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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침묵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 (사 64: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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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 속에 임하시는 하나님 (사 64:5~12)
 
우리는 소유하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에 노벨문학상 작가였던 포르투갈의 사라마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눈이 멀쩡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실명바이러스에 감염이 되어 하나 둘씩 눈이 멀기 시작하면서 생기는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차량이 막히고 충돌하는 사건으로 영화가 시작되고 정부는 실명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을 수용소에 강제로 감금합니다. 이 영화 속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통해 인간의 본성이 어떠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가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가르쳐줍니다. 
  
볼 수 없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욕구는 식욕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먹을 것을 위해 투쟁합니다. 먹을 것을 가진 자가 권력자가 됩니다. 그리고 욕망의 두 번째 순위는 성적욕구였습니다. 남자들은 성적욕구의 충족대상으로 여자들을 원합니다. 여자들은 더 이상 인격이 아닌 성적인 대상으로 전락합니다. 무엇보다 총을 든 자, 힘이 센 자가 살아남는 약육강식의 폭력적인 인간상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계는 완전히 암흑입니다. 자동차도 필요 없고 아름다운 여자와 멋진 남자도 의미가 없습니다. 높은 고층빌딩과 화려한 네온사인도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합니다. 수천 년 동안 쌓아둔 모든 문명이 하루아침에 종이 꾸겨지듯이 사라집니다. 인간은 동물 세계 아니 동물보다도 못한 세계로 빠져 들어가 모든 것이 난장판이 됩니다. 영화는 결국 무질서의 세계로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보여주려는 작가와 감독의 의도는 우리가 소유하고 누리는 수많은 것들을 잃고 나서야 너무 늦게 가치를 깨닫는다는 사실입니다. 

고통은 새로운 빛의 역사를 만들어가게 해줍니다.  

또 다른 눈먼 사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김선태 목사의 “땅을 잃고 하늘을 찾은 사람”이라는 새로 나온 책이 있습니다. 몇 일 전 조선일보에 두면이 할애되어 김선태 목사의 인터뷰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이분은 앞을 보지 못합니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지고 있다가 시각장애인이 되었기에 더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는 아홉 살 때까지는 볼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 와중에 수류탄이 터지면서 부모도 잃고 눈도 잃었습니다. 그는 이런 욕설을 밥 먹듯이 들었다고 합니다. “급살 맞아 죽을 놈, 벼락 맞아 죽을 놈” 김 목사는 고아로 수많은 비난과 욕설을 들으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거지로 다른 사람에게 동냥하면서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죽지마라. 네가 자라서 옛 이야기하면서 살 날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기에 모진 길을 해쳐나갈 수가 있었던 그는 실로암 안과 원장이라는 직분을 통해 3만 2천명에게 개안수술을 시켜주고 빛을 보게 해주었습니다. 이 일로 그는 작년에 막사이사이상도 수상했습니다. 김 목사는 자서전 서문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었다.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었고, 두 눈의 빛도 잃었고, 친구도 잃었다. 친척도 잃었고, 건강도 잃었으며 희망도 재산도 잃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갖게 되는 가장 기본적인 것들을 모두 잃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잃었기 때문에 하늘을 찾을 수가 있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지난 삶은 감사로만 가득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으로 잃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지금도 매일 감사한다고 고백합니다. 이 분을 만나보면 얼마나 얼굴이 쾌활하고 밝은지 모릅니다. 두 눈을 가진 사람들보다 더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기에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눈먼 것은 그가 받은 최대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 인해 똑같은 고통을 당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빛의 역사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새 역사를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소중한 분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고난은 어느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괴로움과 불행입니다. 

고난 자체는 기쁨과 즐거움이 아닙니다. 고난은 괴로움이고 불행입니다. 고난은 슬픔입니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고난을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 주시는 역설적인 인생의 축복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고난을 넘어서서 영원한 세계를 꿈꾸게 합니다. 회복과 치유의 세계를 바라보게 합니다. 고난과 역경을 뛰어넘는 희망의 풍요가 넘치는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극복의 방식을 경험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만드셨습니다. 우리는 한겨울의 폭풍우치는 냉혹하고 끔찍한 현실을 맞게 된다면 비명을 지를 것입니다. 우리는 견디기가 어려워 외마디 부르짖음을 외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시편에서 수없이 많은 견디기 어려운 고난의 현장을 통과하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들도 똑같이 우리와 같은 질문을 합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왜 하필이면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내게 이런 문제와 고난이 다가왔습니까? 어느 때까지 이 고난이 지속됩니까? 언제까지 참아야 합니까? 내가 언제까지 고난의 현장을 감수해야 합니까?’ 수없이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똑같은 고백을 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이사야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 (이사야 64:12)

이사야는 자기 민족이 멸망당하여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고, 온 백성들이 참화 속에서 무너져가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 앞에 외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고난과 비탄의 사건들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이사야처럼 소리치고 외쳐야 합니다. 속으로 너무 오랫동안 삭이면 안 됩니다. 신앙이란 때로 하나님께 항의하며 외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내 가슴이 한으로 맺혀있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 터트리는 것입니다. ‘왜 납니까? 왜 하필 이런 어려움입니까? 왜 이런 시련을 내게 주십니까?’ 

괴로울 때 하나님 앞에 속에 있는 것을 터트리며 울부짖으십시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속에 있는 것을 터트려 상처를 주지 말고 먼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부르짖어야 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항의하며 슬피 울고, 분노하면서 부르짖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속에 있는 우리를 치유하시는 방식은 슬픔과 아픔, 탄식과 눈물을 하나님 앞에 아뢰는 것입니다. 때로 말이 되건, 말이 되지 않건 상관없이 아뢰십시오. 고통당하는 이유가 내게 있건, 다른 사람에게 있건 상관없이 터트리십시오. 이사야서에서 우리는 이렇게 부르짖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하건대 주의 종들 곧 주의 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이사야 63:17)

이사야는 자기 민족의 슬픈 현실을 목도하면서 하나님께 말도 안 되는 항의를 합니다. “하나님, 왜 이스라엘 백성을 주의 길에서 타락하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나님, 왜 이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 왜 우리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우상숭배를 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부패와 부정은 자기가 행하고 책임은 하나님께 돌리는 뻔뻔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자녀들이 사춘기가 되면 아버지, 어머니에게 항의를 합니다. “아빠 왜 나 낳았어요? 안 낳았으면 내가 이런 경험을 하지 않을 텐데, 왜 나를 공부시켰어요? 왜 내게 이렇게 하셨어요?” 자신의 잘못한 모든 것을 부모에게 핑계 대는 사춘기 자녀들처럼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서 항의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이사야의 항의를 그냥 받아주십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다 풀어라. 내 앞에 와서 무슨 이야기라도 다 해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괴로움과 어려움이 있을 때 그것을 속으로 삭이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터트려 상처를 주지 말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터트리십시오. 하나님을 향해 울며 항의하던지 화를 내며 분노하던지 하나님과 씨름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항의하는 이사야의 모습을 침묵하면서 듣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항변하고 있을 때 이사야는 자기 죄악과 민족의 죄악을 깨닫고 말합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이사야 64:5)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문제를 토해낼 때 치유가 시작됩니다. 

하나님 앞에 내 문제와 비통함을 토해낼 때 내가 누구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인식할 수 있습니다. 그때 내 자신의 죄악과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부터 치유의 문이 열려지기 시작합니다. 나는 구원을 받을 수조차 없는 죄인임을 인식할 때 하나님께서 위로해주십니다. 이사야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누추함을 계속해서 고백합니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이사야 64:6)

자신이 찬란한 줄 알았는데 더러운 옷을 입은 자와 같다고 고백합니다. 줄기에 붙어서 잎사귀가 청청한 줄 알았는데 잎사귀가 떨어져 시들고 말라비틀어져 바람에 흩날리는 잎사귀가 되고 말았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실존의 한계성과 무능함을 고백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십니다. 
  
여러분, 인간이 얼마나 완악하고 미련한 존재입니까? 하나님이 축복을 주실 때는 감사하지 않던 인간들이 하나님이 침묵하시며 내버려두실 때에야 인생이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축복해주지 않으시면 내가 쌓아놓은 재산도 내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내 건강과 사랑하는 가족과 삶의 모든 축복이 잠시 하나님께서 빌려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의 인생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에야 비로소 내 삶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줄을 깨닫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며 죄악을 고백합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죄악을 진심으로 고백하며 겸손해집니다. 땅바닥에서 영점체험을 하면서 하나님의 은총과 용서를 기다립니다.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너무 분노하지 마시오며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마시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나이다” (이사야 64:9)

“여호와여,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나 좀 보세요. 하나님, 더 분노하지 마세요. 이제는 좀 멈추어 주세요. 내 죄악이 넘치는 것을 알지만 영원히 기억하지 마세요. 하나님 앞에 나는 마땅히 진노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괴롭습니다. 고난이 너무 큽니다. 하나님 용서해주세요. 진노하지 마세요.” 이사야는  하나님께 더 큰 신뢰를 가지고 모든 것을 맡기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 (이사야 64:8)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여호와여 하나님은 아버지십니다. 하나님은 토기장이십니다. 나는 자녀입니다. 나는 진흙입니다. 내 떠들던 입을 이제는 멈추겠습니다. 소란하게 분노하던 분노를 이제는 멈추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진흙입니다. 진토입니다. 바람이 불면 사라질 먼지 같은 존재입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빚으시는 대로 살겠습니다. 나를 마음대로 써주세요. 내가 가진 것 마음대로 써주세요. 내 모습을 마음대로 써주세요. 내 성품을 마음대로 써주세요. 나는 다만 하나님이 내 아버지이시고 사랑하는 분임을 알고 주님께 모든 것을 드리고 맡기겠습니다. 토기장이신 하나님께서 나를 빚어주옵소서.” 
  
이사야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기대하는 기다림의 신앙을 갖게 됩니다. 기다림이란 쉽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래 기다리지 못합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면서 기다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의 신앙 이사야의 가슴속에 맺혀졌습니다. 기다림에 대한 이런 말이 있습니다. 

“기다림은 더 많은 것을 견디게 합니다. 
기다림은 더 먼 곳을 보게 합니다. 
기다림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눈을 갖게 합니다.”

누가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누가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누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여명의 빛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기다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우리의 구원의 주님이신 예수님을 기다립시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가정과 직장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우와 파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토해내십시오. 분노하면서 토해내십시오. 슬퍼하면서 토해내십시오. 눈물 흘리면서 토해내십시오. 항의하면서 토해내십시오. 어떤 형태로든지 하나님 앞에서 토해내고 하나님 앞에 서십시오. 하나님 앞에 내가 어떤 존재인지 깨달으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지금까지 지켜보고 계셨는지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토기장이이신 하나님께서 빚으시는 손에 나 자신을 맡기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로운 빛의 역사를 경험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정금같이 단련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이 땅에 평화를 만드시기 위해서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낮고 천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고통에 함께 참여하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날 영광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실 것입니다. 그 때는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고 우리는 영광의 하나님을 바라볼 것입니다. 

그때 주님께서는 우리가 온전히 흘린 눈물을 닦아주시고 위로해주실 것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 딸이라고 확인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실 영광을 앞당겨 경험하면서 하나님을 다시 기다리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다리는 마음으로 성탄절을 맞이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주위에 넉넉하게 보여주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우리는 힘들고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 다가올 때 먼저 불평하고 탄식하며 무너져갈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먼저 쏟아 붓게 하시고 내 모든 것을 토해내며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옵소서. 때로는 침묵 속에 가까이 오시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나를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며 다시 시작하게 하옵소서. 다시 용기를 가지고 앞을 향해 나아가게 하옵소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는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김지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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