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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새 것이 된 사람 (고후 5: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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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것이 된 사람 (고후 5:15~19)


가만히 생각을 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하고 있습니다. 어제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며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내가 아닙니다. 벌써 한 살이 더 먹고 인생살이가 그만큼 원숙해지고 많이 달라진 것입니다. 거울을 볼 때 잘 몰랐던 나의 모습이 친구의 늙어 가는 얼굴에서 발견이 되고 생각은 그렇지 않는데 몸 놀리는 것이 작년과 같지 않는 것이 영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일들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나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너무 급작스럽게 달라지고 있습니다. 세월의 숫자와 함께 여지없이 달라지는 모든 세상 만사에 우리들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이들이 자라서 국민학교에 다니던 애가 중학교에 들어 가는 것은 대단히 흐뭇하고 대견한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그만큼 늙어 가고 있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를 자세히 관찰하면 크게 두 가지로 달라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썩음의 노예가 되어 계속 죽어 가는 것이 있습니다. 사실 모든 생물은 이 세상에 태여 날 때부터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차피 죽은 날이 정해져 있으니  인생살이가 죽음을 향해 가는 여행길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인생을 이렇게 파괴적으로 비관적으로 부정적으로 보는 그런 변화가 있어 계속 죽어 가고 소멸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 한편으로는 죽음이 아닌 생명으로 발전하는 변화도 있는 것입니다. 이 변화는 죽음의 변화와는 반대로 생명을 향해 올라가는 맹렬한 변화로서 끊임없이 성장하고 성화되어 가는 변화입니다. 거름더미 속에서 장미가 피듯이 썩어져 버린 곳에서 아름다운 생명이 자라나는 거룩한 변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변화에 대한 세 가지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① 진화론적 변화입니다. 만물의 모든 변화를 하나의 진화의 과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그 자신과 그 자손들의 생존과 진화를 위한 생존 경쟁과 적자 생존의 양육 강식이 있습니다. 내가 살고 우리 종족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모든 다른 피조물과 상대적인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런 변화를 한마디로 변증법적 변화라고 말하고 이 변화의 법칙이 공산주의의 기초적 이론이 되었습니다. 

② 인격적 변화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인 변화요 때로는 역설적이기도 하고 순리적인 면도 있는 변화입니다. 가령 혁명이란 단번에 이루어지는 급한 변화로서 물리적이나 교육이나 민주화는 느리고 때로는 무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언제 설득하여 변화를 시킬 수 있는 가라고 생각이 되지만 이것은 약한 것 같으나 사실은 강하고 느린 것 같으나 사실은 가장 효과적인 투자가 보장되는 변화입니다. 이 변화는 순리를 쫓아 서서히 하나의 과정을 거처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이 변화 속에서 우리 사회는 가르치고 배우고 깨달아 인간답게 살려는 노력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③ 창조적인 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래 오늘까지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영속적으로 나타나 생겨진 변화입니다. 이것을 재창조라 하시고 이것을 중생이라 하시기도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는 제 1의 창조와 달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변화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변화를 잘 말씀하시고 게신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은 십자가 사건과 그 말씀과 그 능력과 그 사랑에 의해 이루어지는 생명 창조의 역사로서 우리는 이것을 구원, 영생이라고 말합니다. 이 역사는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역사로서 하나님은 많은 죄인들을 이 창조적 역사로서 구원하시고 게십니다. 본문에서 말씀하신 ‘피조물’은 즉 창조 문자 그대로 ‘새 것이 되었도다’라는 선언이요 실제로 우리들에게 일어 난 축복의 현상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창조라는 말의 의미를 더 자세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원래 창조라는 말은 造成이라는 말과 뜻이 다른 말입니다. 영어의 크리에이트와 메이크라는 말이 서로 다른 말이 듯이 말입니다. 창세기 1장에는 창조하는 말이 4번 나오는데 미상으로는 3번이 됩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는 크리에시션으로 세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 무에서 유를 만드신 창조입니다. 전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존재하는 그것을 만드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만들어 놓고 자기가 만들었다고 즉 창조했다고 말합니다만 그것은 이미 있는 것을 우리들의 편리를 따라 다시 만든 것을 말하는 것이지 없던 것을 창조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즉 사람은 무엇을 만드는 것이고 하나님은 창조를 하시는 것입니다. 

㉡ 무기체를 유기체로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무기체와 유기체는 전혀 존재의 차원이 다릅니다. 돌은 몇 억만년을 두어도 돌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있는 것은 성장을 하고 자율적으로 번창하고 생명의 변화를 하는 것입니다. 

㉢ 인격적인 변화입니다. 사람은 복합체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동시에 그 몸은 자연의 한 물질인 흙으로 빗어졌습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만든 우리들의 몸은 자꾸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온 우리 영혼은 날로 새로워 가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생명의 관계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의 재창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이 재창조의 역사도 하나님의 섭리에 맞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재창조의 실제를 찾아보면 

ⓐ 영적인 무에서 유로의 변화를 느끼는 것입니다. 다시 마하면 내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전혀 하나님 앞에 아무런 소망이 없던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 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은 죽음에서 시작을 해서 새 생명을 얻어 다시 살아 난 것으로 결론됩니다. 새롭게 되었다는 것을 잘못을 고친다거나 발전이나 교육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옛 것의 죽음을 말합니다. 

요한 복음 11장에 나사로가 죽어 썩어져 버린 그런 상태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가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살아 난 것과 같은 그런 놀라운 일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 놀라운 사건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을 믿는 일은 굉장히 놀라운 일입니다. 내 공로가 아닙니다. 내가 믿으려고 노력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이 믿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에서 유로의 변화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믿지 않던 사람이 믿는 사람이 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나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재창조입니다. 

ⓑ 쓸모 없는 것이 아주 요긴한 것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생명적 변화를 말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처럼 생명적 역사가 있는 곳에는 자꾸 자라나는 변화가 있게 됩니다. 은혜가 자라고, 사랑하는 마음이 자라고, 그리고 믿음이 자랍니다. 봉사하는 마음이 자라고 섬기는 마음이 자라고 신앙적 체험이 자랍니다. 내가 무엇을 하기 위해 어떤 결심을 새롭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하는 것, 행동하는 것들이 자꾸 자라서 거룩해 지고 믿음으로 성숙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즉 나를 닮은 사람이나 부모를 닮은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완성되는 그런 성숙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성장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1.  목적이 변합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고후 5:15]” 여기 위하여라 는 말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새 사람이 된다는 것은 직업이나 지위 신분이 달라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사는 목적이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목적은 그리스도를 향한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 창조된 사람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믿는지가 오래되었는데도 그 삶의 목적이 까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 때는 모르겠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던지 자기에게 이익이나 손해가 생기면 언제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느냐 싶게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가 버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그 사람은 교회를 오래 다녔지 아직 그리스도 안에 변화가 안된 사람입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 거이 아니라 신앙 생활을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사람에게는 진실한 걱정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할 걱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산다고 하면서 걱정 근심이 있는 것은 아직도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사람이 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욕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욕심이라는 것은 다만 복음을 전하고 죽어 가는 영혼을 살리려는 그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29]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의 말씀의 의미입니다.


둘째, 영적인 세계관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육적으로 보고 판단했던 일들을 영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을 물량적으로 생각했던 일체의 일들을 영 주도적인 일들로 보게 됩니다. 사람을 볼 때도 얼굴이나 학벌, 재산을 보지 않고 그 사람의 진실성과 성실성, 그리고 인내와 진지한 삶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사람의 외부적인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의 상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느냐를 보게 됩니다. 미래 지향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는 그 날의 나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과 같이 “그리스도의 날에 너희는 나의 자랑이 되고 나는 너희의 자랑이 되리라”하신 말씀 데로입니다. 항상 영적으로 신령한 세계를 생각하고 거기서 참된 가치관을 확립하고 기준을 설정하여 판단을 하고 처신을 하게 됩니다.


셋째, 사랑에 강권되어 삽니다.
본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도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사람들은 대게 사랑해야 한다면 서도 사랑을 받기를 강력히 바랍니다. 그래서 부부가 신혼에 사랑을 많이 받기 위한 투쟁을 합니다. 그것을 사람들은 사랑싸움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중생한 사람은 사랑을 받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하나님이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큰사랑을 우리들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결핍을 느끼는 것은 우리들의 잘못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의 결핍이지 사랑의 결핍은 결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요구되거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미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미침이 사람들 앞에서는 가장 온전한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히 깨달아 질 때 우리들의 마음은 미칠 지경으로 좋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광신자가 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말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미움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미움이란 얼마나 무서운지 우리 속담에 ‘원한 맺어 죽은 사람의 시체는 썩지도 않는다’라는 말이 있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받은 사랑으로 사랑하고 주는 사랑으로 사랑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입니다.


넷째, 화평케 하는 직책을 받았습니다.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고후 5:18-19」”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다른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 ‘서로 화목 하자’ ‘서로 잘 지내야지’한다고 해서 잘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로 싸우는 것은 우월감 때문입니다. 잘난 척하고 위신을 세우려다 다른 사람을 하시하고 비방하고 그래서 싸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거듭 난 사람은 그렇게 자기를 높이고 잘난 척 할 수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겸손해 저야 합니다.  그저 겸손할 수밖에 다른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겸손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자기가 겸손하다고 해서 겸손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말이나 수양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겸손하라고 아주 내려 앉혀야 겸손해 집니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로 새롭게 태여 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남의 허물을 보지 못합니다. 우선 자기의 부족과 허물도 감당을 못하는데 언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고 비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똥 묻은 개 재 묻은 개 나무라더라’고 다른 사람의 허물을 잘 보는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의 눈 속에 있는 티끌을 본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도적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도적으로 보이고, 음란한 사람의 눈에는 모든 사람이 음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화평한 사람은 사람의 좋은 점을 봅니다. 어떤 경우에 사람의 단점은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화평한 사람은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삽니다. 분쟁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무리한 강행을 할 때 생깁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다가 분쟁이 있음은 더욱 영광된 것입니다. 

여러분 옛 시대에 살지만 새 사람이 있고, 새 시대에 살지만 옛 날 구습을 버리지 못한 옛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이 어떤 형태로든 변한다고 해도 내가 변하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새 해가 되면 또 다시 우리 자신을 먼길을 떠나는 자동차를 점검하듯 다시 돌아 봐야 합니다. 그리고 과거의 구태의연하고 후회스러웠던 일들을 다 정리하고 새 사람으로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중생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옛 습관을 다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새 해를 살아야 합니다. 나의 목적, 생활, 신조, 생각, 그리고 마음이 모두 달라져서 주님을 위해 살고 이것저것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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