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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축복의 길, 영광의 길 (민 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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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길, 영광의 길 (민 32:1~5)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 동편을 정복하므로 마침내 가나안 입국의 거점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리고 정복된 땅에 정착해서 살고 싶어 하는 자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지파 중에서도 용감하기로 이름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정복하는데 피 흘리지 않고 현실에 만족하며 살기를 원했습니다. 

출애굽의 지도자요 광야교회의 영도자 모세는 현실에 만족하려는 이들을 책망했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돌연히 가나안 정복의 대업을 포기하고 요단 동편에 안주하겠다는 주장은 이스라엘 공동체에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요구가 왜 비판받아야 합니까? 

Ⅰ. 상황윤리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32장 1절에 『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의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고 했습니다. 
르우벤은 야곱의 장남입니다. 갓은 레아의 몸종 실바의 첫째 아들로서 야곱에게는 일곱째 아들입니다(창 29:32; 30:11).

여기 『 심히 많은 가축의 떼 』라고 했습니다. 가축들은 출애굽 당시에 끌고 나온 것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정복 전쟁 중에 탈취한 것입니다.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은 요단강 사이에 위치한 땅으로 목축에 매우 적합한 지역입니다. 따라서 이 곳은 고대로부터 질 좋은 소와 양들로 유명했습니다. 그 곳을 바라본 두 지파의 눈은 욕심으로 가득찼습니다. 그들의 탐욕은 하나님의 약속과 자신들의 사명을 망각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 다른 지파들도 가축을 소유했습니다. 그들도 자신들이 정복한 기름진 요단 동편 땅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곳에 마음을 두지 않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물욕을 제어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곳이 가축에 적당한 곳인 것은 분명합니다. 야셀과 길르앗 지역이 가축 사육에 절대 필요한 생활용수와 목초가 넉넉한 곳이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스라엘과 대적했던 시혼과 바산 왕국의 땅이었고 미디안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이들은 이 땅에 정착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가축을 먹이기에 적당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두 지파에게는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기 때문에 그 땅에 자기들의 가축을 풀어놓고 먹이면 좋겠다는 생각은 인지상정입니다. 결국 이와 같은 욕심이 모세에게 나아가 요단 동편을 자기들의 산업으로 줄 것을 요구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어처구니없게도 가나안 정복이라는 대업에서 자기들을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에서 보면 그들의 행동은 흠잡을 데 없는 상황에 대한 신속한 대처와 예리한 판단력이 돋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 앞에 공의로운 행동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전에도 말한 바 있지만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죄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지나쳐서 영적욕구와 대립될 때는 본능적 욕구를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고전 9:27).

뿐만 아니라 그들의 판단 또한 전혀 올바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나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은 간 곳이 없고 오직 자기 유익만을 구하는 상황윤리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만약 그들의 계획대로 요단 동편에 머물렀다면 과거 가데스바네아 사건처럼 그 두 지파가 하나님의 진노로 멸망 받을 것임에 틀림없었습니다. 

민수기 32장 13-15절에 『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로 사십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필경은 다 소멸하였느니라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 』고 했습니다. 

이들의 안목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땅의 기름진 것만 본 것과 같습니다. 롯이 그 땅이 죄악으로 관영하여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하리라는 사실을 전혀 보지 못한 채 소돔성에 정착했던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 13장 10-13절에 『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고 했습니다.

우리가 비록 육신을 가지고 세상에 거하지만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영적 혜안이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위엣 것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골로새서 3장 2절에 『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고 했습니다. 


Ⅱ. 이기적인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32장 4절에 『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 땅 』은 단순한 목초지만을 의미하지 않고 성읍을 포함한 영토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영토를 『 여호와께서 쳐서 멸하셨다 』는 말은 여호와께서 이방의 통치자를 몰아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을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영토로 삼으셨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 정복 전쟁이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성전(聖戰)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떠나기 전에도 그들의 선조 대에는 주(主) 산업이 목축업이었습니다. 

창세기 47장 3-4절에 『 …그들이 바로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목자이온데 우리와 선조가 다 그러하니이다 하고 그들이 또 바로에게 고하되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여 종들의 떼를 칠 곳이 없기로 종들이 이곳에 우거하러 왔사오니… 』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들이 애굽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광야 40년 간 방황할 때도 목축과 관련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번번이 그들은 정복 전쟁에서 가나안 주변국들의 가축을 탈취하여 그들의 소유물로 삼았습니다(민 31:32-36). 

따라서 그들에게는 많은 가축이 있었으므로 좋은 목초지가 절대 필요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르우벤과 갓 지파에게는 타 지파보다 더 많은 가축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절실했습니다. 

인간들의 삶이 그 어떤 경우에든지 하나님의 뜻에 반(反)하는 것은 정의로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기주의라는 것 외에 다른 변명이 필요 없습니다. 자신들이 정복한 요단 동편 땅이 가축을 먹이기에 알맞은 땅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의 정복지가 푸른 초장과 기름진 땅임을 감안할 때 가축 떼가 심히 많은 르우벤과 갓 자손은 그 땅에 대한 욕심을 낼 만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자신의 유익만을 생각하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적 발상이었습니다. 다른 지파 형제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자신들의 이기만을 위한 생각이었습니다. 

저들의 지금의 상황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진 힘이 요구되는 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지파의 요구는 이스라엘의 단결을 저해하고 그 힘을 약화시키는 심각한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 본격적인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도 전에 신성한 공동체의 붕괴를 가져올 수도 있는 심각한 발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가나안 정복이라는 한 목표아래 이스라엘 온 지파는 함께 했습니다. 그러나 이 중차대한 시기에 누구는 편안히 가축만을 먹이고 누구는 나가서 싸워 피 흘린다는 발상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세도 그들의 요구를 듣자마자 책망했습니다. 
민수기 32장 6절에 『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생각은 너무 속된 것이었습니다. 


Ⅲ. 소유가 본질에 앞서가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32장 5절에 『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 산업 』( , 아후자)이란 '소유', '기업'등의 뜻입니다. 기업은 '잡는다', '취하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르우벤과 갓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을 그들의 소유로 취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전통은 하나님이 각자에게 허락하신 기업, 즉 땅은 어느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고유한 소유로 간주되었습니다. 따라서 르우벤과 갓 지파는 좋은 땅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얻기 위해 이와 같이 이기적인 요구를 했습니다. 

『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라는 이 말 속에는 험난한 가나안 정복 전투에 참여치 않고 요단 동편에서 안주하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요구에 대하여 들어주기는커녕 도리어 책망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하신 약속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유업으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3장 8절에 『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이르려 하노라 』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약속대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거대한 민족 집단으로 성장시키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열조와 맺은 400년 기한이 되어 애굽에서의 나그네 생활을 끝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에 『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고 했습니다. 

마침내 모세를 지도자로 삼은 출애굽의 역사가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체험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고 도리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이것이 출애굽의 비극으로 작용하고 말았습니다. 

저들은 애굽 생활을 그리워하며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이 원망이 극에 달한 것이 가데스바네아 사건이었습니다(수 14:1-10). 당시 가나안 정탐을 나갔던 이스라엘 12지파 중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정복의 비전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제외한 10지파 정탐꾼들은 그 땅의 형편을 말하면서 가나안 정복의 불가능을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에 동조한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습니다. 그리고 심지어 한 장관을 세워 애굽으로 돌아가자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이 같은 일은 이스라엘을 위해 가나안 땅을 준비하시고 자기 백성들을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뜻과는 반대였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순종했던 출애굽 1세대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나안 땅을 보지 못한 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바로 이 가데스바네아 사건을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에게 상기시켰습니다. 그리고 요단 동편을 자기들의 산업으로 줄 것과 요단을 건너지 않도록 허락해 달라는 그들의 요구를 책망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결정이 가데스바네아 사건의 주역이었던 그들의 선조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불순종의 죄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광야 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하는 죄가 얼마나 비참한 결과를 초래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고 제 욕심만을 차리는 두 지파에게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이 분노는 다시 죄악 가운데로 걸어 들어가는 두 지파에 대한 의분입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뜻은 요단 동편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가나안을 향해 나아가 그 땅을 정복하는 것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이 가나안인들과의 필연적인 전쟁으로 고통과 슬픔일지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순종하는 마음으로 그 뜻을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에게는 각자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이 싫다고 십자가를 벗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하기를 고집 부리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라고 말했던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오늘의 우리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탁월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의 모양대로 창조하셨습니다(창 1:26).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고 사람이 생령이 되게 하셨습니다(창 2:7).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창 2:21). 그리고 아담에게서 취한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습니다(창 2:22).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생육의 복을 주셨습니다. 번성의 복을 주셨습니다. 땅에 충만한 복을 주셨습니다. 땅을 정복하는 복을 주셨습니다.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는 복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8절에서 말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문화적인 인격자로서의 문화적인 사명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탁월한 이성작용을 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이성작용을 통하여 이 모든 일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주전자의 물이 끊는 것을 보고 증기 기관차를 발명했습니다. 멀리 있는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필요했기 때문에 전화를 만들고 오늘의 화상전화까지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새처럼 날고 싶어서 비행기를 만들었습니다. 바다 밑을 보고 싶어서 잠수함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다른 피조물에게 없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탁월한 이성작용입니다. 

높은 나무나 전봇대에 집을 짓는 까치는 까치가 처음 창조될 때부터 지금까지 수 천 년 동안 똑같은 집을 짓고 삽니다. 이 땅에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짐승, 조류, 파충류, 벌레 등등 살아서 움직이는 것들은 창조 때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본능적 생태의 경륜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 생명들에게는 이성작용이 없이 창조적 본능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육지에 사는 동물이나 바다에 사는 어류들이 사람처럼 이성작용이 가능하다고 하면 사람의 먹이감이 되지 아니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사람이 그들의 먹이감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계속해서 생각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에덴동산 원시 인간들에게 오늘 같은 주택이나 문화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아직도 인간들은 계속해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 새 것에 대한 동경으로 충만합니다. 새 것이 나오기만 하면 돈을 벌 수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의 새 기록은 곧 돈입니다. 새 것이 있어야 비로소 대접을 받는 것입니다. 

변화산의 영광을 본 베드로가 그곳에 초막 셋을 짓고 머물기를 원했습니다(마 17:2-5). 우리는 변화산의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변화산에서 내려와 자기가 받은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적어도 야곱의 장남 르우벤 자손과 실바의 첫째 아들 갓 자손들이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장남들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용감하기로 유명한 저들이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주체 세력들이 이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반고소의 주체 교회입니다. 여러분들은 우리 교회의 주체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교회처럼 편안한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이대로가 좋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모든 기관이 '이대로가 좋으면' 안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대로가 좋으면' 안 됩니다. 나는 이대로 버려두고 가십시오. 나는 이대로 있을 테니 라고 하는 신앙은 버리십시오. 달리는 것이 힘들지 않는다면 필경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선교원이 이대로가 되면 안 됩니다. 주일학교, S.F.C. 청년회, 남녀 전도회가 이대로가 좋으면 안 됩니다. 찬양대, 교사회, 선교회, 건축위원회, 고려신학교 후원회가 이대로가 좋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교회적 사명이 부담이 된다고 이대로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사명인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 태어날 때 구원인으로 태어났습니다. 구원인은 곧 사명인입니다. 
사명인도 두려움이 있습니다. 사명인도 피 흘리는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것이기 때문에 저 천국을 향하여 앞으로앞으로 나아갑니다. 우리의 사명이 끝나면 우리는 이 땅에 더 이상 머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 같이 일어나 앞으로 갑시다. 우리의 나아갈 길은 하나님이 옛적에 우리에게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길입니다. 우리의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우리의 길은 영광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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