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교회의 충만 (엡 1:18~23)

  • 잡초 잡초
  • 361
  • 0

첨부 1


교회의 충만 (엡 1:18~23)


I. 눈먼자들의 도시

노벨상 수상작가인 사라마구의 베스트셀러 원작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 「눈먼자들의 도시」(Blindness)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한 일본인이 어느날 자고 일어났더니 온 세상이 하얀 백지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예비조짐도 없었는데 희얀한 눈병이 찾아와 눈이 먼 것입니다. 이 희얀한 눈병은 거리에서 당황해 하는 이 일본인 환자를 도운 행인에게로 옮겨지고 그를 치료하던 안과의사에게로 옮겨지게 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이 늘어나자 정부는 환자들을 격리 수용 시킵니다. 이때 의사의 아내는 눈이 멀지 않았지만 남편을 따라 수용소로 들어갑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었던 이 부인은 수용소의 비참한 상황을 걸머지고 괴로워합니다. 

수용소는 무서운 혼돈상태로 빠져듭니다. 사람들은 아무데서나 용변을 보고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오물 위를 짐승처럼 뒹굴며 삽니다. 아예 냄새나는 옷을 모두 벗어던지고 알몸으로 살기도 합니다. 수용소 안에서의 신뢰는 무너지고 불화가 깊어집니다. 

어느날 총을 든 사람이 나타나 자신이 수용소의 왕이 되겠다고 합니다. 배급된 음식을 얻어먹기 위해 이 왕이라는 자에게 가지고 들어왔던 돈, 보석, 패물을 바쳐야 했습니다. 급기야 한끼 밥을 얻어먹기 위해 총 든 왕이 있는 3호실 수용소로 여자들을 상납합니다. 거기 무슨 도덕, 윤리, 인간의 존엄성, 건강한 상식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보기도 듣기도 민망한 역겨운 장면들이 지나갑니다. 

앞을 볼 수 있었던 부인은 총가진 왕을 가위로 찔러 죽입 니다. 곧이어 누군가에 의해 수용소는 불길에 휩싸입니다. 몇몇 사람들이 눈뜬 의사의 아내를 따라 무법천지 수용소를 빠져 나왔을 때에는 온 도시 전체가 눈먼자들의 도시가 되어 있었습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은 앞을 보며 산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너도 나도 세상을 볼수 없다면 얼마나 비참한 혼란과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를 상상하게 해 줍니다. 모두가 앞을 보지 못하고 있을 때 나 혼자 앞을 본다면 그것이 얼마나 큰 책임인가를 느끼게 됩니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눈먼자들의 도시」가 아닌가 묻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눈을 뜨고 있다면 어찌 지구촌의 혼란과 범죄와 갈등이 이처럼 무섭게 일어나고 있는가 묻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을 눈먼자들의 도시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에베소서 1:18에서 “마음의 눈을 밝혀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죄악된 세상을 영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겁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보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를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의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란 유명한 글을 아시지요. 
“만약 내가 사흘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나를 가르쳐 주신 셜리반 선생님을 찾아가 그분의 얼굴을 뵙고 싶습니다. 둘째 날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먼동이 트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영롱하게 빛나는 하늘의 별들을 보겠습니다. 셋째 날에는 아침 일찍 큰 길가로 나가 부지런히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표정을 보고 싶습니다. 낮에는 아름다운 영화를 보고 저녁에는 화려한 네온사인과 쇼윈도의 상품들을 구경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서는 마지막으로 사흘간 눈을 뜨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또 어떤 이의 글엔 이런 아픔이 담겨 있습니다. 

“아내가 꿈에 나타날 때도 소리만 듣지 얼굴은 없습니다. 내게 있는 것은 소리뿐입니다. 사람들이 봄을 이야기하지만 나에게는 봄이 없습니다. 느껴지는 봄은 있지만 봄은 없습니다. 초록색을 모릅니다. 내 아내와 내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아이들이 재롱을 부리며 웃는 얼굴을 한 번도 본 일이 없습니다. 태양과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나는 모르고 있습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은 한번 눈을 떠서 아이들이 웃는 것을 보고 아내의 얼굴을 보고 태양을 보고 들을 보고 산을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내 눈이 감겨져서 죽는다 해도 한이 없겠습니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보지 못하는 것은 큰 비극입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최고의 축복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마음의 눈을 밝혀” 볼 수 있게 해 달라는 기도는 우리 모두의 기도입니다. 


II. 하늘에 계신 예수가 보이는가?

마음의 눈이 먼 자들이 이 땅에서 무엇을 보고 사는지 본문에 직접적인 언급은 없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눈이 밝은 자들이 무엇을 볼 수 있게 되는지를 통하여 눈먼자들의 세계를 알 수 있습니다. 

18절 - 눈이 밝은 자는 부르심의 소망이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자신이 이 땅에 왜 태어났는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소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절망의 땅만 보입니다. 눈이 밝은 자는 성도가 가진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인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자신의 기업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달리 돈과 땅의 위력 물질 세계의 위력만 보입니다. 

19절 - 눈이 밝은 자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세상의 능력 앞에 압도당해 있습니다. 사탄의 힘에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20절 - 눈이 밝은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얼마나 위대한 사건인가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죽음의 위력이 보입니다. 죽음 앞에 두려워 떨며 살아야 합니다. 

21절 - 마음의 눈이 밝은 자는 만물의 주인되신 통치가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세상의 통치와 권세 그리고 악령의 능력과 주권이 보입니다. 

22절 - 눈이 밝은 자는 교회가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그 충만한 세계가 보입니다. 그러나 눈먼자는 교회의 허물과 약점 그 안에 모인 인간의 실수만 보입니다. 

특별히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을 밝혀 “그의 능력이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사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하늘에서 자기의 오른편에 앉히신” 사건을 보게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이 왜 이토록 중요할까요? 이 세상에서 죽음보다 강한 힘은 없습니다. 죽음은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갑니다. 죽음 앞에선 인간이 모으고 쌓고 자랑하던 모든 것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바로 그 죽음을 이긴 힘이 있습니다. 사망의 힘을 부수고 지옥의 권세를 깨부순 힘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는 이 말은 단순히 한 사람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기이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도, 한 과부의 아들도 죽었다가 예수를 만나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또 죽었습니다. 한번 죽기도 힘든데 두 번씩이나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활의 능력이란 인간의 죄짐을 지고 죽은 예수께서 인간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죽음의 권세, 지옥의 권세를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겁니다. 

모든 인간을 죄로 묶어 지옥으로 끌고 가던 사탄으로부터 승리하신 사건이 예수의 부활입니다. 이제 부활하신 예수 안에서 죄가 우리를 이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옥이 우리를 가둘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이 되고 예수의 승리는 우리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계속되는 20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히셨다”고 합니다. 
「하늘, 오른편, 앉다」는 이 말은 우리가 늘 사용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간단한 말이 아닙니다. 우선, “하늘”이 무엇입니까? 새가 날고 비행기가 날아다니는 저 푸른 창공을 말하는 것일까요? 

구약 외경인 「레위의 유언서-Testament of Levi」에서 하늘은 세 개의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가장 낮은 하늘은 인간의 죄악과 불의로 물들고 악한 영들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두 번째 하늘은 하나님의 심부름길 천사들이 활동하는 곳입니다. 가장 높은 하늘은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이 바로 예수께서 계신 하늘이요 그를 믿는 성도들이 영원히 살 곳입니다. 

또 성경에서 하나님 우편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통치와 권세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명예의 자리를 말합니다. 예수께서 우편에 계신다는 말은 예수께서 온 만물과 역사를 통치하고 다스리고 운행하신다는 말입니다. 앉았다는 말은 바로 이 권세를 영예롭게 누리고 있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오른편에 앉았다」는 이 말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21절 말씀입니다. 
“모든 통치와 권세와 능력과 주권과 이 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일컫는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나게 하시고” 계속되는 22절입니다.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다” 

여기서 「통치, 권세」이란 말들이 단수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영적 실체를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로마의 황제 숭배사상을 일컫는 다고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혹 에베소를 지배하고 있던 아데미 숭배사상을 말한다고도 합니다. 성도들이 개종하기전 그들이 섬겼던 미신, 우상, 다른 종교의 신, 점성술, 마술을 일컫는다고 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의 힘과 유대 종교의 힘을 이길 수 없어 십자가에서 죽은 나사렛 예수가 이런 모든 로마의 힘과 신, 에베소의 우상 잡신을 발로 짓밟고 이 땅을 다스린다고 선언합니다. 이 선언은 혁명선언입니다. 


III. 교회의 머리(주인 영광)가 보이느냐?

마음의 눈이 밝혀지면 -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일이 얼마나 복된 것인가가 보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그 기업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풍성한 것인가가 보입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큰 것인가가 보입니다. 
죽음의 힘을 이기신 부활의 능력이 보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온 우주와 영적 세계를 다스리시는 하늘과 땅의 주인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클라이막스 이 모든 역사가 교회를 통해서 이 땅에 펼쳐지는 교회의 영광이 보입니다. 이 일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이 교회의 영광이 보이면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입니다.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눈먼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영광이 보입니까? 아니면 교회가 한낱 인간의 종교집단 정도로 보입니까? 여러분 눈에는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보입니까? 아니면 교회의 허물과 약점이 보입니까? 

바울은 바리새인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증거하던 스데반을 죽이는데 앞장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예수 믿는 사람을 말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은 예수를 만난 적도 없고 핍박한 적은 더더구나 없었습니다. “내가 언제 예수 - 당신을 핍박했습니까?” 물을 만도, 항변할 만도 한데 - 그는 항변하지 않습니다. 왜요? 예수를 만나는 순간 그의 육신의 눈은 멀었고 마음의 눈, 영의 눈이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아! 예수는 살아계시는 구나. 예수는 하나님이시구나. 교회를 핍박하는 것은 곧 예수를 핍박하는 것이구나. 예수님이 교회의 머리이구나!” 이것이 보였습니다. 

70년대 중반에 대학을 다녔던 저는 학생회장으로 당시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하다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희들은 심문하던 한 경찰이 “이 나라에서 교회들을 모조리 없애버려야 돼.” 철부지 같은 얘기를 했습니다. 이 말을 받아 후배 한 사람이 “이 정권이 없어지나 한국교회가 없어지나 두고 봅시다” 자신있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러분, 결과는 누가 없어졌을까요?

지난 2천년동안 많은 나라 많은 세력들이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핍박하던 세력들은 모두 망했다” 민족이든 정권이든 개인이든 교회를 핍박하던 자들은 모두 망했습니다. 그러나 교회를 존귀히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존귀히 높혀 주셨습니다. 이것이 보이는게 마음눈 밝은 사람입니다. 

마음의 눈이 먼 자는 교회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먼 자는 교회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눈이 먼 자는 교회에 헌신할 수 없습니다. 

「파인애플」이라는 작은 소책자가 베스트셀러일 때가 있었습니다. 
그 책에는 파퓨아 뉴기니에 갔던 한 선교사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파퓨아 뉴기니에 선교사 부부가 갔습니다. 무지몽매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부인이 의사여서 그 섬의 많은 사람들을 데려다가 치료하고 약을 주고 건강하게 해 주었습니다. 남편된 입장에서도 이들을 전도하는데 돈도 필요하고 수입이 있게 되면 학교를 짓던지 병원을 지어야 겠다 생각했습니다. 선교비를 받아 교회뿐 아니라 넓은 땅을 샀습니다. 과수원도 있고 논도 있고 밭도 있는 땅을 샀습니다. 땅을 개간하고 사람을 사서 경작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파인애플을 심었습니다. 

날씨가 좋아서 파인애플이 얼마나 잘 자라는지 쑥쑥 자라납니다. 파인애플이 주렁주렁 매달렸습니다. 내일이면 따서 시장에 내다 팔게 되면 돈이 많이 들어올 것이고 선교사님의 마음속에도 많은 꿈이 생겼습니다. ‘학교를 먼저 만들까? 병원을 먼저 만들까? 어려운 사람을 도와줄까?’ 많은 구상을 하며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침에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주렁주렁 달려 있어야 할 파인애플이 다 없어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어떻게 된 것인가 알아보았더니 밤새 동네 사람들이 다 훔쳐간 것입니다. 배은망덕한 일이 아닙니까? 어떻게 내 마음을 몰라주는가 싶어 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을의 촌장을 찾아갔습니다. “이 파인애플 농장을 지어서 나 혼자 잘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데, 이것이 무엇이냐? 당신들이 도와주어야지. 이것을 훔쳐가면 되겠느냐?” 

그러나 촌장이 하는 말이 “우리 풍습에 의하면 모든 열매는 심는 사람이 먹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노임을 주고 심었다 할지라도 심은 것은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파인애플의 주인은 우리입니다.” 

매번 이야기를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농장 주위에 철조망을 둘렀습니다. 그 다음에 보니 철조망을 끊고 그 사이로 파인애플을 다 갖고 갔습니다. 그래서 사나운 개들을 사다가 풀어놓았습니다. 개들이 파인애플을 잘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전엔 선교사 부부에게 인사를 잘하던 원주민들이 인사를 안하고 외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니 속이 상합니다. 본국에 돌아갔다가 기도원에 갔습니다. 하나님께 하소연을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그들을 위해 일하는데 알아주는 이 없고 오히려 비난을 합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는데 하나님께서 단 한마디 하십니다. 
“그 파인애플 농장이 누구 것이냐? 파인애플 농장의 파인애플은 누구것이냐?” 
선교사는 선교사대로 자신의 것이라 했고 동네 사람은 동네사람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은 네 것도 동네 사람들의 것도 아니고 내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깨달은 선교사는 돌아온 후에 개들을 걷어 들이고 철조망을 걷어내고 표지판에 “이 파인애플 농장은 하나님의 것입니다”라고 썼습니다. 그 다음날부터는 파인애플을 가져가는 사람이 없더랍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하나님의 것을 가져갔다가 죽으면 어떡하냐고 대답합니다. 

교회나 직장이나 우리의 생활에서 언제부터인가 내가 주인이고 내가 아니면 안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의 주인은 예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IV. 몸된 교회의 충만이 보이는가?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요 교회는 그의 몸이라는 이 교리는 그것이 너무나 신비하기 때문에 바울 자신에게도 큰 비밀이라고 했습니다.(엡5:32) 머리와 몸이라고 나누어서 말했지만 이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입니다. 몸이라고 할때 그것 또한 하나가 아닙니다. 목, 가슴, 손, 손가락, 다리, 발, 발가락, 오장육부... 등등 여러 부분의 집합체가 몸입니다. 몸의 각 부분은 분명 하나인데 또 서로 다릅니다. 손과 손가락은 다른데 하나로 연결된 생명체요 유기체입니다. 

왼발 밑에 가시가 박힙니다. 발하고 제일 멀리 떨어진 입이 “아야~” 소리를 지릅니다. 금방 궁뎅이가 자리를 잡고 앉습니다. 왼손이 발목을 잡고 눈이 볼 수 있도록 뒤집어 줍니다. 눈이 “가시를 찾아라” 비리비리비리... 가시를 발견하자마자 오른손이 달려가 가시를 뽑습니다. 이빨이 질근질근 씹습니다. 목구멍에서 바람이 나와 “퇴” 뱉습니다. 이것이 바로 유기체라는 것입니다. 

이 연합과 관계가 깨지면 병이 든 것입니다. 각 지체는 각자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과제를 수행할 때는 빈틈없이 서로 연합 합니다. 이것이 교회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교파가 아닙니다. 교회는 조직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교회라는 건물 안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의 모임을 말합니다. 교회를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 말은 에크(...로부터)라는 말과 칼레인(부르다)이란 말이 합쳐서 “부름받은 사람들”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배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부름받은 사람들이란 뜻입니다. 그 모인 장소의 건물이야 크든 작든 아름답든 초라하든 거기 예수가 계시면 그곳이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은 마음의 눈이 밝혀졌을 때 교회의 영광, 교회의 신비가 보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생명을 걸었습니다. 교회를 헤치는 자들과 맞서 싸웠습니다. 교회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보잘것 없는 지체라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 작은 믿음마저도 지키지 못해 실수하고 낙심하고 넘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자기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지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나는 매우 작고 중요하지 않는 지체이지만, 나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이다. 나는 현재 그분 안에 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난과 좌절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있고 나는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므로 결국은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또 나와 다른 지체들을 존중하고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내 언어나 행동이 다른 지체를 낙심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교회와 다른 지체를 비난하고 비판하고 싶을 때 입술을 깨물고 잘못된 언어를 지켜야 합니다. 어떤 못난 지체도 주님의 몸의 일부입니다. 

어떤 지체는 콧등처럼 잘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보이지 않는 몸속에 들어있습니다. 늘 눈에 잘 들어나는 콧등이 보이지 않는 심장보다 중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도 들어나지 않는 더 중요한 지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지체는 몸처럼 물질로 되어 있지만 또 어떤 지체는 영, 정신, 마음... 보이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몸은 하나인데 지체는 다양합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서로 귀한 것입니다. 서로 다른 것은 비난의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서로 보완과 조화의 관계일 뿐입니다. 

어느날 다섯 손가락이 서로 자기가 잘났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엄지가 고개를 들고 “내가 최고야” 할때 이렇게 하잖아. 그러니까 내가 최고야! 
검지가 앞으로 나서며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이리 가세요. 저리 가세요” 주인이 언제나 나를 앞세우잖아!
장지가 “전부 일어서 봐. 나보다 키 큰 놈 있으면 나와 봐. 까불고들 있어. 내가 최고야”라고 합니다. 
약지가 “너희들 그래도 아무 소용없어. 다이아반지를 내게 끼워주는 걸 보면 모르겠어. 내가 최고지”라고 합니다. 
그때 새끼지가 “그래 너희들 다 잘났다. 그래도 내가 없으면 너희 모두 병신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싸우지 않고 서로 잘 지내기로 했더랍니다. 여러분 교회에서 자기 잘났다고 남을 짓밟다가 병신되지 마세요. 

교파끼리도 서로 강조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한 지체입니다. 교회끼리도 비전이 다르고 장점이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한 지체입니다. 성도끼리도 서로 은사가 다르고 장점이 다릅니다. 그러나 한 몸, 한 지체입니다. 

바로 이것을 통하여 교회는 충만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1장 마지막 절을 보십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아프리카의 밀림에서 동물들이 사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약한 동물이라도 떼를 이루고 있으면 아무리 강한 짐승이라도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힘 자랑하는 놈이 생깁니다. 무리 중에 힘이 제일 강한 수놈이 무리를 떠나서 저 혼자 자만스럽게 지냅니다.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이제는 저 놈이 죽을 차례구나.’ 아니나 다를까 다른 동물들의 집중 공격에 힘없이 넘어져 죽고 맙니다. 

“나는 너희들과는 다르다. 나 혼자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라고 장담하며 무리에서 떠나서 떠도는 신자는 반드시 사단의 공격을 받습니다. 

성전을 지을 때 보면 수만 개의 철근이 들어갑니다. 긴 것, 짧은 것, 두꺼운 것, 얇은 것 등을 가득 쌓아 놓습니다. 아주 긴 철근이 있는가 하면, 짧은 것은 조그만 나사못보다도 더 작습니다. 두꺼운 것은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들 수 없을 만큼 크고 묵직합니다. 얇은 것은 가는 철판같이 생겼습니다. 이런 수만 개의 철근을 하나하나 끼우고 맞추며 쌓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이 다양한 은사와 헌신이 모여 교회의 충만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