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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의 열매 : 충성 (고전 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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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열매 : 충성 (고전 4:1~5)


세상에는 약 3만 가지가 넘는 직업이 있다고 합니다. 수많은 직업들을 가지고 각자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입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그 직업에 만족하지는 않겠지만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직업>이라는 단어를 영어에서 찾아보면 일반적인 직업을 의미하는 occupation이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리고 고학력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전문적인직업을 나타낼 때 profession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런데 본래 이 단어는 세 가지 직업에만 쓰이던 말입니다.<법률가>와<의사>, 그리고<성직자>에게만 사용하던 말입니다. 특별히 이 세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사회에서 존경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변호사는 내 인권과 재산을 보호하고 맡아주는 사람이기 때문에 존경해야 합니다. 의사는 내 건강을 맡아 주고 내 생명에 도움을 주기 때문에 역시 존경해야합니다. 그리고 성직자인 목사는 내 영혼을 맡아 주는 사람입니다. 영혼을 위해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존경해합니다. 

원래는 이렇게 세 가지 직업에만 profession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만 지금은 교사나·문필가등 학문적 소양을 필요로 하는 지적 직업에 두루 profession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토록 법률가나 의사, 성직자라는 세 가지의 직업이 다 중요합니다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셋 다 위험한 직업입니다. 언제 위험해지느냐하면 이 셋이 돈을 벌자고 덤비면 문제가 됩니다. 

만약에<의사>가 병 고칠 생각보다 돈을 벌자는 생각을 먼저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환자를 볼 때 "저 사람은 여기만 잘 고쳐주면 좀 더 오래 질 높은 삶을 살겠구나."이렇게 생각해야 되는데 "저 사람을 째면 돈이 얼마 나오겠구나."이 생각부터 한다면 큰일 아닙니까! 

어느 의사 부부가 싸움을 했습니다. 부인이 자꾸 돈 달라고 보챕니다. 의사가 돈이 없다고 못 줍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하는 소리가 "한 사람만만 째면 되잖아!"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남편이 소리 높여 대답합니다."아, 쨀 사람이 있어야 째지!"

사실 병원에 가면 의사들이 판단을 해서 수술을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거든요. 그런데 돈을 목적으로 한다면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무조건 "쨉시다" 한다면 이거 보통 문제냐 말입니다. 

또 <변호사>가 인권을 생각해서 변호 할 생각은 하지 않고 돈독만 올라 있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의뢰인은 어떻게 되든지 나는 수임료만 받아 챙기면 된다는 심정으로 일을 한다면 누가 존경하며 일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목사>가 기업경영인 이상으로 돈에 욕심을 내고 교회를 돈 버는 목적으로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구나 할 것 없이 자기의 정체성과 사명의식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외는 있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그런 위험 속에 노출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도 우리의 정체성을 확실히 알아야겠습니다. 그래야 사명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정체성과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 지어다"바울은 자신의 정체를<그리스도의 일꾼>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일꾼>이라는 단어에 대해 좀 생각해보겠습니다. 헬라말로는<휘페레타스>라고 하는데 뜻은"배 밑에서 노를 젓는 자"라는 뜻입니다. 

당시 배의 구조는 3층 혹은 4층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배의 맨 밑바닥에는 여러 개의 노가 있고 한 사람이 하나씩 맡아 노를 저어야만 배가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일꾼이란 바로 이 배의 가장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하급의 노예를 의미합니다. 자기의 의사와는 상관이 없이 "저어라" 하면 무조건 젓습니다. "멈춰라" 하면 멈춰야합니다. 이 배가 지금 어디로 가는지는 모릅니다. 알 바도 아닙니다. 싸우러 가는지 항복하러 가는지, 죽으러 가는지 살러 가는지, 동으로 가는지 서로 가는지도 모릅니다. "왜 저으라고 하느냐?","언제까지 젓느냐?"하고 물을 권리도 보장되지 않았습니다. 신호에 따라서 빨리 젓고 늦게 젓고 할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이 노를 저어서 내게 주어질 보상이 무엇일까?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은 꿈에도 가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이야기 하는 일꾼의 의미입니다. 

내 지식이라는 것은 필요 없습니다. 내 판단이라는 것은 쓰여 질 수가 없습니다. 내 자신의 전부를 다 바쳐버립니다. 생명도, 운명도, 명예도 다 맡겨 버립니다. 이 일꾼의 모습이 가장 잘 나타나는 영화가 있습니다. [벤허]라는 영화를 보셨겠지요. 그 영화에 보면 이 노예들이 노 젓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그렇습니다. 이것이 노를 젓는 일꾼입니다. 

자, 오늘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일꾼 되었다면 마찬가집니다. 교회 일 하는데 있어서"이거 왜 해야 합니까?", "어디로 갑니까?","언제까지 할 겁니까?","꼭 해야 됩니까?"하고 일일이 따지고 들지 말아야 됩니다. 사실 괜히 물으려고 들면 몸도 마음도 시끄러워집니다. 어쨌든 주님과 운명을 같이 하자는 것이라 생각하고 저어라하면 무조건 저으면 됩니다. 정말 궁금해서 못 견디겠어서 생각이 있다면"주님의 뜻이냐, 아니냐.","주님의 말씀이냐, 아니냐."만 생각하면 됩니다. 그리고 이게 주님의 뜻이다 싶으면 묵묵히 끝까지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답게 일하는 사람의 특징은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를 가도 말이 많은 사람은 그 교회에서 제일 일 안 하는 사람입니다. 틀림없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주어진 일을 충실히 묵묵히 끝까지 감당하며 사는 것을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이것을<충성>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비롯한 우리 모두의 정체성을 이런 의미에서<그리스도의 일꾼>이라 하였고, 

또 하나의 정체성을<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밝힙니다. 이 말은 헬라말로<오이코노모스>라고 하는데 한 집안의 사무를 관장하는<집사>혹은<청지기>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 드린 것처럼<일꾼>에게는 자기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습니다. 무조건,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묵묵히 끝까지 복종해야 합니다. 이것을<타율적 충성>이라고 합니다. 

반면에<집사>혹은<청지기>에게는<자율적 충성>이 있습니다. 그에게 권리도 있고, 능력도 주어지고 상당한 권한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기도 하고, 자기가 일을 만들면서 하기도합니다. 자기 의지대로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자율적 충성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중요한 것은 주인은 주인이라는 사실입니다. 오직 주인을 위하여 일해야 할 것입니다. 주인을 위해서 권리를 사용해야하고, 주인을 위해서 권한을 누려야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의 뜻을 알아가면서 주인의 뜻을 받들어 충성을 다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정체성의 의미는 주인이신 하나님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충성하는 자라는 말입니다. 

자, 이제<그리스도의 일꾼>이요,<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를 한 마디로 말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여러분, 누구든지 일을 맡는 것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이 되는 것도 쉽습니다. 그러나 그 일에 신실과 성실을 다하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한 번쯤 충성하기는 쉽지만 일평생 충성하기는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무엇보다도 충성을 구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일을 맡은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충성의 마음입니다. 헌신의 자세입니다. 변함없는 노력입니다.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을 가만히 보면 참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맡은 일을 입으로 모조리 해치우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하는 말만 들어보면 어려운 일이 없습니다. 당장에 일이 끝날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일을 맡기는 맡아 놓고 마음속으로만 골백번 결심하고 다짐하다가 끝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 두 사람 다 충성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충성이란 마음과 실행이 함께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생각과 다짐만으로 충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요, 행동하는 결과까지 이루어져야 충성입니다. 

<충성>이라는 말을 헬라어로 찾아보면<피스토스>라고 하는데 이와 비슷한 단어가 있습니다. <피스티스>라는 단어입니다. 그 뜻은<믿음>이라는 뜻입니다.<피스토스>라는<충성>이라는 말과<피스티스>라는<믿음>이라는 단어는 같은 데서부터 나온 말입니다. 이 말은 두 단어가 관련이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 의미를 생각해 보면 충성이란 믿음에서 온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주인을 믿고, 또한 주인이 나를 믿을 수 있을 때에 충성이라는 행동이 나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은 다르게 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구원이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믿을만할 때에 복을 주십니다. 내가 아무리 잘 났다 해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내가 미덥지 못하면 그 무엇도 주실 수가 없습니다. 돈만 주면 망가지는데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지식만 주면 교만해 지는데 어떻게 주시겠습니까? 잘살게 만들어 주자니 교회 안 나올 텐데 어떻게 잘살 수 있게 해주시겠습니까? 그래서 달라한다고 무조건 다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을 수 있을 때 주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주어졌다면 하나님께서 내 믿음과 충성을 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과 충성의 판단은 하나님이 하십니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나 자신의 판단은 언제나 미흡한 것입니다. 믿을 것이 못 됩니다. 

바울이 오늘 그것을 알았기에 남의 판단도 자신의 판단도 삼간다고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3,4절이 그 말씀입니다. 특히 4절에서 결론을 내립니다."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세상을 살면서 후회 없이 최선을 다하는 것은 분명히 아름다운 일입니다. 어쩌면 인간적인 판단으로만 본다면 이 이상 아름다운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설 때는 내가 최선을 다했다는 그것으로 접어두어야 합니다. 자기스스로의 기준으로 보상을 바라거나 결과를 기대하면 그 최선의 의미마저도 희미해져 버리고 맙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최선을 다한 그 일의 성격마저도 하나님이 분석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판단하시는 대로 그것만이 옳고 거기에 기준을 두고 충성을 다한다고 하는 사도바울의 자세를 배울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우리 안에 성령이 거하는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믿고 성령의 사람이 되었다면 충성을 생각하며, 충성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을 때 구원에 이른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믿을 만할 때, 우리의 충성을 믿을 수 있을 때 복을 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충성했을 때 큰일을 맡기십니다. 순수한 마음으로 진실하고 온전한 충성을 다할 때 그것으로부터 오는 큰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충성을 이루어 나가는 성령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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