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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우리는 성령이 거하는 집 (고전 6: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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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성령이 거하는 집 (고전 6:19~20)


1. 쓰레기 집

지난 2006년 5월 초, SBS <긴급출동 SOS 24> 팀 앞으로 "동생 귀에서 바퀴벌레가 나오고, 집안은 좁은 골목길처럼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예요."라는 제보와 함께, 사람이 살고 있다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쓰레기로 가득찬 집 내부를 촬영한 동영상이 전해졌습니다. 제보자는 “온갖 쓰레기들 속에 방치된 어린 두 동생들을 구해 달라”며 구조요청을 한 것입니다. 이 제보를 받은 <긴급출동 SOS 24> 팀은 쓰레기 더미로 뒤덮인 이 집의 기막힌 실태를 취재하여 방영했습니다. 

방송에 따르면, 쓰레기를 모으는 엄마로 인해 집이 쓰레기장으로 변한지는 4년째였고,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쓰레기를 치운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온 집 안에는 폐지와 고물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어떤 방은 아예 바닥에서 천장까지 쓰레기로 가득 차 있어서 사람이 들어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CCTV로 지켜 본 엄마의 모습이었습니다. 엄마는 온갖 잡동사니뿐만 아니라, 남이 먹다버린 음식 쓰레기까지 죄다 가져와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 음식 쓰레기 때문에 집은 악취로 진동했고, 아이들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으며, 그 집 안에 잠간만 있어도 몸에 냄새가 배어들 정도였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전문가는 엄마의 행동을 ‘수집 강박’이라고 했습니다. 즉 쓰레기와 같이 쓸모없는 것을 버리지 못하고 모으는 증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2008년 1월, 역시 SBS <긴급출동 SOS 24>에서는 “쓰레기 집 4남매”라는 제목의 충격적인 사연을 또 한 번 방영했습니다. 집안에는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그 엄동설한에 난방이 안 된 채로 4남매와 장애를 가진 아내를 방치해놓은 구두쇠 아버지의 사연이었습니다. 4남매는 썩은 악취로 진동하는 집에서 그 추운 겨울에도 이불만을 뒤집어 쓴 채로 지내고 있었고, 장애를 가진 그 사람의 아내는 치아가 모두 빠져 있었으며, 한 번도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돈이 없어서’라고 궁색한 변명을 한 아버지는 자동차를 구입해 몰고 다녔고, 무면허 운전으로 적발이 되어 막대한 벌금을 물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11월, SBS <긴급출동 SOS 24>에서는 또 한 번 쓰레기 집 이야기를 방영했습니다. 그 집에는 엄마와 아들, 단 둘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사는 집안은 온통 짐들과 쓰레기로 가득했고, 인상적인 것은 그렇게 지저분한 가운데서도 유독 아들만은 씻기고 또 씻기는 엄마의 비정상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쓰레기로 가득한 집과 그 속에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방송을 본 사람들에 의하면, ‘비위가 상해서 더 이상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모습이 방송에 소개된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다른 곳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고, 아니 지금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2. 하나님의 집인 성도

1) 성도는 성령의 사람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최고 신비는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윤재’라는 목사님이 미국에 가서 신앙 세미나를 실시하던 중에 거기서 남자 한 분을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맨 앞자리에 앉아있던 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은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자신 있게 “예!”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또 물었습니다. “그러면 성령도 받았습니까?” 그랬더니 한참 머뭇거리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성령님은 아직 ···.” 그래서 목사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예수님과 성령님은 다른 분입니까?” 그가 한참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니오, 같은 분이긴 하지요.”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곧 성령님을 영접한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네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남자는 큰 눈을 깜빡거리며 “그렇겠네요”하고 고개를 끄덕거렸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도들 가운데 이 남자처럼 ‘내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성령을 받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물론 잘 못 알고 있는 것이죠.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는 자신이 선택해서, 자신이 믿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는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즉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로 믿어 그리스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에는 그리스도의 영, 즉 성령님이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2장 3절 하반 절을 보십시오.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이미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움직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입니다. 즉 여러분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안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이것은 너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2) 성도는 성전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은 것은 곧 성령님을 영접한 것과 같다는 것, 즉 성도는 성령님을 모시고 산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성도 여러분은 성령의 집, 곧 성전이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성령님은 이미 여러분에게 오셨고, 여러분과 함께 살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여러분들에게 간곡한 말로 호소합니다.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3:16,17)” 

사실 이것은 주님께서 구약성경에서부터 계속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과 그 백성 이스라엘 간의 가장 기본적인 언약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장막을 치고 거하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 백성 간의 기본적인 언약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 오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거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요한복음 1장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라고 합니다. 여기서 이 “거하시매”라는 말을 헬라어의 문자적인 의미 그대로 번역하면, ‘장막을 치고 산다’는 뜻입니다. 

즉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 둘 다 전하는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 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빈집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른 어떤 존재가 거하는 집도 아닙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은 성령님께서 거하시는 곳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성령님은 여러분 안에 오시어 여러분과 함께 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여러분에게 지극히 당연한 말로 들릴 것입니다 마는, 중요한 것은 수많은 성도들이 이것을 지식적으로만 알지, 생활 속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속에서 함께 계신 성령님을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님이 나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그것을 내 몸으로 내 생활 속에서 깨닫는 순간 나는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습니다. 내가 어떤 태도로 그 분과 함께 살아야 하는지, 그 분을 어떻게 대하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오랫동안 나를 주장하고 움직여왔던 나의 자아와 내 마음대로 생각한 감정들을 어찌 처리해야 하는지···. 그래도 꽤 괜찮은 나라고 생각했던 나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때 성령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혔듯이 십자가에 너의 자아를 못 박고, 이제는 너의 뜻과 너의 감정대로 살지 말고 나의 음성과 나의 마음에 귀를 기울이고 살아가라. 이제는 너를 드러내거나 나타내지 말고, 나를 나타내는 삶을 살아라. 그리고 너를 통하여 내가 마음껏 일하게 해 다오.” 그래서 그때부터 나는 나의 마음과 육신을 온전히 성령님께서 통치하시도록 내어드렸습니다. “성령 하나님! 저의 마음과 육신을 다스려 주시고, 저를 통하여 당신을 마음껏 드러내시옵소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령님이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지식적으로만 아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령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나, 또 여러분이 무엇을 하든지, 늘 여러분과 함께, 그리고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 여러분을 사랑하여 여러분 곁에 있는데, 여러분을 도우려 하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것들을 주려고 하는데, 여러분이 아예 그를 무시하고 모른 척 한다고 해 보십시오. 얼마나 화나는 일이겠습니까? 주님을 모시고 산다고 하면서도 ‘뒷방 성령님’으로 취급하면 성령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일반 사람 같으면 벌써 여러분 곁을 떠났을 것이고, 배은망덕(背恩忘德)이라 하여 원수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그 긴 세월 동안 그를 무시하고 도리어 모독하는 일을 저지른 우리를 떠나지 않으셨습니다. 침묵 가운데 늘 그 자리에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님을 의식하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감사하고 찬양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처럼 성령님께 말하시기 바랍니다. “ 성령님! 항상 저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저로 성령님의 은혜 속에 늘 머물게 하시고,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신령한 은사와 삶의 지혜와 분별력을 누리게 하소서.” 

여러분, 성령님이 여러분에게 머무신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머무신 일 그 자체도 놀라운 일이지만, 계시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크고 놀라운 것을 주시기 위하여 머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늘 성령님께 말씀드리고, 묻고, 의논하고···. 언제나, 어디서나 성령님과 동행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인 여러분이 하실 일입니다.

3) 성도는 거룩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뭔가가 남은 것 같지 않습니까? 아직도 남아있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그 답은 바로 여러분의 “거룩”입니다. "거룩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카도쉬"와 헬라어 "하기오스'란 말을 번역한 것입니다. 이것은 "자르다", "분리하다"는 말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거룩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구별해 놓은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의미 때문에 성막에서 사용된 물건을 "성물"이라 불렀고, 제사장직을 "성직"이라고 불렀으며, 여러분들을 "성도"라고 부른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의 집이 된 여러분은 성전이기 때문에 반드시 거룩하게 살아야만 합니다.

❶ 이 거룩한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거룩한 삶"은 "구별된 삶"을 뜻합니다. 이것을 좀 더 쉽게 말해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여러 민족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셔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알리시며, 하나님의 거룩을 세상에 드러내길 원하셨고, 또 그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요구된 가장 우선적인 것이 거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도록 율법을 주셨고, 성결 법을 주셨으며, 제사법을 가르치셨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 지켜야 할 윤리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그 동안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하나도 없었던 그들을 완전히 다르게 만드신 것입니다. 그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기 위하여 이전과도 다르고 우상을 섬기는 이방민족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세상 가운데서 성도로 부르신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드러내고, 여러분의 언행을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며, 여러분의 섬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드러내야 하는 목적으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여러분이 달라져야 합니다. 주님을 믿기 전과 달라져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도 달라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세상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면 하나님의 위대한 목적을 이룰 수 없기 때문입니다.

❷ 두 번째로 거룩한 삶은 과거와 옛 사람과 세상적인 것을 잘라내는 삶을 뜻합니다. ‘거룩하다’란 히브리어의 의미 중에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자르다(cut)’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버릴 것은 버리고, 잘라 내야 할 것은 잘라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애굽에서의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애굽에서 먹던 우상의 제물을 여전히 먹고 마시며, 애굽에서 놀았던 세상 쾌락의 유흥들을 끊어버리지 못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그것을 떨쳐버리고 잘라낼 수 있도록 가장 적절한 장소로서 광야를 택하셨습니다. 광야는 정말 아무것도 없는 곳입니다. 세상 유흥도, 세상 것들을 구입하는 가게도, 먹을 것도, 쉴 곳도 없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없는 곳이지요. 하나님은 400년 넘게 습관화 되어 있는 노예근성을 버릴 수 있도록 40년의 광야를 지나게 하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야 했고,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을 중심으로 살면서 오직 보이는 것은 성막 위에 떠오른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었으니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만 먹어야 했으며, 하나님의 말씀만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면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는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훈련을 통하여 이스라엘은 옛 근성과 옛 습성과 습관들이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는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에게도 아직까지 버리지 못한 옛 사람의 모습, 끊어버리지 못한 과거의 삶, 죄악된 습관들은 없습니까? 그것을 쌓아두고 있으면 여러분들도 서두에 말씀드린 쓰레기 집과 같습니다. 주님은 여러분 속에 쌓아둔 쓰레기에 대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후7:1).” 빨리 쓰레기들을 버리고 치우고 청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성도들 속에 가득 찬 쓰레기들은 어떤 것들일까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마15:19,20).”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롬1:29~3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 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0).”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계21:8).”

이러한 모든 것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버리지 않으면 여러분이 성령의 집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며 위대한 일인지를 결코 맛볼 수 없을 것입니다. 설교 서두에서 첫 번째 소개해 드린 <쓰레기집>의 경우, 방송사에서 적극 나서서 “수집 강박”이라는 병을 가진 엄마를 입원 치료시켰고, 쓰레기로 뒤덮여 엉망이 된 집을 이웃 사람들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서 청소했습니다. 집안 청소는 일주일간이나 이뤄졌고, 아이들의 심리치료도 함께 병행됐습니다. 집안에 모아둔 쓰레기를 치우는데 에만 2.5톤짜리 쓰레기차가 무려 5대나 동원되었습니다. 그 후, 청소되고 정리된 집안으로 아이들이 들어섰습니다. 깨끗해진 집안 풍경에 아이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잘라 버려야 할 것들을 과감히 잘라 버리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내려놓아야 할 것들, 잘라 버려야 할 것들을 아직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면, 여러분의 모습은 쓰레기로 가득 찬 집과 같을 것입니다. 그런 집에는 성령님이 침묵하며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살면 주님의 은혜와 복이 임할 수가 없습니다.

❸ 세 번째로 거룩한 삶을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부정적이고 뭔가를 금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도는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 술을 마셔도 안 된다, 도박을 해서는 안 된다, 나이트클럽이나 카바레에 가서는 안 된다, 그리고 이상의 것들을 즐기는 사람들과 어울려서도 안 된다’는 것, 그 이상이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한 삶은 무엇입니까? 이러한 거룩의 예를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인도의 성자로 불리던 ‘마더 테레사’입니다. 테레사는 입으로, 그리고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독교에 관해 말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를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전부를 나누었으며, 자신을 희생했고, 그 누구도 가지 않으려는 곳으로 갔으며, 집도 없고 희망도 없는 사람들을 보살핌으로써 진정한 기독교가 무엇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거룩은 손으로, 발로, 그리고 전 삶으로 보여지는 것이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과 그 성령님이 하시는 성령의 거룩한 열매들을 사람들에게, 세상 속에서 맺으면서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죄악된 것을 피하기보다, 어둡다고 그 길로 가지 않기보다, 더럽다고 몸을 사리기보다, 그 속으로 들어가 그곳을 환하게 바꾸고, 깨끗하게 만들고, 정결하게 만드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삶을 사는 것이 거룩입니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하시려는 일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당신은 거룩한 하나님의 집

말씀을 맺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보살이 살던 집으로 이사를 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집의 외관이나 구조는 바꿀 수 없다고 해도, 리모델링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지 않겠습니까? 벽지 안에 부적을 붙인 집도 있고, 천정을 뜯어내니까 그 속에도 부적이 있더라고요.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들어가 살아도 기분이 찜찜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살 집도 이러하다면, 성령의 집인 성도는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정말 대대적인 리모델링이 필요합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감정, 생각, 사상, 가치관, 습관이나 버릇 등 전부를 뜯어고쳐야만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거하실 집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문제는 자신이 성령의 집인데도, 아직도 옛것, 주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을 그대로 둔 채 ‘나는 성령의 집이다’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빨리 버리시고, 바꾸시고, 고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여러분이 성령의 집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하고 놀라운 일인지를 알고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성령님의 집입니다. 이전과,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합니다. 이전의 것을 끊고 버리고 잘라야 합니다. 버리지 못한 삶과 영혼의 쓰레기들을 치워야 합니다. 그럴 때에 성령님은 충만하고도 풍성하게 여러분 안에 거하실 것이고, 그때 여러분의 삶에는 놀라운 일들로 가득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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