 양들이 편하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잘못되면 양들은 마르고 비참해집니다. 당시 지도자들의 행태를 에스겔은 다음과 같이 적나라하게 꼬집고 있습니다.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을 쳐서 예언하라 그들 곧 목자들에게 예언하여 이르기를 주 여호와의 말씀에 자기만 먹이는 이스라엘 목자들은 화 있을진저 목자들이 양의 무리를 먹이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냐 너희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 그 털을 입되 양의 무리는 먹이지 아니하는도다 너희가 그 연약한 자를 강하게 아니하며 병든 자를 고치지 아니하며 상한 자를 싸매어 주지 아니하며 쫓긴 자를 돌아오게 아니하며 잃어버린 자를 찾지 아니하고 다만 강포로 그것들을 다스렸도다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며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34:2-5)

목자의 행태가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욕심만 채운다, 둘째는 연약한 자를 방치한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양들을 다그치는 목자들이었습니다. 상한 갈대는 상했다고 버리고 꺼져가는 심지는 쓸모없다고 꺼버렸습니다. 그들이 요구했던 율법 앞에 백성들은 오히려 죄인들로 정죄되고 하나님의 은혜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축되게 만들어버렸습니다. 그들은 냉혹한 심판관이었습니다. 귀신들이 쫓겨나 한 사람이 자유함을 맛보고, 안식일에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놀라운 사건 앞에 함께 기뻐하기보다는 율법의 날카로운 잣대만 들이대던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율법에 철저했다고 볼 수 있는가? 주님은 그들이 더 큰 율법을 버렸다고 책망하십니다. 곧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의와, 하나님의 자비인 인과, 자기 기준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신뢰하는 신을 버렸다고 합니다(마23:23). 실상 사람들을 향한 사랑을 잃어버릴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마련입니다.

또 양들을 이용해 자기 욕심을 채우는 목자도 있습니다. 아마 정치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종교 지도자도 그러기 십상입니다. 양들을 자기 성공의 도구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로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 목회자들은 이런 점에서 주의해야 합니다. 목회는 양들을 사랑해서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양들을 많이 모아서 자기 성공을 과시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어쩔 때 목회하다보면 그런 위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양을 사랑하고 양을 싱싱한 꼴로 먹이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이 아니라, 나 먹기 위해서 많은 양이 필요하고 내가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양들을 모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목양하는 ‘목사’가 아니라 먹기를 탐하는 ‘먹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목자 없는 양같이 만들었던 것은 당시 정치 지도자들의 잘못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는 로마제국과 헤롯 왕이었습니다. 로마는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세금으로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헤롯은 백성들을 잘 다스리고 먹이기보다는 수많은 토목공사를 벌이고 자기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선지자 세례 요한이나 죽이는 권력의 화신이었습니다. 이들에게 백성은 단지 자기 욕심을 채우는 도구였을 뿐이지 주님처럼 그들을 위해 희생한다는 생각은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적 위기를 맞고 있는데 국민들의 형편은 마치 목자 없는 양과 같습니다. 정치 지도자들을 신뢰하지 못하니 그렇습니다. 이번에 기사를 보니까 이명박 대통령이 가락동 농수산 시장을 방문하고 무시래기를 파는 어떤 할머니와 대화를 나누다 눈물을 흘렸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20년 동안 쓰던 목도리를 주었다고 합니다. 이 대통령은 또한 이같이 말씀했다고도 합니다. “할머니가 대통령이 잘 되기를 기도하겠다 하더라. 눈물이 난다, 내가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데 그 사람이 기도를 하겠다니…” 이는 무리를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과 같다 할 것입니다. 진작 낮은 곳을 찾아가고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했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눈물 흘리는 데서 더 나아가 그 눈물이 정책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점입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눈물이 가난한 자를 위한 정책으로 나타나야 그것이 참된 눈물입니다. 앞에서는 눈물 흘리고 뒤에서는 부유한 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편다면 그것은 악어의 눈물이 될 것입니다. 악어의 눈물, 아십니까? 뼈까지 발라 먹고 죽은 짐승이 불쌍해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그동안은 강부자 내각이니, 종합부동산세 폐지니, 경쟁과 양극화로 몰아가는 교육정책이니 하여 가난한 자, 연약한 양들을 위한 정책을 펴지 못했습니다. 

성경에서 정의라고 할 때 그 핵심은 가난한 자를 배려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정치가 잘되고 성공하려면 성경대로 하면 됩니다. 가난한 자, 약자를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정의이고 이런 정치를 하면 나라가 평안해집니다. 왜 그렇지요? 하나님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차치하더라도 실상 부자보다 가난한 자가 많기 때문입니다. 1등보다는 그 1등 뒤에 쳐진 사람들이 더 많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는 정치는 많은 사람의 지지를 받게 됩니다. 성경을 한 번 연구해보십시오. 구약에서 가난한 자나 정의와 관련된 구절이 우상숭배 다음으로 두 번째 큰 주제입니다. 신약에서는 16구절 중 1구절이 가난이나 물질, 정의와 관련된 구절들입니다. 짐 월리스라는 사람이 가난한 자와 관련된 구절만 성경에서 오려내고 보니 성경이 걸레처럼 너덜너덜해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미국 사회가 믿는 성경은 바로 이런 성경이라고 책망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한 꿈을 꿉니다. 그 꿈은 느부갓네살의 교만을 경고하는 꿈으로 지금은 큰나무와 같은 권세를 자랑하지만 1년 후에는 미친 사람이 되어 7년 동안 비참하게 지낼 것이라는 꿈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다니엘이 그 곤란을 피할 수 있는 길을 다음과 같이 제시합니다. “그런즉 왕이여 나의 간하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속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속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단4:27) 왕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공의를 행하는 것과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기는 정책입니다. 

현대 사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난한 자가 누구입니까? 비정규직들입니다. 가난한 서민들입니다. 중소 상인과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분들입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정책을 펴야 합니다. 대기업 위주의 승자 독식 사회와 금융자본위주의 신자유주의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이었고 세상에 엄청난 위기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부자가 잘살면 가난한 자도 덩달아 잘산다는 세상이 주는 망상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지혜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정치가 옳은 정치이며 여기에 세상의 희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참된 목자는 양들을 편파적으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오른 쪽에 있는 양만 사랑하고 왼쪽에 있는 양들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양들을 편견없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참된 목자의 마음이요 이 마음이 나라를 편하게 하고 어려울 때 하나가 되게 만듭니다. 이제 이명박 대통령이 통큰 통합의 정치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목자 없는 양들을 바라보면 측은해서 눈물만 날 것입니다. 그러나 민망한 마음은 잠시 예수님의 눈은 오히려 희망으로 반짝입니다. 37절입니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은 적으니” 그곳은 목자 없는 황량한 벌판이 아니라 다 희어져 추수할 때를 기다리고 있는 풍요로운 밭이라는 뜻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사실 의지할 수 없는 이 세상의 목자를 잃어버리는 것은 우리에게는 축복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할 때만이 참된 목자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짓 목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한 우리는 참된 목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무리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불쌍한 존재들이지만 그들은 세상의 목자를 잃었기 때문에 영혼의 목자이신 주님께 나아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역설입니다. 어둠이 짙고 세상의 희망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하나님나라는 찬란히 빛납니다.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고, 이제 막 그 깊은 고통의 시름 속으로 들어가려는 이 경제적 위기의 때는 역설적으로 하나님 은혜의 때입니다. 평생 물질만을 위해서 살았는데 그 물질이 단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허망하게 날아가 버렸습니다. 주님은 물질을 잃은 허망함 이면에 있는 무언가 영원한 것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불과 상위 몇 %만 살아남는 이기적 경쟁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불안전하고 무능한 존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주님은 이런 삭막한 현실에서 경쟁보다는 조화와 사랑을 그리워 하고, 이기심보다는 함께 사는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무리들의 눈길을 읽은 것입니다.

위기는 이 세상의 본질을 폭로합니다. 이때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진실로 영원하며 사랑할만하며 우리를 만족케 할 수 있는 것에 눈을 돌려야 할 때입니다. 그런 점에서 주님은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다는 희망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나 우리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희망을 눈을 가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다가올 위기 때문에 가슴 졸이고 있습니까? 여전히 물질과 세상이 희망이라고 하며 옛날보다 더 그것들에 목매고 있습니까?

주님은 추수할 것은 많되 추수할 일꾼은 적다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기도하여 추수할 일꾼을 보내어 달라고 요청하라고 하십니다. 진정 기도가 필요합니다. 위기의 때에는 주님의 준비된 일꾼들이 필요합니다. 그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정치 사회 경제 각 영역에서 우리 민족을 하나님 말씀 위에서 새롭게 건설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내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데서 머물지 말고 기도하는 사람이 추수할 일꾼으로 나서야 합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명령하신지 얼마 되지 않아 주님은 제자들을 일꾼으로 파송하십니다. 이어지는 10장 5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어 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루터의 일화입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최일선에서 싸웠던 사람입니다. 어떤 수도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루터의 종교개혁에 적극 동조하였습니다. 그는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로서 직접 개혁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기도로 돕기로 하였습니다. 루터는 아말렉 전투의 여호수아처럼 싸우게 하고 자기는 모세처럼 기도로 돕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수도사가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지구처럼 큰 옥수수 밭을 보았고 어떤 한 추수꾼이 힘겹게 그 밭을 추수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고 안쓰러운 광경이었습니다. 그는 얼핏 그 추수꾼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는 다름 아닌 루터였습니다. 이 꿈에서 깨어난 후 수도사는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나는 이제 기도하는 데서 일어나 일하러 가야 하겠다” 이렇게 말한 후 그는 수도원을 나와 루터와 함께 종교개혁 운동 일선에 뛰어들었습니다.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일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일하려고 기도하는 것 아닙니까? 주님은 추수할 일군을 찾고 계십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보다 마음 좋은 사람이 낫고, 마음 좋은 사람보다는 손 좋은 사람이 낫다. 그러나 손 좋은 사람보다는 발 좋은 사람이 더 낫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보다는 영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보다는 손으로 봉사하는 사람이 더 낫습니다. 그러나 섬기는 손을 가진 사람보다는 그에게로 달려가는 발을 가진 사람이 훨씬 낫습니다. 부지런히 찾아가고 함께 있어주는 것. 주님은 “모든 성과 촌을 두루 다니셨다”고 오늘 말씀은 전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추수할 일꾼으로 부르십니다. 이 부름에 기쁨으로 순종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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