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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도는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 (빌 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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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는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 (빌 4:4~7)


예전에 섬기던 교회에서 가까이 교제하던 한 집사님이 계신다. 
그 분은 믿음 좋은 가정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았고, 지금 교회의 중직을 맡고 있는 분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애정을 갖고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그가 말한 깊은 고민이 하나 있었다. 
“과연 우리가 듣는 말씀대로 과연 살 수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늘 본문에서 제시해주고 있는 교훈을 과연 얼마나 지키고 살 수 있을까?
과연 현실 속에서 실천 가능한 삶의 교훈인가?
이것은 오늘 우리 모두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듣는대로 실천할 수 있다면 아무 문제가 없겠지.
그런데 아는 것과 실천할 수 있는 것의 차이는 너무나 큰 한계를 가져온다.
그렇다고 해서 그 한계 때문에 실천을 포기할 수도 없는 우리의 모습이 주는 고민이 있다.
과연 어떻게 풀어 나가야 하는가...

오늘 말씀 - 세 가지 권고를 알려주고 있다.
“항상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들이 알게 하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정말 이 말씀대로 살 수 있을까? 진지한 고민을 해보게 되지만 쉽지 않은 부분.
그렇다면 불가능한 삶을 요구하시는 것일까???

이런 한계 앞에서 우리의 삶을 말씀의 능력으로 새롭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본문이 시작하는 한 단어를 통해 나타나는데, 그것은 바로 “주 안에서”라는 말씀이다.

사실 이 “주 안에서”라는 말씀은 바울 신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바울의 서신 대부분에서 드러나는 말씀의 커다란 기초가 바로 여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본래 바울의 삶을 보면, 바울은 주 안에서를 언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누구보다 예수 믿는 자를 핍박하던 율법주의자였고, 사도행전 8장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처럼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길 정도로 예수와 그를 추종하던 자들에게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그의 말씀 가운데 “주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치를 말하는 존재가 되었을까???

바울은 본래 그 자신이 빌립보서 3장 5절이하에서 언급해 주고 있는 것처럼, 철저히 율법으로 만들어진 자였다.
나는 태어난 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음을 자랑하던 자였다.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두고, 핍박하는 것을 의의 열심으로 알았던 그 날도 바울은 다메섹에 예수 믿는 자들을 결박하기 위해 가다가 그 길에서 예수를 만난 사람.
“사울아 사울아 어찌 하여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자신을 찾아 오시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시며, 자신을 만나 주시는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는 예수를 핍박하던 자에서 예수를 전하는 자로 바뀌어지게 되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난뒤, 예수를 전하게 되고, 그 예수로 인해 삶의 가치가 바뀌어진 사람.
그 자신이 예수 안에서 삶의 추구점, 삶의 목표, 삶의 인식이 새로워진 사람.

바울은 자신의 편지에서 늘 자신의 변화를 고백.
딤전 1:12 나는 훼방자요, 포행자요, 핍박자였다. 그러나 이런 나를 우리 주님은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하시고, 또한 충성되이 여기셔서 귀한 직분을 맡겨주셨다. 그래서 나는 너무 감사하다.

빌3:5절이하 자신의 과거.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고상함으로 인해 변화된 삶의 가치.
바울의 결론적 삶의 지향점 - 빌3:20 우리의 시민권은 아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고 고백.

바울 자신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는 것에 대한 정의 -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백.
즉 이 말은 하늘 백성이 되었다는 고백.

성도 -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

비록 몸은 세상에 있지만, 삶의 가치와 비전은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하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가진 사람을 성도로 할 수 있다.

흔히 우리 나라에 와서 거주하는 미국인을 우리가 말할 때 그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한국에서 살고 있지만 그들은 분명히 미국 국민으로서의 가치와 사고를 가지고 산다는 것.
우리도 마찬가지 하나님의 구원의 백성으로 하늘 권세를 가진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다.
비록 오늘 우리가 이 땅에 머물며 이 땅에 발을 내딛고, 이 땅에서 숨을 쉬지만 우리의 가치와 우리의 비전과 우리 삶의 방향성은 온전히 하늘 백성으로서의 모습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이런 우리들의 정체성을 한 마디로 “주 안에서” 이렇게 표현해 주고 있는 것이다.

주 안에 있기에 과거 나를 채우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고, 주 안에 있기에 주 안에서 발견되는 지식이 더 고상함을 느낄 수 있는 것.

그래서 바울은 빌 4장 11절 이하에서 자신이 비록 비천한 처지에 처할 때도 있었고, 헐벗고, 굶주리고, 배고픔과 궁핍한 모습을 가질 때도 있었지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이겨내며, 참고 견디고, 할 수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

결국 바울은 오늘도 본문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결국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진지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
자신의 경험, 자신의 생각, 자신의 위치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주 안에서, 그 분의 말씀의 은혜와 교훈을 따라, 그 분의 구원 안에서, 그 분 나라의 백성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할 때에 감당할 수 있는 삶의 새로운 지경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또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이해를 가지고 오늘 본문을 보면 오늘 말씀은 한 순간에 모든 고민을 내려놓고 쉽게 이해하고 수용할 수 있는 모습을 제공해 준다.

1. 항상 기뻐하라.
2.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3.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

이 세 가지는 이 세 가지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는 모든 신앙의 궁극적인 교훈과 가치를 뛰어 넘을 수 있는 모습을 제공해 준다.

열쇠를 다루는 분들 - 마스터 키. 사실 이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열쇠하고는 다른 것.
그렇지만 이것만 있으면 못여는 문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능력을 드러내게 된다.

신앙생활에도 마스터 키가 있다.
- 그것은 바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이다.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우리를 하늘 백성이라고 증거. 우리는 주 안에 있는 자.

하늘 백성이기에 기뻐할 수 있다는 것. 관용을 증거할 수 있다는 것.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 삶을 이루게 되는 것.

하늘 백성이기에 감당할 수 있는 삶의 멋진 모습들....
오늘 이런 관점에서 말씀이 알려주고 있는 세 가지 구체적인 삶의 모습들을 우리는 세밀하게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다는 것.

기쁨 -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삶의 중요한 요소.
사람들은 살면서 더 큰 기쁨의 요소를 찾기위해 노력하고, 더 큰 기쁨 속에서 보다 큰 행복을 누리게 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영국속담
“당신이 행복한 하루를 살고 싶다면 이발을 하십시오.
당신이 행복한 한 주를 살고 싶다면 자동차를 사십시오.
당신이 행복한 한 달을 살고 싶다면 결혼을 하십시오.
당신이 행복한 한 해를 살고 싶다면 새 집을 지으십시오.”

이 말은 우리의 기쁨은 늘 제한적인 모습을 제공한다는 것. 
사실 우리가 맛보는 기쁨은 언제나 환경적 요인에 의해 지배받는 모습을 보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 손에 잡히는 것, 보고 듣고, 먹고, 경험하는 것을 통해 이뤄지는 기쁨은 지속적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수반에 예쁘게 정리된 꽃꽂이의 꽃을 보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정말 아름답다는 것.
그런데 그 꽃은 거의 일주일을 버티지 못한다는 것.
우리가 맛보는 세상의 기쁨은 바로 이런 한계 속에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때론 우리 삶이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환경을 만날 때도 너무나 많이 있다는 것이다.
정말 오늘 우리들의 삶의 자리를 보면 그 어느 것 하나도 우리에게 기쁨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요즘 국가의 형편이나, 가정 속에서 이뤄지는 모든 모습들, 우리가 갖는 미래에 대한 생각들....
어느 것 하나 우리에게 기쁨이 된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으며, 그것도 항상 기뻐할 수 있겠는가?

환경이, 여건이, 우리 삶의 조건이 기쁨을 주지 못하고, 기쁨의 조건이 있다 하여도 늘 제한된 기쁨을 가지고 항상 기뻐한다는 것이 어찌 가능하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에 대해 자신의 삶의 고백을 통해 오늘 우리들에게 기뻐해야 할 이유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이 말은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고 그들을 권면하기 위해 감옥 속에서 작성한 편지라는 것이다.
즉, 이 말은 도저히 감사할 수 없고, 기뻐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던 바울이지만, 바울 자신은 지금 자신의 처지, 자신의 형편이 기쁨의 조건이 아니라 자신을 매고 있는 감옥의 형편보다도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기쁨의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자신이 주 안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원자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삶의 가치가 바뀌어지고, 삶의 목적이 달라지고, 삶의 이유가 새로워진 예수 그리스도 그 분 안에서 바라보면, 삶의 처지와 상관없이, 삶의 조건과 상관없이, 삶의 모습과 상관없이 어떤 형편에서도 자족하는 모습으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우며 진정한 기쁨으로 아름다운 믿음을 고백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 자신의 신앙의 고백이며,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결단인 것이다.

퇴직의 현실이 눈 앞에 닥치고, 가족은 병들고 아파 병원에서 신음하며, 어려운 경제적 한파 속에 긴 겨울을 어찌 잘 헤쳐 나갈까 생각하는 우리들의 삶의 자리에서 어찌 기쁨을 말할 수 있으며, 어찌 행복을 운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나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나의 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힘과 용기를 붙잡고 기쁨의 길을 그것도 항상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나 주님이 해 주시면 못할 것도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하늘의 신비한 은혜로 우리를 채우시고, 남이 듣지 못한 음성을 들으며, 남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남이 잡지 못한 신비한 손길에 사로잡힌 바 되어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 사람이 감히 경험할 수 없는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은혜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이다.
이것은 오직 주 안에서 이뤄질 수 있는 능력이고, 오직 그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경험되는 놀라운 신비이다.

이 시간 여러분들을 축복한다.
기뻐할 수 있는 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세상의 조건과 상황을 뛰어넘는 기쁨이 주 안에서 맛보아지며, 경험되어질 수 있기를 축복한다.


2. 다음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주 안에서 관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관용이란 말은 헬“에피에이케스”라는 단어로 사용되어지는데, 그 의미는 “당연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향해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관용이란, 이해와 용납이며, 용서와 사랑의 모습이다.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언급되어져 있는 산상수훈의 말씀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놀라운 사랑의 수준을 알려주고 계신다.

너희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말씀해 주고 있다.

더 나아가서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는 이제까지 들어왔지만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다.

여러분! 과연 이 말씀이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되고 용납될 수 있는 말씀인가?
과연 우리의 신앙 울타리 안에서라도 쉽게 수용되고 실천될 수 있는 말씀이겠는가?

우리의 관용을 보이라 말씀하여 주고 계시지만, 정말 이 관용을 실천한다는 것이 때론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일 정도로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하나님의 권고 앞에서 우리는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 어렵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핑계로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오늘 우리는 하늘 백성이기에 이 질문 앞에 우리의 삶을 진지하게 점검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이와같은 관용의 문제에 대해 우리 예수님은 누구보다 자신을 내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삶으로 이 관용을 가르쳐 주신 분이시다.

요한복음 8장에서 보면,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혀온 한 여인이 성전에 계신 예수님 앞에 놓여지게 되었다. 율법대로 하자면 이 여인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 가운데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며 이 여인을 안아 주셨다. 그리고 다시는 가서 죄를 범치 말라며 새 삶으로 이 여인을 인도하셨다. 

구약의 율법을 근거로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일곱 번 용서하면 되겠느냐는 제자 베드로의 질문 앞에 예수님은 일흔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될 것을 말씀해 주고 있다.

예수님 자신을 체포하기 위해 다가올 때 제자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베어버리자 칼을 뺏어 칼집에 넣고 이것까지 참으라 말씀하신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관용을 생각해 볼 있다.

또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노래하던 무리들이 이제는 소리높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하라고 말할 때에 십자가에 달려 묵묵히 죽음을 맞이하시며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죄를 알지 못하여 그렇다고 말씀하신 그 말씀 속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큰 사랑과 용납을 배우고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를 용서받은 자로서 일백 데나리온을 헤아려주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오늘 말씀이 권면하고 있는 관용의 삶은 우리에게 어떤 도전을 주는 것일까?

우리가 성인 군자가 아닐진대 어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수준을 이뤄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먼저 그런 십자가의 용서 앞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주님이 우리를 결산하시고, 우리를 헤아리신다면 어느 누구 하늘 백성을 운운하며, 기쁨의 삶을 노래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관용하시는 우리 주의 사랑이 로마서 5장 8절의 말씀처럼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 사랑을 확증하셨다는 그 말씀처럼 그 십자가의 사랑의 증거가 바로 오늘 우리 앞에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자로서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일백데나리온의 문제를 연연하는 것이 얼마나 합당하지 못한 어리석은 삶의 모습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천만번 다시 태어난다해도 우리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가 주 안에 있기에 우리 안에 계신 우리 주의 능력이 우리 안에서 감당할 만한 힘과 능력으로 우리를 사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는 하늘 백성으로 우리를 통해 이뤄지는 참된 관용으로 모든 사람을 알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는 우리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향력을 드러내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증거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관용적 사랑이 우리를 통해 증거되고, 나타나기를 우리 하나님은 원하시고 우리에게 그렇게 요구하신다는 것이다.

빌립보서 말씀을 보면, 빌립보 교회의 심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관용이 실천되어지지 않는 모습이 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정말 하고 싶었던 말, 그래서 꼭 권면하고 싶었던 말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빌립보서 4장 속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전하면서 특별히 4장에서 이제 성도로서 살아야할 삶에 대해 가르치면서 가장 먼저 한 마음을 품을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4장 1절에서 2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나의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 이와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권면하고 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울의 말처럼,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었으며, 빌립보 교회에 상당히 큰 영향력을 이루던 여인들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이 현재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 바울에게까지 들린 것 같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 그리고 이 여인들을 향해 관용에 대해, 사랑의 용납에 대해 간곡히 부탁하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접하게 되는 것이다.

실천되어지지 않는 신앙은 지식에 불과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에 대해 아는 것.
하나님의 가르침과 말씀의 풍성한 삶에 대해 아는 것이 우리들의 삶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옛말에 구슬이 서말이라도 꽤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아무리 귀한 말씀을 듣고, 배우고, 안다 하여도 그 말씀이 우리 삶을 지배하지 못하고, 우리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이것은 참된 믿음의 증거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운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것을 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런 믿음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고, 우리의 삶에 적용되어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처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도, 그리고 주 안에서 관용하라는 것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말 조금이라도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실천되어지는 삶이 바로 우리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증거되는 놀라운 모습이라는 것이다.


3. 마지막으로 세 번째, 우리가 하늘 백성이기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문제없는 사람이 어디 있고, 염려 없이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심방을 하면서 느끼는 것 - 세상에 문제 없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가정 가정마다 형편을 듣다보면 문제없는 사람이 없다. 경제적인 문제, 관계의 문제, 건강의 문제, 자녀의 문제....
어떤 분들은 기도제목을 물어보면, 말도 하기 전에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면 그 모습을 보는 제 마음이 얼마나 아픈지 모른다.

그런데 가끔 어떤 분들은 기도제목을 물어보면 별다른 기도제목이 없다는 것이다.
제가 가만히 보면, 문제가 없고, 정말 기도제목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 생각이 없고, 관심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오늘 우리의 주변을 둘러보라.
보이는 것이 다 염려스럽다. 들리는 소식이 다 걱정이다.
어느 것 하나, 어느 모습 하나도 우리에게 평안함이 없다.
그래서 정말 너무 답답할 때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염려하고, 걱정하며, 한 숨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걱정한다고, 염려한다고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함을 주거나 해결점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가 염려함으로 우리의 키가 한 자나 커질 수 있겠는가?
만약에 그런 논리가 적용된다면 제 키는 다 한 숨으로 이뤄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염려는 오히려 우리를 더 큰 염려 속으로 몰아넣는다.
걱정은 우리를 더 큰 걱정 속에서 헤메게 만든다.
그래서 오늘 말씀은 우리를 향해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가르쳐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이다.

그런데 염려할 것이 있고, 걱정이 태산인데 어찌 근심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겠는가?
정말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어 것은 바로 우리가 주 안에 있을 때라는 것이다.

주 안에서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실 때 문제를 뛰어넘는, 염려를 뛰어넘는 하늘 백성으로서의 삶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도 수 많은 염려와 근심으로 멈출 수 없는 한숨을 쉬며 이 예배의 자리 가운데 나온 분들이 계실 것이다.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내려놓을 수 없는 걱정과 삶의 무게를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오늘 말씀처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는 것은 주 안에서 우리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신앙의 새로운 지경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믿음이란 것을 예수 안에서 내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말을 들으면 우리 모두는 다 우리의 염려나 문제를 내려놓고 싶어한다.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그런 염려나 문제들이 우리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려놓고 싶어해도 내려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도 예배당 문을 나가면서는 멈추었던 한 숨을 다시 쉬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예화] 이 부분에 대해 우리는 생각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혹시 냇가나 바닷가에 몸을 담궈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아무리 무거운 것을 가지고 있다 하여도 물에서는 부력이란 것이 있어서 그 무게는 절대로 느껴지지 않는다.
즉 이 말은 우리의 염려가 무겁고 우리를 힘들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의 바다 안에, 우리 주님의 만져주심 안에서는 그 모든 염려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다는 것은 바로 주 안에서 하늘 백성이기에 누릴 수 있는 특권 중의 특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아뢰라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우리 하나님께서 맡아 주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 속을 채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
관용을 알게 하는 삶.
그리고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뢸 수 있는 삶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바로 내가 주 안에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주 안에 있다라는 것은 우리를 구원하신, 우리를 당신의 백성 삼아주신 그 분의 그 사랑으로 인해 이뤄진 우리 신분의 변화이며, 우리 존재의 새로움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주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하늘 백성된 자들입니다. 
땅에서도 하늘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렇기에 그 분의 은혜와 능력을 품고 나아갈 때 우리는 오늘 말씀처럼 항상 기뻐할 수 있고, 관용할 수 있고, 아무 것도 염려없이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아뢰는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늘 백성이기에 감당할 수 있는 멋진 승리를 바라보며, 새롭게 맞이하는 한 주간동안 주님 안에서 하늘 백성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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